|
다갈라 불망비(不忘碑 )
이문구님 등단 작품입니다.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옮기다니! 마지막이겠지만 처음이었다. 아마 엊저녁엔 내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이제는 내내 뒤가 허전하고 쓸쓸할 것 같은 것만 보아도 열 번 잘못한 짓이었다.
어제. 구름이라도 한 덩이 내려앉을 수 있게 바람기라곤 없어, 하늘에서 놀던 봉오리진 눈송이가 반투명한 잡목 수림 속에 아무데나 가리지 않고 얹힐 때였다. 그저 조용한 경내에 한 가지 딱다구리 고목 찍는 소리를 어깨로 받으며, 나는 본사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내 처지를 크게 생각하여 밥은 큰절에서 거저 먹여주었던 거다.
진여암 정혜전 (眞如庵 定慧殿) 동마루가 내려다보이는 전나무 숲 모퉁이를 돌고 나니 대천교(大千橋)난간에 검은 오버 깃을 세우고 눈을 뒤집어쓴 채 진여암을 끼고 계곡을 내려다보는 웬 청년 한 사람이 있었다. 경내 암자에 들어 공부하던 중에 눈길을 산책 나온 대학생 같았다. 큰절로 가는 길이라 내가 그 다리를 거지반 건넜을 때,
“여보세요.”
불렀다. 돌아다보니, 청년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서,
“실례지만 이 근방 사십니까?”
내 나이밖에 들지 않은 얼굴이지만,
“예, 예.”
누구에게든 두 번씩 해지는 예 소리는 오랫동안 길들어 입에 발린 말이다.
“겨울 나그네올시다. 이 담무사(曇無寺) 구경하는데 오늘은 날도 이렇고 하룻밤 잠잘 곳 좀 없을까요. 마땅한 데?”
아래 버스 종점엔 여관이 열다섯이나 있는데,
“여관은 뭐 요샌 봄 가을보다 숙박료도 싸고 조용한걸요.”
별사람 다 있어 다시 쳐다보였다.
“그야 그런데, 민가에서 잤으면 해서요. 댁이 사시는 동네나.”
그건 또 무슨 초 친 맛인지,
“난 집에 안 자요. 경비소 숙직실이 집인걸요.”
나는 갈 길이 바빴다. 이미 큰절에서 마지[사시(巳時)]에 불상 앞에 올리느라고 태징 소리 난 지가 오래 됐으니 곧 밥북을 울릴 거였다.
“아 저 파출소에 계십니까?”
“예예, 심부름 좀 하고 있죠.”
하고 돌아서는데 청년은,
“저, 잠깐만.”
또 나를 붙잡았다.
“저녁에도 바쁘십니까?”
“별일만 없다면 뭐······”
“그럼 난 여관에 들 테니까 긴 밤을 함께 얘기나 하십시다. 혼잣몸이라 심심도 하고, 저 청림여관에 짐을 맡겼으니······”
“예예, 내 집 드나들듯 하는 덴데 뭘······”
그럼 그러자고 그와 나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다리를 건넜다.
저녁 식후 숙직실에 군불을 땐 다음 화롯불도 담아 들여 밀고 난로용 장작까지 패놓으니 우선 할 일이 없었다.
청림 여관엘 가봤다. 청년은 미리 소주와 오징어를 사다놓고 기다리는 참이었다. 그는 병을 따서 잔에 나누며 자기소개를 했다. 소설을 써보려는 이름 없는 문학청년으로, 여행을 즐기고, 가는 곳마다 그 동네의 소문 안 난 이야깃거리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어딜 가나 대게 민가에서 먹고 자는데, 내가 이 담무사 경내의 경비소에 있다기에 얘기를 시키려고 일부러 청했다는 거였다. 이곳은 산중이라도 관광지대니만큼 남모르게 재미있는 것을 경비소 안에서 더러 보았으리라 짐작한다는 거였다.
나는 손을 내저으면, 월급 오백 원짜리 경비소 사환질 하는 것도 실은 일년 남짓할 뿐 아니라, 그동안에는 여승당인 진여암 머슴살이하면서, 장작패고 채마전이나 거두었으니 아는 게 뭐 있겠느냐고 했다. 그런 것을 얻어먹는 술이라고 앉은 자리에서 그럭저럭 꾸며댈 만큼 약빠르지도 못한 주제다. 기껏 들은 풍설이라곤 천수경(千手輕) 몇 구절과 재(齋) 올리는 구경 한 것밖엔 없던 것이다.
“그래 구경이나 다 하셨소? 눈 쌓이는 다리에 섰는 게 돌부처 같더니.”
청년은 내가 먼저 말 내놓기를 잘 했다는 듯이 들고만 있던 잔을 한모금에 비우고 나서 이말 저 말 늘어놓았다.
경내는 한 바퀴 돌았는데 이 산속에 파출소, 우체국, 어느 도회지의 역전 못지않게 많은 여관, 더욱이 일용품 상점엔 없을 것도 있더라면서, 다채로운 기념품 가게 진열장이며, 바위마다 놀다 간 사람들이 이름 새겨 놓은 것도 어느 관광지보다 너절한 것과, 진여암, 수월암 (水月庵), 정명암 (淨銘庵), 등 여승당엔 간 곳마다 호박꽃 장미꽃 지고 피는 아가씨들이 몇십 명씩 들끓고, 영우암 (靈祐蓭), 삼현암(三玄庵), 선나암(禪那蓭)은 비구승보다 하숙하고 있는 학생 수가 더한 것도 인상적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상한 게 꼭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위에 이름 새겨두는 거야 예사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진여암 담밑으로 흐르는 개울 저켠 쪽에 말요, 나 아까 서 있던 다리서도 뵈지만, 큰 황소만한 바위가 있는데 바위 한 가운데에 요 양재기만큼 구멍이 패여 있더란 말요.”
그거다. 나는 어느새 빙그레 웃어 속을 내 뵌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것은 못 먹던 술이 저지를 실수였다. 안타깝게도,
열 살에 전쟁고아가 된 나는, 또한 그 사변 통에 홀로된 이모를 따라 입산하여, 진여암에서 이모 손이나 거들어 주며 얻어먹고 자랐다. 이모는 스님들에게 공양주 혹은 보살님으로 불렸고, 내가 부목(負木:머슴) 대우를 받기는 칠 년이나 부엌 구석에서 그을린 뒤였는데, 부엌일에도 손을 떼게 된 것은 국희(菊姬)라는 열일곱 살 난 처녀가 행자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 눈으로도 예쁘장한 얼굴에 영리해보이더니, 정말 이듬해 백중날엔 계(戒)를 받고 연묘 (蓮妙) 라는 법명을 가진 비구니가 되었다. 강원 (講院)에도 늘 지각없이 출석했고, 경내의 비구니 암자에서는 ‘연스님’을 부르며 찾아오는 도반(道伴)이 날로 늘었다. 가끔 이웃 암자로 도반을 찾아가는 외에는 방에서 통 나오지 않는데도 안색이 창백하거나 누른빛이 없어, 중으로서는 좀 남부끄럽다 하게 피어오르기만 했다. 나하고는 처음부터 잘못 사귄 院主원주, 성초(性柖) 스님에게도 혼자 귀여움을 받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마땅찮아 연묘 앞에서는 일부러 원주 스님을 ‘성초당’이라고 하면 그때마다 장실(丈室 : 범사가 거처하는 방)을 향해 합장하면서,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아 사바하.
나를 대신하여 진언(眞言) 송주(誦呪)를 하는 거였다. 누가 보면 성초 스님이 시봉 상좟감으로 주문이라도 해온 것처럼 충실했다.
진여암 적조문 마당가에는 목탁 깎기에 알맞을 살구나무가 한 그루가 있고, 그 밑으로는 추성산 허리가 터져 내려, 차츰 벌어진 계곡이 사철 맑은 물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계곡엔 수많은 바위들이 누워있어, 소용돌이치는 여울목마다 포말에 무지개가 서곤 했다. 모 없이 둥근 바위가 물 뒤집어쓰는 모양은 마치 바위들도 묵상에 잠긴 채 목욕을 하는 것 같았다.
살구나무 곁에 서면 계곡을 사이에 둔 맞은편에는 그중 큰 바위 하나가 언덕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한나절 해가 높아야 그 바위 그늘이 닿는 계곡 바닥 한 구석엔 못처럼 널찍하고 깊숙이 패인 곳이 있어 언제나 쏟아져 내린 맑은 웃물이 돌아 넘쳐 나갔다. 여름밤이면 여승들이 목욕하는 곳이다. 연묘는, 저녁 천수가 끝나면 장삼과 오조가사(五條袈娑)를 벗어 걸기 전에 그 바위 밑으로 와서 한참동안이나 수심을 조용히 들여다보고는 큰 여래상을 모신 정해전으로 다시 들어가는 거였다. 그때마다 귀를 기울이면 그 청아한 불게(佛偈) 송주 소리에 덩달아 나도 백팔번뇌가 적멸하는 것 같음을 느끼곤 하였다.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레 주레 준제 사바하 부림,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堤)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廣大願)
원아정혜속명원(願我定慧涑圓明)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원아승복변장업(願我勝福?壯嚴)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
그렇게 이 년째 되던 작년 여름이다. 나는 이미 진여암 머슴살이를 그만두고 이 추성면 지서의 담무사 경비소 사환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 머리가 굵어지니 성초 스님이 혹시나 하는 기우로 그나마 권고사직을 당한 셈이었다. 우리끼리 한 말이지만, 그녀는 절간에 썩이긴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속세에 두기로 한다면 천벌을 받을 것 같으면서도 여승으로 놓고 보라면 뭔지 모르게 원망스러웠다.
여름철이 되자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왔고, 방학을 이용하는 고시공부 대학생들로 암자마다 방이 찼다. 물론 그만큼 나의 경비소 일도 바빠졌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인가 담무사 우체국의 하나밖에 없는 배달부 황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 밤은 나 혼자 경비소 전화를 지키고 있었다. 원래 둘뿐인 순경인데 한 사람은 경내 순찰 중이었고 다른 순경은 서울에서 어떤 고관이 내려왔다면서 밤새 여관방의 문전 보초를 서다시피 돌보느라고 초저녁부터 나가 있었던 거였다.
하루도 몇 차례씩 보는 황씨가 전에 없이 싱글벙글 입을 못 다물고 가까이 다가앉더니, 진여암 규칙이 편지를 전할 때는 본인을 찾지 않고 받으러 나온 사람에게 한목에 으레 전하기 때문이라면서,
“진여암 연묘 스님이 대체 어떻게 생긴 새악시야, 헤헤,이쁜가?”
하는 말에 나는 까닭이 없이,
“그건 왜요? 뭣 땜에 그러냔 말요, 예?”
불퉁스럽게 반문을 하면서 신경을 세웠다. 황씨는 또 한 번 속 모르게 웃고 나서,
“그걸 함부로 주둥이 놀렸다간 헤.”
하고 고개를 저어가며 두툼한 입술에 침을 발랐다. 나는 어떤 좋지 않은 예감에 불쾌했다.
“그래 어쨌다는 거요, 연 스님이······
내가 그 암자서 사람꼴 되어 나왔는데, 뭐가 있다는 거요. 봤다는 거요?”
나는 갈증을 느끼면 좀 다가앉았다.
“그 처녀께서 요새 속세와 연분을 맺고 계서, 왜?” 황씨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자기가 이곳 배달부질을 삼 년째 해오는 동안 그녀에게 가는 편지가 그저께가 처음이었고, 오늘 두 번째 배달을 했다는 거였다. 이상한 것은 먼저도 그렇더니 오늘 그것도 발신인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지 않더라는 거였다. 그래서 아깟 것을 슬쩍 뜯어 봤더니, 글은 하얀 모조지 맨 아래 가장자리에 이렇게 두 줄만 적혀 있더라고.
연묘가 살아 있는 동안만 나도 열심히 살겠음.
이 종이의 여백엔 다른 또 하나의 피안을 그릴 것.
이튿날은 저녁때 큰절에 밥 먹으러 가다가 진여암에 아직 식모로 있는 이모를 찾아갔다. 무슨 얘기나 들어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이모는 아무런 눈치도 못 챈 모양이었다. 성초 스님은 이제 연묘를 자기 다음 대에 감원(監院) 스님이 될 것으로 믿어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으며, 더욱이 요즈음 연묘는 불경에 붙어 앉아 공부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나서 사나흘 전부터 이상한 사람이 하나 생겼다고 돌아앉으며 어깨를 기울여 턱으로 부엌문을 밀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바로 저 위에 있는 선나암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는데 저렇게 하루 한 차례씩 꼭 이맘때면 내려와서 쇠꼬챙이로 큰 바위를 파고 있다는 거였다. 살구나무 곁에서 건너다보니 정말이었다. 여드름이 가라앉은 얼굴에 삼복중에도 옷을 단정히 입어 퍽 점잖아 보이는 청년이 연필만한 대못을 대고 돌로 쳐 바위를 새기고 있었다.
그 이튿날부터 저녁을 먹으로 큰절에 올라가는 길이면, 대천교 난간에 서서 그를 잠깐이라도 보지 않고 갔다가는 등이 가려워서 못 배겼다. 오는 길에 다시 건너다보면 으레 청년은 없었다. 꼭 제시간을 지키는 건지, 아니면 큰 바위 밑은 밤마다 여승들의 목욕탕인 줄 알아 일찍 들어가는 까닭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자기 이름이라도 새겨 넣는 줄 알았는데 며칠을 두고 봐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좀 돈 사람인 것 같았다. 연묘와 선을 그어보려고 해도 너무 애매했다. 멀쩡한 청년이 바위에 구멍을 파다니.
황씨도 노총각이라 관심이 많은 지 가끔 나를 불러내서는, 그때 두 번째 편지를 전해준 뒤로 다시는 연묘를 찾는 편지가 없고, 발신지가 적히지 않은 그 비슷한 것도 구경을 못한다면서, 그녀가 통 답장을 않는 건 오히려 당연하다겠지만 그 청년마저 소식이 없으니 답답한 일이라고, 그를 따라 나도 몹시 안달하며 한 달 가까이나 더운 줄 모르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점심을 먹고 내려오노라니까, 경비소 변소에서 가방을 멘 채 오줌을 누며 창 너머를 내다보고 있던 황씨가 나를 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손짓을 했다. 헤헤헤 웃지 않는 것하고 어쩐지 이상했지만, 이젠 되나보다! 나는 변소에 뛰어들었다.
“이거야, 이 편지가······”
그는 들고 있던 편지 봉투를 젖혀보였다. 뒤엔 역시 아무것도 눈에 뜨이는 글자가 없다. 봉함 자리가 살짝 뜯어져 있고, 다른 손 새끼손가락엔 밥풀 몇 낱이 묻어 있었다. 성급하게도 편지를 빼앗아 보려고 했더니,
“간단한거니까 들어보라구. 난 한 번 더 읽어봐야겠어.”
하며 황씨는 내 귀에 대고 또박또박 한 자씩 혀끝으로 찍었다.
연묘. 집에서 입대 영장 받아놨으니 즉시 상경하라는 전보 와서 몸만 떠나.
연묘가 살아 있는 동안만 열심히 살 생각으로.
“제에기 멋있을 게 그만······ 배달해주고 싶은 맘도 별로 안 나는군.
부고 같은 기분야·····”
하며 황씨는 손때 안 묻게 조심해서 준비했던 밥풀로 봉한 다음, 가방에 넣고 힘없이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웬일인지 맥이 풀렸고 그 하루를 우울 하게 보냈다. 오늘 떠날까. 어쩌면 어제쯤 이미 갔을지도 모른다. 전보는 황씨가 전했을 텐데 왜 진작 몰랐담? 누가 누군지 모르겠지. 안들 소용도 없고.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보니 큰 바위를 파고 있어야 할 청년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였던 것이다. 나는 일부러 바위 밑에 가서 동그랗게 파진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가정용 팔모난 성냥통을 넣어보면 넓거나 좁지 않겠는데, 바닥은 어느 구석도 더 들어가고 덜 판 곳 없이 평평하게 고루 다듬어져 있었다. 연묘와 바위. 하지만 내 두되로서는 어떻게 연결시켜볼 재주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하루도 못 잊어 황씨를 찾아다녔지만 황씨는.
“오늘도······”
한마디하고 입맛을 다시면 그만이었다. 가끔 진여암으로 이모를 찾아가기도 했으나, 하라면 별로 반갑지도 않은 말만 두서없이 늘어놓았지 다른 것은 없었다. 그녀는 무슨 경전이건 줄줄이 꿰어 아사리[교수승(敎授僧)]가 필요 없다 하게 됐으니 멀지 않아 득도할 게 틀림없다는 거였다.
그렇게 조용히 한 달이 갔다. 그런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황씨와 나뿐인 모양이었고, 더구나 큰 바위 구멍에 대한 관심은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이 바뀐 뒤에야 청년이 간 후로 첫 편지가 왔으나, 황씨가 자기만 읽어보고는 미처 내 생각할 여유도 없이 진여암으로 뛰어갔기 때문에 직접 읽어보지 않은 게 서운했지만 듣고 나니 한결 개운했다. 발신인 주소 성명 없이는 편지는 부피만큼 사연도 길었는데, 대강 그 골자만 얘기하자면, 외아들이기 때문에 휴가가 없는 대신 육 개월 후면 의가사 제대를 할 수 있고, 안 되면 돈을 써서라도 제대한다는 것과, 자기와 연묘 사이를 부모에게 공개하여 모든 것이 절차가 필요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입영하여 내년 봄 졸업은 틀렸고 나중 추가 졸업식을 하게 되는데, 외삼촌이 경영하는 출판사에 갈 맘만 있으면 제대한 이튿날이라도 출근 할 수 있으니 여백을 내준 백지에 그리랬던 피안은 어느 정도 채색되었느냐는-- 제법 약혼자가 된 듯한 기분까지 냈더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이런 사람이 어째 편지질을 안 할까. 그 전부터 무슨 관계라도 있던 사인지·····”
“시골 고아원장이 입산시켜준 것을 내가 알고 있는걸요. 이 사람은 서울 부잣집 자제고.”
“원 연놈들.”
“대체 여섯 달이면 언제죠?”
“참 광복절 전날 갔으니까, 벌써 달 반이 접어졌고, 에 또, 구, 십, 십일, 십이일······
내년 정월 보름껜 온다 와.”
“어휴, 하여튼 볼 만할 거요. 이게 보통 녀석은 지나는 짓이거든.”
“헌데 말야.”
“뭐요?”
“예로부터 호사다마란 말이 있잖아 왜, 자꾸 그 말이 생각나고 걸려.”
“에이 황씨두, 하고 많은 말 중에 하필이면······”
“좌우간 내가 오래 살고 있다는 증거야. 보다보다 별 괴상한 연애 구경도 다 하니.”
“황씨도 이 계제에 국수 내볼 굴리나 하쇼.”
나는 문득 큰 바위에 구멍이 생각났다. 그러나 황씨에게도 입다물어버렸다. 누구에게 나누어주기는 아깝다.
나는 바위가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가까이 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구멍의 넓이는 파놓은 그대로 여전했지만 바닥은 한켠이 반 치 가량이나 더 깊이 들어가 있던 거다. 누가 그 청년의 뒤를 이어서 파는 걸까?. 연묘? 아니면? 아닐 사람은 없다. 없을 것이다.
나는 진여암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풋고추 꼭지를 따던 이모가 웬일이냐 묻는 말엔 지나다 들렀다고 어물어물했다. 무어라고 물어볼 말주변이 없어 얼마동안 풋고추 꼭지를 따고 나서 궁리 끝에, 연묘 스님도 여전하냐고 겨우 안부를 물었다. 묻는 너도 어리석다는 듯이, 요새는 새벽두시에 만물은 잠 깨라는 뜻으로 목탁을 치고 암자를 돌며 염불하는 도량석을 맡아하며, 성초 스님은 연묘가 건당(健堂)한 후에 내릴 성월(性月)이라는 법호까지 지어놓고 있다는 거였다. 무엇으로 소리를 안 나게 구멍을 파는 건지, 도량석 전에 목욕한답시고 잠깐 씩 그러는 모양이었다.
나는 꼭 한 번 보려고 별렀지만 어느새 단풍이 들기 시작했으므로 관광객들이 밀려들어 몸이 바빠졌고, 새벽 두시면 온종일 시달려 피곤한데, 그 시간에 잠 못 자면 뜬눈으로 동창을 열어야하는 형편이라 끝내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잡목이 낙엽지고 관광객들의 발길이 돌아설 무렵이면, 산골의 밤은 눈을 재촉하느라고 길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연묘가 염려되었다. 언젠가는 이모에게 그녀가 요새도 목욕하느냐고 물었더니, 왜 수차력(水借力)한다더냐면서, 얼마 전부터 초저녁으로 꼭 잠간씩 바람 쐬러 나간다고 했다.
기다린 일월이 되었다. 며칟날 오겠다는 편지가 있을 것 같아 우편물을 싣고 오는 열한시 버스 기다리기에 남모르는 몸살을 앓았다.
십오일, 이십일, 이십오일도 넘어갔다. 황씨 입에서는 ‘고 개새끼’소리가 나왔으나 큰 바위 구멍도 이제는 청년이 해놨던 것처럼 차츰 고르게 다듬어져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내겐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만약 끝내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녀가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
일월 이십구일, 그러니까 열흘 전이다. 순경 한 사람이 전날 막차로 읍내 자기 집에 몇 푼 안 남은 봉급도 갖다 줄 겸 본서에 들러 사무용지를 타가지고 내일 첫차로 들어오겠다던 말을 기억하고, 열한시 버스가 오자 종점으로 뛰어 갔는데, 문이 열린 순간 나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가 주저앉을 뻔했다. 그 청년, 바위에 구멍을 파던 그가 맨 처음으로 뛰어내렸기 때문이었다. 순경은 그 차로 오지 않았지만 ‘왔다 왔어’ 몇 번이나 입 속으로 환성을 지르며 우선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황씨는 없었다. 방금 전보를 들고 두어 마장이나 떨어진 추성리로 나갔다는 거였다.
진여암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뛰어 올라갔다. 내가 부엌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한 달음에 먼저 온 청년은 벌써 일을 벌여놓고 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소리를 했는지, 성초 스님은 겉 가사를 입은 채 꿇어앉아 합장한 손을 떨며,
불정심 관세음보살 모다라니
나모라 다니다라 야야 나막아리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사다바야 마하가로니가야 다니타 아바다 아바다······
외다가 숨이 가빠 더 잇지 못하고 청년을 똑바로 쏘아 보았다. 청년은 뜰 위에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고개를 숙여 서 있었다. 성초 스님이 입을 열었다.
“우리 연묘가 환속하기로 선생과 약속 하다니, 원 참 어따가 그런 해괴한 언사를 함부로 쓰는 겁니까? 여긴 신성한 수도장이요. 내 제자는 내가 아오. 견성 하려는 연묘가······ 해탈하려는 연묘를······ 썩 물러가시오. 그런 속된 말을 무서운 줄 모르고 예사 하는 댁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소.”
“대사님”
청년은 재빨리 입을 열었으나 잠깐 망설이는 눈치더니,
“대사님 용서하십시오. 전 잘 모르긴 합니다만, 피안은 사람마다 제각기 제 나름대로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명피안(是名彼岸)이라잖습니까. 만들어서 피안이고 열반인 줄 압니다. 정 못 믿으시겠으면 대질을 시켜주세요. 거짓말은 안 할 겝니다. 꽃은 지는 게 생명입니다. 수도하긴 이미 글렀습니다. 환속시켜주십시오.”
청년은 허리를 굽혔다. 이 당돌한 말에 성초 스님은 어이가 없는지 얼굴에 핏기가 가시면서 어쩔 줄 모르고 망연히 구름 낀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벌떡 일어서서 발로 마룻장을 구르며,
“상좌야, 어디 있느냐, 연묘를 불러내거라.”
하고 소리쳤다.
침묵이 끼었다. 계곡에서 몸부림치는 물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굵다. 이윽고 연묘가 먹물 옷을 입은 채 뒷문으로 돌아 나와 뜰 한 구석에 낯을 못 들고 섰다.
“들었느냐. 내 한마디로 물으니 한마디로 대답 하거라. 네가 진실로 오은(五?)에 매여 연을 끊지 못하고 색즉시공이 뭔지 몰랐더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법당 뒤에서는 녹슨 풍경이 무심히 운다. 성초 스님은 목이 타는지 침을 삼키고,
“얘야, 이 미친 사람이 도대체 네 이름을 어찌 알지?”
음성은 좀 부드러웠다. 그래도 연묘는 까딱 않는다. 다시 청년이 배짱 좋게 말했다.
“대사님, 보십쇼. 연묘가 마루로 나오지 않고 왜 뜰로 나와 흙을 밟고 서 있는 줄 아십니까?”
“시끄러워요. 연묘 대답이 듣고싶지.”
하는 성초 수님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날카로운 눈초리로 연묘를 쏘아보며
“요 괘씸한 것, 내가 네 눈에 보이지 않느냐?”
분을 참지 못해 손으로 옆의 기둥을 후려쳤다. 염묘의 눈은 우러나온 눈물이 긴 속눈썹에 걸려 떨어지지 않고 망설이기만 하여 답답하다.
나와 이모는 부엌에서 샛문을 조금 터놓고 숨을 죽여 지켜보았던 거다. 얼마 동안인가 성초 스님은 마루에 선 채 연묘만 노려보고 있었다. 청년은 처음부터 취한 자세를 변치 않고 서 있지만 눈은 곁으로 빼돌려 연묘에게 두고 있었다. 연묘는 아무나 어떻게 해 달라는 듯이 몸뚱이를 내버려두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중들은 얼씬 안 했다. 큰 방에 모여 앉아 창호지에 귀를 대고 있는지도 몰랐다. 침묵을 견디지 못해, 아니 연묘를 대변하듯 청년은
“대사님께 대답 않는 건, 저에게 할말이 있다는 증겁니다. 대(竹 )는 곧고 푸른 게 옳지만, 등나무는 굽고 낙엽지는 대로 옳습니다..”
한다. 그러자 연묘는 재빨리 몸을 틀어 뜰에서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마당과 오솔길로 이어진 돌계단을 건너 뛰어내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연묘, 연묘······”
청년의 부르짖음과 구둣발 소리에 나는 부엌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김장 갈았던 밭을 지나 가시덤불을 헤치고 있었다. 청년이 뒤쫓고 있었다. ‘죽는다, 죽엇’ 나는 가슴을 죄었다. 그녀는 두어 길 깊이의 계곡 바닥에 돌너설이 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절벽을 향해 뛰었던 거다. 앗! 절벽에 몸을 던진 순간, 그녀는 칡덩굴에 걸려 쓰러졌다. 한발 뒤쫓아간 청년이 안아 일으키려고 드니, 그녀는 제 몸을 동댕이치듯 뿌리치고 다시 암자로 뛰어왔다.
계단을 기어오르자 마당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지친 몸을 가누어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성초 스님은 두 발을 굴렀고, 연묘 뒤에 선 청년은 숨을 씨근 거리며 성초스님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성초 스님은 진정되었는지 침착하고 냉정한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너도 불경은 많이 읽었지······ 나는 네게 말할 자격도 잃었으니······ 마지막 여래 말씀이나 듣고 가거라······ 못쓰는 화살처럼 쓰러져 누워, 옛일을 생각한 들 어이 다 하랴, 잠 못 드는 사람 밤 길고, 피곤한 길손 갈 길이 먼 법, 다갈라[범어(梵語)로 향(香 )이란 뜻]의 향기가 아무리 짙어도 구경삼매에 비할 수 있으랴. 숟갈은 음식 맛을 모르듯, 촛불 든 장님처럼 제 눈을 밝히진 못했구나 . 녹이 쇠에서 나서 바로 그 쇠를 먹으니······ 윤회로다. 그만두자 그만두어.”
그녀는 법구경(法句經)에서 몇 마디 인용하다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장실로 들어가고, 탁, 문은 안으로 닫혔다.
어느새 활짝 핀 눈송이가 가만가만 내려앉고 있었다. 연묘는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 장실을 향해 합장하여 허리를 굽혔지만 누구하나 내다보지 않았다. 이모는 아궁이 앞에 주저앉아 코를 짜서 부지깽이에 문지르기만 했다. 연묘와 그중 다정히 지냈다던 은월(恩月)이란 여승도 성초 스님께 들킬까 싶어 얼굴 한번 내밀지 못했다. 나는 살구나무 곁에 서서 그네들을 눈으로 바래주었다. 부디 행복하라고.
그녀는 청년의 발자국을 밟으며 뒤따르고 있었다.
회색빛 잡목 가지가 우거진 틈틈으로 그네들이 밟고 가는 길을 덮는 눈송이에 먹물 옷의 뒷모습이 점점 흐려져 갔다.
이틑날 나는 다시 한 번 큰 바위가 보고 싶어 갔던 길로 진여암 부엌에 들러보았다. 이모는 내 귀에 대고, 엊저녁에 잠깐 들으니까 지대방(허드레로 쓰는 방)에서 은월, 도묘, 원월, 해명 등 스물 안팎의 젊은 스님끼리 모여 무슨 말인가 수군거리던 끝에, 큰 바위를 다갈라 (不忘碑)라 이름짓자더라는 거였다.
군불 아궁이 앞에 앉아 그 말을 듣다가, 중들이 어떻게 큰 바위 구멍에 대한 비밀을 아나 했지만, 곧 나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궁이 앞에 수북이 쌓인 방 쓰레기를 뒤적거려봤던 것이다.
“연스님 쓰던 방을 털었는데 공부하던 연습 종이만 한 보따리였단다. 엊저녁부터 열두 아궁이에 장작 쏘시게 하고도 남은 게 그거야.”
나는 그 속에서 발신인이 없는 편지 봉투 하나를 발견했던 것. 그것은 그때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쩌면 맨 처음의 편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여승들이 다갈라 불망비라고 부를 만한 뜻을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연묘
나는 바위를 보았습니다.
태고의 신비를 품은 바위 입니다. 청태에 싸여 표정 없는 바위, 죽은 듯 그러나 어디론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을 쉬는 듯한 바위, 물어도 대답 없는 바위, 하지만 언젠가는 무어라고도 할 듯한 바위, 하면 그것은 내가 이제껏 찾아온 그 무엇인가를 시원스럽게 대답해줄 듯한 바위를.
연묘
나는 오늘부터 바위에 입을 만들어주겠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뚫겠습니다.
바위의 심장이 보일 때 까지.
[『현대문학』, 196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