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개 익숙한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잘하지만,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과 처음 만나는 자리는 어색해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 어떤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도 그렇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기 때문이지요. 기도는 어떤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보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때 쉬워집니다.
이 시대는 매우 자기중심적인 시대입니다. 내가 중요하고,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저도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실은 아들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집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제 아들입니다. 온 집안이 아들의 물건으로 꽉 차 있습니다.
저는 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다른 것은 버려도 책은 못 버립니다. 제 아내가 책 좀 버리면 안 되냐고 해도 “안 돼요. 차라리 나를 갖다 버려요” 하며 버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책을 버리고 거실에 있던 제 짐을 줄입니다. 아들의 책과 장난감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죠.
제가 아들을 위해서 돈을 쓰고, 집안 곳곳에 아들의 장난감이 꽉 차 있는 것을 보고 싫어할까요? 불편해할까요? 아니요, 좋아합니다. 제 아들을 위해 쓰는 돈은 아깝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사주고 싶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런 것입니다. 저도 제가 소중하고 저를 중심으로 살고 싶은 아주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인데 그런 저도 아들 앞에서는 이기적인 마음이 작동되지 않고 언제나 저보다 아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사용하거나 천사들을 보내거나 자신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시고 자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제가 아들을 낳고 보니 이 말씀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어떻게 아들을 내어주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것은 말이 안 되는데, 불가능한데!’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도 쉽지 않지만, 아들의 목숨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완전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런 결정을 하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축복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내 삶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죄인이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에게 자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중심에 바로 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의 핏값으로 산 우리가 하나님의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노예로 바꾸신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는 내 아빠입니다. 내가 구할 때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아빠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빠라는 것을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놀라운 특권입니다.
- 따라 하는 기도 1, 장재기
† 말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 시편 100:5
† 기도 나의 아빠 되신 하나님, 당신 앞에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놓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이 세상에서 줄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나는 자녀의 권세를 얻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주님과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기 원합니다. 더욱 친밀함으로 의무가 아닌 자녀된 특권을 온전히 누리기 간절히 원합니다.
† 적용과 결단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며 자녀의 특권으로 더욱 친밀한 교제 나누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