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수 MLB일기-8 “200홈런치고 베이스 돌면서도 실감나지 않았어요” 2019.06.05. 오후 05:07
해외야구 추신수 2000년 시애틀 입단하여 긴 마이너리그 시절을 경험했다. 2005년 메이저리그 첫 승격 이후 클리블랜드, 신시내티를 거쳐 현재 텍사스 레인저스의 중심 타자로 활약중이다.
<지난 15년 간 통산 200홈런 1560안타 734타점 등을 기록한 추신수. 타고난 성실함과 승부욕이 지금의 추신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신수는 200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돌면서 시애틀 매리너스 입단 후 투수에서 타자로 포지션 변경이 이뤄졌을 때를 떠올렸다고 한다.(사진=텍사스 레인저스 SNS)>
의미 있는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더라면 기쁨이 배가 됐을 텐데 많이 아쉽습니다. 200홈런 달성을 앞두고 많은 분들이 관심을 나타내셨어요. 가급적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저도 궁금했습니다. 언제쯤 그 숫자로 채워질 수 있을지가. 홈런이 잘 나올 때는 10경기 만에 서너 개가 터지기도 하고 잘 안 될 때는 한두 달 동안 단 1개도 나오지 않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첫 타석에 들어서기 전부터 좋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대기 타석에서 준비를 하는데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1회 상대 선발투수인 딜런 버디(볼티모어 오리올스)의 1구 포심 패스트볼이 볼이 되는 순간 자연스레 2구째 공을 노렸습니다. 분명 같은 구종의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죠. 그렇게 노려 친 공이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이 되었습니다.
베이스를 도는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200홈런을 쳤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어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부산고 시절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했던 장면, 마이너리그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던 부분들, 처음 빅리그에 콜업된 상황들을 떠올리는 가운데 홈 베이스를 밟았습니다. 감독님, 코치님들, 동료 선수들의 축하 세리머니 속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아, 내가 진짜 200홈런을 쳤구나’하는 생각과 함께요.
잘 알려졌다시피 저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투수로 계약했습니다. 그러다 야수가 더 적합할 것 같다는 구단의 권유에 방망이를 잡기 시작했지만 전혀 두렵지는 않았어요. 고교 시절 타선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잘 할 자신은 있었거든요. 한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그동안 해왔던 투수 관련 개인 훈련이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는 점이었죠. 만약 그때 계속 투수로 뛰었다면 지금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래픽=스포츠투아이 제공>
마이너리그 시절 힘든 시간을 보내며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투수에서 타자로 변경한 걸 두고 후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뛰어난 실력이 아닌 좌투수들은 빅리그로 올라서는 기회가 많았어요. 만약 제가 좌투수로 활약했더라면 빅리그 데뷔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겁니다. 대신 팔꿈치나 어깨 부상으로 선수 생활이 단축됐었겠죠.
마이너리그에서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는 나에게도’라는 간절함 하나로 버티고 견디었던 부분이 여러 기록들을, 또 개인 통산 200홈런이란 선물을 안겨주네요. 세상에서 야구를 제일 잘 하는 선수들이 모인 무대에서 딱 한 경기라도 뛰어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마이너리그에서 버틴 건데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도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오늘 홈런이 나왔을 때 그 공을 주은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TV에서도 공을 잡으러 가는 그 아이의 모습이 비춰졌다고 하더라고요. 구단 관계자가 3회 말 공격이 마무리될 즈음에 아이를 더그아웃 뒤편 통로로 데려왔습니다. 저와 악수를 나눈 아이는 흔쾌히 200홈런 공을 내밀었고, 200홈런 달성을 축하한다는 인사도 전했습니다. 저는 그 홈런 공을 받은 후 제 방망이랑 다른 공에 사인해서 전달했고요. 아이의 해맑은 웃음과 인사가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의미가 큰 홈런 공을 전해준 것도 고마웠고요.
경기 후 클럽하우스에서 휴대폰을 보니 수많은 축하 문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레인저스 JD 단장을 비롯해 메이저리그 관계자들, 은퇴한 선수들, 다른 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 그리고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 까지 모두 200홈런 달성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일일이 답장하지 못했는데 일기를 통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올시즌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가 타구 속도 증가입니다. 반면에 볼넷은 지난해보다 줄어든 추세이고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타석에서 투수의 공을 보기 전 기다릴지, 아니면 스윙할지를 놓고 아주 잠깐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긴가 민가 하는 생각을 갖고 스윙하다 보면 타구가 힘을 잃기 마련이죠. 올시즌부터는 고민을 줄이고 적극적으로 스윙하다 보니 스윙할 때 힘을 실어서 타격하게 됩니다. 그런 타구는 속도감 있게 뻗어나가게 되고요. 볼넷이 줄어들면서 출루율이 낮아지는데 반해 장타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야구는 ‘기브 앤 테이크’인 것 같아요.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되는 셈이니까요.
올시즌 (류)현진이가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야구 시즌은 길고, 경기 수도 많은 터라 어느 순간부터는 좋은 일에 크게 좋아하기도, 나쁜 일이 발생했다고 크게 절망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럼에도 한국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인정받고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죠.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든 한국 선수들이 시즌 마칠 때 크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 마지막 웃음을 위해 더 힘을 내려고 합니다. <5일(한국시간) 볼티모어전에서 200홈런 달성시 착용했던 장갑, 신발, 방망이, 그리고 홈런 공. 추신수의 기록을 증명하는 기념 물건들이다.(사진=추신수 제공)>
* 이 일기는 추신수 선수의 구술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기사제공 추신수 MLB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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