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문 등산가이기는 커녕 일년에도 산에 가는 횟수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니
산을 이야기하려니 부끄러우나, 그래도 용기를 내어 몇 마디 이야기해본다면 산은
봄이 가장 좋다. 온통 잎이 없는 마른 나무들과 간혹 보이는 소나무나 낙엽송의 을시년 스러운
침엽수 외엔 쓸쓸하기 짝이 없는 것이 겨울 산이다. 그러다 이른 봄이면 그 나무들에서
움이 트기 시작한다. 얼어죽지 않았다는 신호이리라. 그렇다. 겨울 산에서는 어느 나무가 죽은 나무인지
산 나무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봄이 되어 새싹을 틔우는 것을 보면 죽살이를 알 수 있다.
나무도 늙어간다. 영고성쇠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해마다 잎과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인간은
나무는 언제나 일년일도 새봄을 구가하고 새 청춘을 노래한다고 알고 부러워한다.
낙양성동도리화는
비래비거낙수가오
그 돋는 움을 보고, 일찍 핀 꽃을 보면 사람의 마음도 흥겹다.
그러나 가을 산은 쓸쓸하다.
아직 낙엽이 지지 않았으나, 어제 오늘 내리는 비는 나무에게 겨울을 준비하라고 재촉하고 있다.
잎새에게는 곧 단풍 지고 낙엽 져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텅빈 가을 산은 마냥 빈 집과 같다.
우중산과락
등하초충명
비오는 가운데 산과일이 떨어지고 / 등불 아래에서 풀 벌레가 우네.
왕유는 이 두 구절만 가지고도 시인이 누리는 영광을 길이길이 누리고 있다고나 할까.
한시를 이야기할 계재가 있으면 문득 왕유의 이 구절을 들며 물어본다.
왕유처럼 고요함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어떤 상황이나 표현을 해보라고.
고요하려고 고요하려고 하면 소리가 없어야 하는 데, 이게 시가 되자면 거꾸로 소리를 이용해야하니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리라. 고요하려고 고요하려고 하면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지
않고 바이올린의 현을 켜지 않으면 그게 고요이겠으나 음으로 표현해야 하는 데에 예술의 역설이 있다.
우중산과락은 과연 건반을 멈추고 바이올린의 키를 멈추었을 때 보다 더욱 고요하다.
산불재고유선즉명
수불재심유룡즉령
산은 꼭 높아야 좋은 것이 아니다. 신선이 있으면 그게 명산이다. / 물은 깊어야 맛이 아니다. 용이 살면 그게 신령한 물이다.
대구 앞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나 좋은 산이다. 아마도 어디 쯤 신선이 있을 테니, 그렇다면 명산이 아닌가. 사람들이 자꾸 길을 닦고 조금만 무너져도 다리를 놓고 하는 통에 자연미가 점점 훼손되어 가는 것이 다소 아쉬울 뿐이다. 전에는 길을 두고 일부러 내가 길을 만들어 꼭대기로 올라가보기도 하고, 가다가 진달래 군락을 발견하기도 하여, 그 꽃 옆에 한참을 죽치고 있어보기도 했다.
"그대 곁에 있어도 나는 외롭다."라고 한 누군가의 싯구도 있었던가?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의 산유화의 구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독한 사람이었는 지 짐작이 간다. 젊어 자살한 이 시인은 뒤에 사진 한 장 남겨놓지 않았다. 그의 시집을 보면 앞에 누군가 그렸던 그의 초상화를 사진 대신 내놓고 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꽃은 꽃이며 그 아름다움 속에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겨울 밤에 대신 변소에 가 줄 수 없고 대신 아파 줄 수 없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언젠가 성철 스님의 어록을 읽느라니 그런 구절이 보였다.
사람이 깊은 겨울 밤의 암자에서 절대 고독과 마주해보지 않으면 도를 말할 수 없다라고. 인간 심연 마지막 자리는 고독이다. 이 고독이 싫어서 선거에도 나가고 전쟁도 하고 돈도 벌고 범죄도 저지른다. 이 고독을 받아들이고 이 고독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다면 비로소 세사의 온갖 유혹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다는 것.
아마도 김소월이 불교를 만났더라면, 혹은 성철스님 같은 고승을 만났다면 그는 그렇게 일찍 생을 마감하지 않았으리라.
가을은 노인과 같고 철학자와 같다. 고독한 구도자를 닮았다. 구도자는 긴 그림자를 끌고 묵묵히 걸어간다. 가다보면 '딱 한 잔만'이라는 간판의 술집이 보인다. 그 술집의 유혹을 이겨야 한다. 코로나로 손님이 확 줄어버린 바의 계단에 아가씨가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눈물 겹다. 저 인간의 인생의 업고도 만만찮겠거니 한다. 그래서 그 년의 애원하는 눈빛에 그만 현장법사는 구도의 일념을 잠시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