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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5) 이승훈의 「벽이문(闢異文)」과 「유혹문(牖惑文)」
한국의 첫 영세자 이승훈, 천당지옥설·위천주론 내세워 배교 선언
- 정약종의 「주교요지」 하권 첫면에 실린 천지창조 관련 항목에 나오는 ‘누지불이’ 대목.
「벽이문」과 천당지옥설
이승훈은 교회사에서 늘 뜨거운 감자였다. 그는 평생 배교 행동을 반복했고, 이를 확인하는 「벽이문(闢異文)」과 「벽이시(闢異詩)」, 그리고 「유혹문((牖惑文)」을 남겼다. 이 글의 진의를 두고도 당시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글에서는 이승훈의 「벽이문」과 「유혹문」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승훈은 1785년 3월, 을사추조 적발 직후 배교를 선언하면서 전향서인 「벽이문」과 「벽이시」를 지었다고 1791년 11월 8일 의금부 공초에서 밝힌 바 있다. 이승훈의 공초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해당 일자 기사에 나온다.
공초에는 당시 진산 사건 직후 홍낙안이 북경에서 서학책을 사온 일과 교리서를 간행한 일, 그리고 반회 모임 등 세 가지 죄목을 걸어 이승훈을 저격하자, 이승훈이 조목별로 해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 가지 죄목에 대해 하나하나 해명한 뒤, 이승훈은 자신의 배교가 확정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을사추조 적발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에게 올렸다는 「벽이문(闢異文)」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여 소개했다.
이승훈은 「벽이문」의 전문을 평택 임소에 두고 와서 전체 글을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글 속의 세 문장만을 발췌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학술은 삿되고 바름을 떠나 이로움과 해로움이 있은 뒤라야 사람들이 반드시 마음을 기울인다. 앞서 서학에서 천당과 지옥의 주장을 없게 했더라면 사람들이 이것 보기를 어찌 패관잡설보다 아래로 보지 않았겠는가?” “서양에서 온 학문은 반드시 천당과 지옥을 위주로 삼아 천하의 억만 생령(生靈)을 속인다.” “서학에는 가짜 천주[僞天主]가 횡행한다는 주장이 있다. 요망하고 허탄하며 망녕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다. 이미 하늘이라고 말해놓고 가짜가 있다 함은 어찌된 것인가? 내가 반드시 그 주장을 가지고 그 주장을 깨뜨려 보겠다.”
그 내용은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가짜 천주가 횡행한다는 위천주론의 주장에 관한 비판으로 요약된다. 처음 두 문장에서는 사학(邪學)에 사람들의 마음이 쏠린 이유를 천당과 지옥에 대한 주장으로 그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승훈은 글에서 천주교가 천당지옥설로 혹세무민한다며 그 주장의 허망함을 설파하려 했던 듯하다. 천주교의 이단성이 바로 천당지옥설에 있고,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천당지옥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사실 서학의 천당지옥설은 전래 이래 중국에서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로 보아 배척하게 만든 중요한 근거였다. 「칠극」의 제7장에서 천당지옥설에 대한 논의를 자세히 변증하여 불교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다.
- 상품 천신이었다가 마귀의 두목으로 지옥을 다스리는 악마 루시퍼.
위천주의 실체
세 번째 문장에 나오는 위천주(僞天主), 즉 가짜 천주가 횡행한다는 주장도 논란거리다. 위천주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나? 이승훈의 위 언술만 보면 진짜 천주와 가짜 천주가 있고, 세상에 가짜가 횡행하니 현혹되면 안 된다는 서학의 교리 주장이 이치상 모순된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벽이문」에서 이승훈은 이 가짜 천주에 대한 서학의 허황된 주장을 서학의 논리로 격파한 내용을 담았다고 말했다.
위천주란 용어는 안정복의 「천학문답」 30번째 문답에 그대로 나온다. 근래에 어떤 상사생(上舍生)이 공자에게 올리는 석전(釋奠)에 참석하려 하자, 천주학을 하는 그의 벗이 이를 말리면서, 형상을 꾸며놓고 제사를 올리면 마귀가 와서 먹지 공자의 귀신이 와서 흠향하지 않는다며,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 말을 인용했다. 안정복의 글 속에 나오는 천주학을 하는 벗은 홍낙안이 다른 글에서 쓴 것처럼 이승훈을 특정한 것이 분명하다.
안정복은 서학에서 천주상을 걸어놓고 예배 드리는 것은 형상을 본뜬 것으로 일종의 마귀라 하면서, “마귀의 변환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또한 선을 꾸며 세상을 미혹시켜 낮은 백성을 어리석게 만듦이 있다. 서사(西士)가 여기에 미혹되어 높이 떠받드니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거짓 천주가 있다고 한다. 이 또한 마귀의 장난이다. 가짜로 거짓 천주라 일컫는다면, 가짜 형상에 기대어 부칠 수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위천주에 대한 언급이 워낙 짧아 위천주의 실체는 여전히 모호하다. 위천주는 적(敵) 그리스도(Antichrist)인가?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나 악마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인가? 이승훈이 1785년 당시의 수준에서 위천주에 대한 논의를 펼쳤다면 그것은 당시 기본 서학서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 중 [4.7]에 나오는 다음 단락이 주목된다. “예전 천주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에 여러 신의 무리를 만드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큰 신이 있어 이름을 노제불아(輅齊拂兒), 즉 루시퍼(Lucifer)라 하였다. 자기가 이처럼 영명한 것을 보고는 문득 오만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천주와 더불어 동등하다고 말할 만하다.’ 천주께서 노하시어 그를 따르는 수만의 신과 나란히 변화시켜 마귀가 되게 하고, 내려보내 지옥에 두었다. 이로부터 천지의 사이에 처음으로 마귀와 지옥이 있게 되었다.”
이 루시퍼의 이야기가 정약종의 「주교요지」 하편 1장에는 ‘누지불이’로, 명도회장을 지낸 김기호 요한이 1879년에 쓴 「구령요의(救靈要義)」에는 ‘누지뿌리’란 이름으로 똑같이 나온다. 루시퍼는 9품 천신 중 상품 천신이었다가 스스로 천주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교만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져 마귀 집단의 리더가 되어, 독살 많은 배암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승훈이 위천주의 개념을 천당지옥설과 묶어서 말했으니, 위천주란 바로 이 루시퍼처럼 천주의 권능을 참칭한 마귀를 가리킨 것으로 본다.또 마태오복음 24장 5절과 루카복음 21장 8절 등에 말세의 징조로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라고 한 대목이 있는데, 이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 중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라있는 자를 가리킨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2장 4절에도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가짜 악의 세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또한 위천주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한 깊은 논의는 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여서 필자가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한편 척사파의 선두에 섰던 홍낙안은 「노암집(魯巖集)」 제4책에 실린, 1791년 11월 11일에 쓴 「이승훈의 무고로 인해 변명하여 진술한 상소(因李承薰誣供陳卞疏)」에서 이승훈의 「벽이문」이 당시 아비와 아우가 부르는 대로 받아적은 글이라 진정성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더 나아가 “글 가운데서 천당과 지옥을 배척한 것은 과연 불교의 천당과 지옥이 아니었던가? 이른바 위천주란 것은 혹 저들의 학문 중에서 배척하는 마귀가 아니었던가? 이것을 고집하여 주장한다면 그가 말하는 진짜 천주와 진짜 천당지옥은 진실로 그대로 있는 셈이다. 어찌 더욱 흉악하고 교활하지 않은가?”라고까지 말했다. 어쨌거나 홍낙안 또한 위천주를 마귀로 본 것은 같다.
또 하나의 배교 선언 「유혹문」
1785년에 썼다고 한 「벽이문」 이후, 1795년에도 이승훈은 서학이 이단임을 밝히는 또 한편의 배교문인 「유혹문((牖惑文)」을 지었다. 유혹이란 미혹됨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유혹문」에 관한 내용은 신유박해 당시 「추안급국안」 1801년 2월 10일 자 기록에 한번 나온다. “을묘년(1795)에 예산에서 귀양살이할 때 사학 중 지극히 요사스럽고 참혹한 말을 세 단락으로 나눠서 쪼개고 격파하여 「유혹문」을 지었습니다. 그 글 가운데 하늘이 사람이 되어 내려왔다는 말은 지극히 요망하고 너무도 허탄하니, 어찌 빠져 미혹될 이치이겠습니까? 조금 문자를 아는 자는 역상(曆象)의 방법이 교묘함을 가지고 미혹되었고, 어리석은 부류는 천당지옥설로 미혹되었으므로, 이를 쪼개어 부수려는 뜻으로 수천백 언의 글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 진술에 따르면 「유혹문」은 천주교 교리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허구성을 밝힌 글이었다. 그중 하나가 예수 강생(降生)의 신비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는 대단히 요망한 논리인데도 식자층은 그네들의 역상(曆象) 즉 역법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 때문에 빠져들었고, 일반 백성들은 천당지옥설에 이끌려 현혹되었으므로, 자신이 수천 마디의 글로 이를 논파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승훈의 「유혹문」이 앞선 「벽이문」의 골격을 바탕으로 더 자세히 부연하여 서학을 배격한 장문의 논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승훈은 최초의 영세자였지만, 1785년 을사추조 적발 직후 배교를 선언하며 「벽이문」과 「벽이시」를 지었고, 두 해 뒤인 1787년의 정미반회 사건과 1791년 평택 현감 당시 공자 사당에 배례를 거부한 일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러다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 직후 예산에 귀양 가서는 또다시 전향서인 「유혹문」을 써서 배교의 최전선에 섰다. 그가 쓴 「벽이시」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따로 쓰겠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6) 무지개 다리는 끊기고
이승훈이 아버지와 친척들 앞에서 읊은 ‘벽이시’에 담긴 뜻은
- 이기경의 「벽위편」에 수록된 이승훈의 벽이시 관련 기사.
저문 골짝의 무지개 다리
1785년 3월, 을사추조 적발 직후 이동욱은 집안 친척들을 다 모아놓고 아들 이승훈이 앉은 자리에서 한 해 전 연행에서 구해온 서학 서적을 마당에 쌓은 뒤 불을 질렀다. 이어 서사(西士)에게서 선물로 받아온 각종 의기(儀器)들도 모두 박살 내버렸다. 한때는 자랑과 긍지의 표징이었던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친척들 앞에서 앞서 살핀 「벽이문」을 지어 낭독하게 하고 신앙을 버릴 것을 맹세하게 했다. 서학책이 불타 재가 되자 이승훈은 다시 ‘벽이시’ 즉 이단을 배척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시는 이렇다.
하늘과 땅 경계 져서 서쪽 동쪽 구분하니
天經地紀限西東
무덤 골짝 무지개 다리 안개 속에 어둑하다.
墓壑虹橋靄中
한 심지 심향(心香)을 책과 함께 불태우고
一炷心香書共火
멀리 조묘(潮廟) 바라보며 문공께 제사하리.
遙瞻潮廟祭文公
하늘과 땅을 씨줄과 날줄로 걸어 구획을 짓자 동과 서의 분간이 생겼다.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깊은 골짜기가 놓여있다. 그 아래로는 ‘묘학(墓壑)’ 즉 무덤들의 깊은 계곡이 있다. 그 죽음의 골짜기 위로 동과 서를 연결하는 홍교(虹橋), 곧 무지개 다리가 걸렸다. 하지만 자옥한 안개와 구름 속에 잠겨있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심지의 향을 사르며 서학책을 불에 함께 태웠다. 이제 나는 신앙을 버려 바른 도리로 돌아오겠다. 이제껏 동양과 서양이 서로 건널 수 없는 골짜기인 줄을 잘 몰랐다. 그 사이로 드높게 걸렸던 무지개 다리는 끊어진 채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구름 안개 속에 잠겼다. 그 다리를 더는 건너려 하지 않겠다.
4구의 조묘(潮廟)는 조주(潮州) 땅에 있는 당나라 한유(韓愈)의 사당이다. 한유가 누구인가? 일찍이 「불골표(佛骨表)」를 지어 이단인 불교의 허위를 낱낱이 밝히고 정학인 유학의 기치를 높이 세웠던 인물이다. 이제 나는 조묘를 멀리 우러르며 불교의 폐해를 막자고 「불골표」를 지었던 한유의 마음으로 이단인 서학을 배척하는 깃발을 높이 들겠다. 그 정신을 기려 문공(文公) 즉 한유를 위한 제사를 올리겠다. 이것이 이승훈의 「벽이시」에 담긴 뜻이다.
서토(西土)를 그리는 마음
이기경은 「벽위편」에 이 시를 수록했다. 그런데 두 글자가 바뀌었다. 먼저 1구의 ‘천경(天經)’을 ‘천이(天彛)’로 고쳤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1구의 ‘천경지기(天經地紀)’는 천지의 떳떳한 도리를 나타내는 투식적 표현이다. 「벽위편」의 ‘천이지기(天彛地紀)’의 ‘이기(彛紀)’도 ‘윤기(倫紀)’와 같아서 두 가지 표현의 의미 차이는 없다. 또 하나, ‘묘학(墓壑)’ 즉 무덤 골짜기가 「벽위편」에서 ‘모학(暮壑)’ 곧 저문 골짜기로 글자가 교체되었다. 묘학을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로 볼 수 있으나 일반적 표현은 아니다. 대신 역대 한시에서 모학이란 표현은 수도 없이 많이 나오니, 이기경이 고친 것이 맞다고 본다. 고친 글자에 충실하여 다시 옮기면 이렇다.
하늘과 땅의 윤리 서쪽 동쪽 구분하니
天彛地紀限西東
저문 골짝 무지개 다리 안개 속에 어둑하다.
暮壑虹橋靄中
한 심지 심향(心香)을 책과 함께 불태우고
一炷心香書共火
멀리 조묘(潮廟) 바라보며 문공께 제사하리.
遙瞻潮廟祭文公
동서의 윤리와 기강은 본질적으로 같지가 않다. 날은 저물고, 무지개 다리는 안개 속에 잠겼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끊긴 길 앞에서 나는 향을 피우고 간절하게 서학서를 불 지른다.
그런데 이기경은 「벽위편」에서 앞쪽 세 구절 끝에 작은 글자로 “이 세 구절을 살펴보니, 바로 서토(西土)를 우러러 생각하는 뜻이다(按此三句, 卽瞻想西土之意也)”라는 풀이를 달아 놓았다. 제 말로는 이단을 배척하는 시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서방을 우러러 그리는 마음을 담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시 속에는 단호한 배격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향한 강한 아쉬움이 배어있다.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홍교를 건너려 했는데, 그래서 동서를 잇는 자가 되려 했는데, 캄캄한 박해의 어둠이 앞을 막고, 한 치 앞을 못 보는 안개가 자옥해서 자기 의지를 꺾고 책을 마지못해 불태운 것이 아니냐는 것이 이기경이 하고 싶었던 얘기다. 4구의 의미는 너무도 명백하니 이것까지 시비 걸 수는 없어 앞쪽 3구에다 태클을 걸었다. 이기경은 이 메모로 어떻게든 이승훈을 끝까지 해코지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끊겨버린 홍교(虹橋)의 소식
한편 제2구의 저문 골짝의 무지개 다리는 그저 나온 말이 아니다. 주자(朱子)가 「무이도가(武夷櫂歌)」에서 말한 “홍교 한번 끊긴 뒤로 소식이 아예 없고, 일만 골짝 일천 바위 푸른 안개 잠겼구나(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巖鎖翠煙)”에 근원을 둔다. 진시황(秦始皇) 때 위자건(魏子)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무이산(武夷山) 꼭대기에 승진관(昇眞觀)이란 도관을 짓고 무지개 다리를 걸어 그곳을 오가며 잔치를 열곤 했다. 그가 승진(昇眞), 즉 진인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자 홍교마저 끊어져서 다시는 그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주차집보(朱箚輯補)」 권 9에 나온다. 일반적으로는 도학의 전승이 끊어지고 말았다는 뜻으로 쓴다.
주자의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위 시의 제2구를 읽으면 날 저문 골짝에 홍교는 이미 끊어졌고, 구름 안개만 한 치 앞을 볼 수 없게 자옥하더란 얘기가 된다. 다산 정약용도 주자의 이 구절을 즐겨 애용했다. 다산은 「윤외심에게 보내다」에서 주자의 이 구절을 인용한 뒤 변동(變動)의 법이 어두워진 때로부터 「주역」의 맥이 끊겨, 어디서도 「주역」에 대해 물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했고, 「김덕수에게 답하다」에서는 “본래 도맥(道脈)이 중단되었다는 뜻으로 쓰였다”고 설명한 바 있다.
또 1828년 5월 5일에 쓴 「단오일에 육방옹의 초하한거시 8수를 차운하여 송옹에게 부치다(端午日次韻陸放翁初夏閒居八首 寄淞翁)」란 시에서는 “한나라 적 경전 얘기 실제를 빠뜨렸고, 송유(宋儒)는 이치 통해 뒤쫓아 탐색했네. 홍교가 한번 끊겨 바위 안개 푸르르니, 어떤 이가 이 이치를 강론함이 있을런가(漢代談經遺實際, 宋儒通理欲追呼. 虹橋一斷巖煙翠, 亦有何人講此無)”라고 노래했다. 이렇게 보면 이승훈의 「벽이시」 제2구는 홍교가 끊긴 데다 날마저 저물어 더 이상 서학에 가닿을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서학서를 태우고 정도(正道)로 전향하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이 된다. 이승훈은 1791년 의금부에 올린 공초에서 「벽이문」과 「벽이시」를 두고, 이단을 배척한 명백한 증거가 아니냐며 자신의 결백을 거듭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이 시에 대한 주재용 신부의 해석은 사뭇 다르다. 그가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1970) 83쪽에 쓴 이 시의 분석 내용을 살펴보겠다. 주 신부는 “이 시 역시 결코 이단, 즉 천주교를 벽파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사모하고 못 잊어 생각하는 글”이라며, “천주교를 동경하고 그 교회 서적을 불태운 것을 한없이 마음 아파하는 뜻을 이 시에서까지 읊고 있다”고 보았다. 이기경과 마찬가지로 앞쪽 세 구절에 남는 여운을 보다 적극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시귀에 ‘천이지기한서동(天彛地紀限西東)’이란 ‘그대와 나 사는 곳이 서와 동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뜻이고, ‘저무는 구렁’은 환난과 심란 속에 파묻힌 당신 자신을 말함이요, ‘무지개 마을’은 찬란한 진리의 광명 속에 사는 선교사들을 뜻하고, ‘타오르는 한 가닥 마음의 향불’은 선생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신앙의 향불일 것이니, 그것이 교회 서적이 불타는 바람에 일렁거린다고 애통하게 여겨서 멀리 조묘나 바라보고 문공에게 제사를 드려 볼까 하였는데, 조묘는 중국 조주에 있는 한유의 사당을 말함이다. 선생이 유독 이분에게다 제사한다는 것은, 이분의 정신을 특별히 ‘위로한다’는 뜻일 것이다”라는 자세한 풀이를 보탰다.
앞쪽의 내용은 그런대로 동의할 수 있지만, 뒤쪽의 구절 풀이는 방향이 많이 어긋났다. 홍교를 ‘무지개 마을’로 푼 것부터 이상하다. 무엇보다 이 구절이 주자의 「무이도가」에서 연원한 것인 줄 몰랐다. 한유의 사당에 제사 지내는 행위에 대한 해석도, 뒤쪽의 설명에서는 이승훈이 한유를 자신과 같이 평생 불우한 사람으로 보아, 그에 대한 위로라고만 여겨 문맥을 억지로 비틀어 읽었다.
이승훈의 이 시는 친척들 앞에서 배교를 공개 선언하며, 그 구체적 증명으로 지은 시이니 이것은 일종의 전향선언문이지 신앙의 간증으로 읽을 수는 없다. 주재용 신부의 독법대로라면 그가 이 시를 어떻게 이단 배척의 이름을 내걸고 발표할 수 있었겠는가? 기껏해서 이기경처럼 입으로 배교를 한다면서도 실제로는 멈칫대는 기미가 있다는 정도로 말할 수는 있겠지만, 주재용 신부처럼 “이 얼마나 천주교를 동경하고 사모하는 심정인가? 이 시를 지은 선생을 뉘 있어 감히 배교자라 하겠는가?”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7) 명도회의 성격과 설립 시점
국가 탄압에 맞서 1800년 4월 조직화된 신심 단체 첫 설립
-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회장으로 활동한 정약종이 교리서를 집필하고 있는 장면. 그림=탁희성 화백.
중간 세포 차단책과 플랜 B
1795년 6월 주문모 실포 사건 이후 신부는 전면에 나서기가 어려웠다. 신부를 잡기 위해 1798년과 1799년 충청도 교회에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고, 밀정 조화진의 암약으로 충청도 교회는 궤멸 직전 상황에 몰렸다. 1800년 4월에는 양근 교회를 표적으로 한 탄압까지 시작되어, 핵심 인물들이 잇달아 검거되자, 1800년 5월에 정약종이 검거를 피해 급거 상경해야 했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1800년 당시의 주문모 신부는 국가의 지속적 탄압으로 와해 상태에 놓인 신자 조직의 재건과 강화가 절박했다. 하지만 신부는 손발이 꽁꽁 묶여, 지방 신자들은 신부의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세례는 어찌 받으며, 고해성사는 또 어찌하나?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 위해 18차례나 상경하고도, 양말 한번 신어보는 것 외에는 끝내 만나지도 못했던 신태보의 예만 보더라도, 당시 일반 신자가 신부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꽉 막힌 상황을 돌파할 타개책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체계적인 신자 관리뿐 아니라 조직 및 재무 관리도 절실했다. 모든 것이 비선(秘線)으로 움직여야 해서 어려움이 더 많았다. 1799년 충청도 교회의 예에서 보듯 그중 하나라도 검거망에 걸려들 경우, 전체 조직이 일거에 붕괴될 위험이 컸다.
감시의 눈길은 어디서고 번득이고 있었다. 신부는 밤중에도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한 플랜 B가 늘 필요했다. 실제로도 주문모 신부는 수없이 많은 검거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곤 했다. 강완숙의 집에 머무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고, 검거의 눈길이 미치지 않을 곳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떠돌았다. 중간 세포를 차단하는 장치의 마련이 절박했다.
교회는 교회대로 지방 조직의 활성화나, 사목 지침의 하달, 효율적 신자 관리를 위한 교리 교육, 신심 서적 보급 및 재정 확보를 위한 회계 관리 등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박해의 강도가 세질수록 교회는 여기에 맞는 대응 전략을 수립해야만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명도회(明道會)의 설립은 국가의 탄압에 맞선 조선 교회의 절박한 대응책 중 하나였다. 명도회는 천주교의 도리를 밝히는 모임으로, 주문모 신부가 설립한 조선 교회 최초의 조직을 갖춘 신심 단체였다. 명도회는 주문모 신부가 조선으로 건너오기 네 해 전인 1791년에 구베아 주교에 의해 막 도입된 단체였다. 명도회의 활동이 가져온 중국 교회 내부의 급속한 변화를 직접 보았던 주 신부는 이 단체가 중국 교회보다 조선 교회에 더 최적화된 모델임을 확신했다.
-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800년 4월에 설립된 명도회
명도회의 설립에 대한 「황사영백서」의 기록은 이렇다. “경신년(1800) 4월에 명회(明會)가 보명(報名)한 뒤에 여러 교우가 신공(神工)을 부지런히 했다. 회 밖의 사람 또한 풍조에 따라 움직이며, 모두 남을 교화시키기에 힘썼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는 성대하게 교화로 향하여서, 날마다 하루가 달랐다. 부녀자가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어리석은 천한 사람이 3분의 1이었다. 사대부 남자는 세상의 화를 두려워하여 믿어 따르는 자가 몹시 적었다.”
위 기록은 명도회의 첫 보명, 즉 최초의 회원 등록이 1800년 4월의 일이었다고 명시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비망기」에도 “주 신부는 1800년 음력 4월에 명도회를 설립하였다”고 분명하게 적어 놓았다. 이 최초의 보명 이후 신자들이 신공과 교화에 힘쓰게 되어, 1800년 가을과 겨울이 되었을 때는 그 성과가 자못 놀라웠다. 심지어 명도회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조차 이 흐름에 동조하여 일제히 기도 생활과 전교 활동에 열성을 띠게 되는 시너지 효과를 불러왔다. 당시 명도회 주요 회원의 3분의 2가 여성, 나머지 3분의 1은 신분이 낮은 일반 백성이었다고 한 점은 주목할만하다.
특별히 그해 가을과 겨울의 상황을 강조한 것은 1800년 6월 28일 정조의 돌연한 서거 이후, 반년에 걸친 국상(國喪) 중에 포교들의 기찰이 일체 중단되면서, 신앙 활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벽위편」에는 “1800년 6월, 임금께서 돌아가시자 옥사도 마침내 풀렸다. 새 임금이 어리신지라 정순대비께서 수렴청정을 하시는 반년 동안 다시 신칙하여 금함이 없자, 천주교도들은 마침내 아무 두려워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가을과 겨울 이후로는 기세가 배나 성해져서 곳곳에서 설법을 하고, 심지어 부녀자들이 새벽이고 저녁이고 등불을 밝힌 채 거리를 왕래하며 서로 잇달아 자취가 끊이지 않았다”고 적은 그 상황과 정확하게 맞물린다. 이렇게 보아 명도회는 1800년 4월에 처음 설립되어, 같은 해 7월에서 12월 사이에는 이미 자신들도 놀랄 만큼 예상외의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충훈부 후동으로 이사한 강완숙
명도회의 설립 시점이 1800년 4월임을 가늠케 하는 다른 정황도 있다. 「추안급국안」 1801년 3월 15일 자, 주문모 1차 심문 당시, 주 신부의 공초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기미년(1799) 겨울 또 충청도에서 교난이 있음을 만나, 이로 인해 피하느라 나가 다닌 것이 대략 몇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인의 집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또 사동(寺洞) 홍문갑의 집은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감을 금지하는 법 때문에, 다시 그 집을 내다 팔고 훈동(勳洞) 집을 샀는데, 이때가 경신년(1800) 3월이었습니다.(己未冬, 又値湖中有難, 因避而出遊者, 約數月. 然不到敎中人家. 又寺洞洪家, 因閭家奪入之禁, 變賣其家, 而買勳洞家, 時在庚申三月也)”
1799년 충청도 지역의 교난 이후 주문모 신부는 서울의 비선 조직이 불시에 노출될 것에 대비하여 강완숙의 집을 떠나 경기도 양근과 이천 지역에서 거처를 옮겨 다니며 지냈던 듯하다. 그러니까 1799년 10월에서 1800년 3월까지 주문모 신부는 서울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던 처지였으므로 명도회 같은 조직을 가동시킬 수 있는 여력이 전혀 없었다.
원래 1792년 이후 충청도 별라산에서 상경하여 남대문 밖 창동에 살았던 강완숙은 1799년에 규모를 키워 도심 속 대사동으로 집을 옮겼다. 이사하면서 집회와 거주 공간의 확충을 위해 몇 칸의 집을 새로 지어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신축 과정에서 여가탈입률(閭家奪入律)에 저촉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일이 그만 꼬였다. 여가탈입률이란 「대전회통(大典會通)」 「형전(刑典) 금제(禁制)」에 “여염집을 빼앗아 차지한 자는 도(徒) 3년으로 정배한다. 월세로 빌렸다고 칭탁하거나 전세를 내었다고 칭탁하는 경우도 형률이 같다(閭家奪入者, 徒三年定配. 其稱借貰者, 同律)”고 한 조항이다. 대사동 집과 둘레에 세를 얻은 집을 터서 새집을 지어 공간을 확장하려다가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던 듯하다.
결국 강완숙은 대사동 집의 신축 입주를 포기하고, 1800년 3월에 서둘러 충훈부 후동(지금의 종로구 관훈동)에 새로 다른 집을 구해 이사했다. 주문모 신부는 4월에야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 뒤 여주에서 교난이 다시 발생했고, 신부는 이에 황사영과 현계흠의 집으로 급히 피신했다가, 5월 이후 정약종과 정광수의 집, 그리고 광통교 김이우의 집 등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 내용은 주문모 신부의 공초 기록 속에 자세하다.
명도회의 출범은 1800년 3월 강완숙이 충훈부 후동으로 입주한 뒤, 주거가 정돈된 시점에 바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공간에서 침체된 교회에 새 기운을 불어넣기 위한 모종의 조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특히 신부가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은 평신도 간의 학습과 지도를 통한 교리 지식의 확산 방식에 당위성을 더해 주었다.
정약종의 갑작스런 상경
한편 초대 명도회장으로 임명된 정약종의 상경도 이 시점에 이루어졌다. 「추안급국안」 중 1801년 2월 13일, 정약용의 공초에, “제 형 정약종은 작년(1800) 여름 대계(臺啓)가 나온 뒤 양근으로부터 도피하여 올라와 배를 타고 서울에 이르러 전동(典洞)의 청석동(靑石洞) 오른편 서너 번째 집에 머물러 지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들을 보내 형을 모시고 와서 남대문 안에 집을 사서 그로 하여금 옮겨 지내게 했습니다”라는 진술이 보인다.
정약종의 상경 시점은 「황사영백서」 제26행에 “명도회 회장 정 아우구스티노는 정약용의 셋째 형이다. 앞서 양근에 살다가 경신년(1800) 5월에 교난으로 가족을 이끌고 상경하였다”고 한 기록에 명확하다. 그의 상경은 명도회가 설립된 4월에서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정약종의 상경 이유는 1800년 4월 이중배 마르티노 등이 양근에서 체포되고, 이어 5월에 권상문마저 붙잡히면서 양근 교회에 위기가 닥쳤고, 지평 신귀조(申龜朝)와 장령 권한위(權漢緯)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리면서 여주와 양근 지역을 특정해 사학의 박멸을 주장하여, 더 이상 양근 지역에서의 종교 활동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갓 출범한 명도회 조직의 리더로서, 주문모 신부를 대신해 가까운 거리에서 조직을 통할케 하려 한 교중의 뜻이 더해진 결과이기도 했다. 다만 정약종의 회장 임명이 4월 출범과 동시에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5월 상경과 함께 결정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당시 정약종 일가는 청석동에 있던 궁녀 문영인의 집에 세 들어 들어갔고, 이 집은 한해 전인 1799년에 정약종이 교회 일로 서울에 두 달간 체류할 때 강완숙의 주선으로 빌려서 묵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 후 한 달 만에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고, 온 나라가 국상을 만나 애도 기간에 들어가면서 일체의 천주교 탄압과 검거 활동이 중단되자, 갓 출범한 명도회로서는 생각지 않게 최적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명도회의 설립 목적과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계속 이어서 쓰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