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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시> 수필 월평
지배적 심상과 인식론적 형상화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수필창작에 절대적인 공식이나 왕도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명작들은 어떤 보편적인 시학원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런 원리와 기법들이 새로운 명작을 생성하고 장르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문학성은 형식이나 구조에서 나온다. 어떤 이론가는 수필 텍스트를 심층과 표층, 그리고 담론층이 유기적으로 생성하는 입체구조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본격수필의 메카니즘을 구축해주는 미적 배열의 핵심원리를 체험 ->해석 -> 형상화로 이어지는 삼 단계 과정의 유기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삼 차원으로 전개되며 생성되는 수필 텍스트의 창조과정을 좀더 쉽게 설명하면, 체험은 한 일, 본 일에 해당하고, 해석에는 생각, 느낌이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단계는 형상화인데, 체험과 해석을 압축하여 문학원리에 따라 지배적 심상 또는 인상으로 치환함으로써 하나의 본격수필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발상의 차원에서 보면, 체험은 ‘보이는 것’, 해석은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형상화는 ‘꼭 보아야 할 것’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수필은 심층, 표층, 담론층이란 구조시학적 한 축과 체험, 해석, 형상화라는 구조적 한 축, 이렇게 해서 양축을 방법론적으로 적용해서 이야기가 조직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이야기의 미적 배열을 체험적 사실에서 가져온 뒤, 스토리만 나열하면 그것은 일차원적 수필이고, 체험을 미적으로 배열하는 차원에서 해석을 가하면, 약간의 문학성은 우러나오나 본격수필에 이르지 못하는 이차원적 수필에 머물고 만다. 삼차원적으로 나아가 본격수필로 완성되려면 반드시 체험과 해석을 종합하여 형상적 체험으로의 변용을 시도해야 하는데, 그것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에 가장 중요한 역할인 지배적 심상 또는 인상심기라 하겠다. 결국 이러한 작업은 제재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구조화하여 예술적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문학도시에 실린 작품들을 뽑아보니, 세 편 정도가 발견된다. 이후남의 <수필에 들다>, 서은영의 <싱크홀>, 장혜주의 <바람놀이> 등이다. 본고는 이들의 수필을 텍스트로 하여, 수필가들이 체험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변용하여 독자와 소통하는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II. 문학적 성취와 형상적 구조
문학적 의미는 제재를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텍스트의 구조로부터 나온다. 삽화, 예화, 그리고 체험에 더하여지는 생각과 느낌으로 해석된 작품은 문학성의 윤기를 띠게 되고, 여기에 주제의식이 인식론적으로 의미화되면, 본격수필은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며, 맛과 멋을 띠게 된다. 따라서 모든 문학적 의미는 텍스트의 구조로부터 나오고, 그 구조는 예술적 감동을 생성하는 문학적 의미와 미적 울림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텍스트 분석의 기준이 된다. 수필가가 이야기의 구조에 심혈을 기울이고, 비평가 또한 그 정체 규명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비슷한 제재로 이야기를 생성해도 각기 다른 텍스트가 창조되는 것도, 같은 화소와 제재로 이야기를 창조해도 메시지가 각기 다르게 읽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결이 채 삭지도 않은 글을 벌써 마무리하려고 꺼내어 몇 날 며칠을 어르고 쓰다듬는 중이다. 그러나 역시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눈에 뜨이는 특별한 구석은커녕 서리병아리처럼 비실거리며 움츠러드는 모습이 가엽기만 하다. 이쯤에서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살펴보게 된다. 뱁새가 황새 따라 가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했다면 그건 너무 지나친 욕심이다. 뱁새에게는 그에게 알맞은 걸음이 있을 터이니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좀 더 깊은 생각으로 천천히 가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퇴고를 무시하고 과정을 생략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문장은 온전하게 완성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 설익은 구석이 남아 있게 된다고 하니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설익은 맛이란 시고 떫기 마련이다. 시거든 떫지나 말지, 시고 떫다는 것은 맛 중에서 최악이다.혹여 이와 같이 설익어 몸서리 쳐지는 악문만은 남기지 않았으면 한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는 ‘퇴고하지 않은 문장은 북데기와 같다’라고 했다. 내가 쓴 글이 자꾸 저만 보라고 보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만큼 많은 북데기에 묻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쓰는 동안 북데기에서 애써 알맹이 고르는 일은 수도 없이 해야만 하리라. 그리고 골라낸 그 알맹이에 알맞은 옷을 입혀 주어야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훌륭한 문장가일수록 퇴고하는 수련 과정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물며 내게 있어서이랴. 감히 그럴듯한 글을 기대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되도록 흠이 적은 글, 좀 더 나은 글이 될 수 있도록 고민 해 봐야겠다.
- 이후남의 <수필에 들다> 중에서
이 수필은 문학성이 빛나는 글이다. 한마디로 문예미학적으로 직조되어 있다고 하겠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기가 쓰는 글에 대해 발표하기 전까지 몇 번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 글은 수필 쓰기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작가의 문학정신이 고백적 방식으로 기술된 수필이라고 하겠다. 발단부, ‘그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방 안에 온종일 가두어 둔 철부지 개구쟁이라고 할까. 아무리 다독여 주어도 끊임없이 보채며 보살펴 주기만 바란다.’는 진술을 토대로, 한 번에 만족이 안 되는 수필쓰기를 통해서, 작가는 수필을 ‘철부지 개구쟁이’쯤으로 인식한다. 마음대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또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마치 탕약 짜내듯 간신히 한 편의 수필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둔 것이 이렇듯 말썽’을 일으킨다거나, ‘방금 부르르 끓어오른 냄비 밥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글’이라거나, ‘애벌 삶은 보리쌀처럼 설익어 멀뚱거리는 글은 서랍 속에 넣어 결을 삭히기로 한다’는 등의 발단부 문장들의 비유적 표현만 봐도 작가는 수필의 서두 기능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의 치환원리, 수필의 구조도 흔히 꿰뚫고 있는 분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며칠이 지난 다음 살펴 본 글의 몰골이 가관이다.’라는 체험의 결과에서 ‘글은 농작물이다.’라는 의미를 건져내었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고 한다.’ ‘기척을 알아차린 글자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며, 여기요 여기, 얼른 와 보라고 아우성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작가만의 경험을 문학적으로 변용해서 자신의 메시지를 문예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서 그는, ‘글이란 모름지기 ‘작가의 고통이 독자의 행복’이라며, ‘경험한 것을 마치 그림 그리듯 순서대로 나열하는 방식의 수준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나쁜 습관을 하루아침 단 칼에 잘라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라는 반성적 성찰에 이른다. ‘결이 채 삭지도 않은 글을 벌써 마무리하려고 꺼내어 몇 날 며칠을 어르고 쓰다듬는 중인데’, ‘눈에 뜨이는 특별한 구석은커녕 서리병아리처럼 비실거리며 움츠러드는 모습이 가엽기만 하다.’는 진술을 통해 작가는 체험의 구체화를 이루고, 인용 예문에서와 같이 마지막에 가서 글쓰기에 대한 어려움을 비유로 의미화한다. ‘퇴고하지 않은 문장은 북데기와 같다’는 프랑스 시인 발레리의 말을 근거로 삼고, 수필의 창작 과정을 ‘북데기에서 애써 알맹이 고르는 일’로 변용해서, 결국에는 ‘골라낸 그 알맹이에 알맞은 옷을 입혀 주어야한다’는 식으로 지배적 인상을 강화하고 있다.
연약지반이 된 내리사랑 곳곳이 패인 엄마는 복숭아 빛 웃음도 잔잔한 일상도 잃어버린 듯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되짚어 보면 엄마의 진 자리였고 설렘의 대상이었던 아들이 허방에 빠질 때마다 엄마는 곧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대하려 애썼던 것 같다. 갓 태어난 아들을 품에 안고 ‘아들이야, 이제 됐다. 됐어’ 되뇌며 엄마 살 냄새를 맡으려 감았던 눈을 이제 막 뜬 듯 상처뿐인 아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으로 품을 뿐이다. 그때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던 아들의 모난 구석이 둥글게 다듬어졌다.
어쩌면 엄마와 아들 사이에 패인 구멍은 다른 세계로 향하는 입구가 아니었을까. 가끔 망쳐버린 일이 또 다른 시작을 열 때가 있다. 허물어진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쌓듯 아들이 엄마의 뒤를 살핀다. 이불도 깔지 않은 바닥에 모로 누워 있는 엄마의 등에서 바람소리가 난다. 가슴에 생긴 커다란 구멍의 끝이 내뱉는 속울음을 한참 들여다 본 아들이 가만히 손을 내밀어 구멍을 막는다. 엄마의 가장 깊은 곳을 자신의 체온으로 메우려는 손짓이었을까. 가만가만 엄마의 싱크홀로 아들이 채워지고 있다는 걸 아는지 엄마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 서은영의 <싱크홀> 중에서
이 수필 역시 대단히 문학적 성취도가 높다. 만약 아들과 엄마의 갈등을 보고 들은 그대로 진술한다거나 그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풀어놓는다면 그것은 작문이나 수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내리사랑과 그 어긋남의 상처를 ‘함몰’이라 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의미화하여, 작가는 상처를 다시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나타내었다. 아픔을 더 잘 보이게 ‘싱크홀’로 치환하여 구체적인 객관적 상관물로 드러내고,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함으로써 이 수필은 사실의 세계를 뛰어넘는, 한 차원 높은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해석만 있고 형상화가 없으면 관념적인 글이 되고 말았겠지만 해석과 형상화가 함께 어우러져서 감동이 배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모두 이 과정을 거치고 있다. 따라서 위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리사랑의 상처 -> 함몰의 구멍, ->다른 세계로의 입구, 싱크홀로 이어지는 해석과 형상화는 문학 작품이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 하겠다. 그런데 서정수필에서 이 형상화란 주로 비유라는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된다. 비유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사물로 치환할 뿐만 아니라 같은 구체적 사물을 감각적으로 강화하기도 한다. 작가는 '내리사랑'이라고 하는 구체적 행위의 역할과 의미를 ‘품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마지막 결말부에서 엄마와 아들 사이에 패인 구멍을 '다른 세계로 향하는 입구'로 비유함으로써 자기만의 독특한 인식론적 형상화에 성공한 것이다. ‘가슴에 생긴 커다란 구멍’을 손을 내밀어 막는 아들의 변화가 ‘엄마의 가장 깊은 곳을 자신의 체온으로 메우려는 손짓’이란 의미체로 변신하여 우리의 감동을 출렁이게 한다. 만약에 마지막까지 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해석에서 멈췄다면 지배적 심상이 결여된 글이 되고 말았을 것이고, 이 글은 문학적 성취에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서은영은 전략적 글쓰기를 통해 한 편의 수필을 문예미학적으로 구조화했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장혜주의 <바람놀이>에 주목한다.
뒷산 소나무 숲에 누워 있던 바람이 일어나 슬몃 내 이마를 건드린다. 아침 인사가 시원하다. 조용한 바람이 내 팔을 잡고, 내 몸을 감싸고, 내 안으로 들어온다. 어느 순간 나는 작은 바람이 되어 운동장 위를 흐른다. 오랜 세월, 여러 바람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결이 다른 바람 사이에 있던 희망, 꿈, 상처, 외로음, 서러움 같은 것들……. 작은 바람에도 나는 자주 흔들렸다. 그러나 이제 많이 무디어진 나는 작은 바람을 느끼지 못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바람이 없을 때는 내가 만들려고 한다. 아프지만 내 실핏줄까지 생생하게 무언가를 느끼던, 살아 있던 순간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가끔 혼자 앉아 생각한다, 아직도 나를 무겁게 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사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는 날, 가벼워지고 싶은 날, 나는 바람놀이를 한다.
장혜주의 <바람놀이> 중에서
장혜주의 <바람놀이>란 수필을 분석하면, 우선 제목에서 신선한 느낌이 불어와서 좋다. 허공법문이라 책에서 본 ‘모습놀이’가 강한 인상을 준 것처럼 ‘바람’과 ‘놀이’가 결합하여 ‘바람’이란 추상적인 개념을 ‘놀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치환시킨 것을 높이 평가한다. 즉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바람을 놀이로, 그것도 '바람이 없을 때'는 ‘바람을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인식하는 현상학적인 주체가 되어 대상을 구체화함으로써 형상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바람'에서 곧바로 ‘놀이’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해석의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문예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인생이란 대상에서 '공허함' 또는 '허무함'을 읽어내고, 그것을 '바람놀이'란 보조관념을 빌어다가 추상적 개념인 '공허'를 ‘바람놀이’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가 없다면 탁월한 문학적 성과는 많은 부분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시뿐 아니라 본격수필에서도 형상화는 절대적이다. 비유는 기적을 낳는다. 장혜주의 수필에서 우리는 비유를 통해 형상화에 성공한 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본격수필의 창작에서 지배적 심상이나 인상 심기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한 바 있다. 작가는 결말부에서는 바람이란 개념을 ‘실핏줄까지 생생하게 무언가를 느끼던, 살아 있던 순간’에 비유함으로써 바람의 청신한 의미를 감각적으로 구체화함으로써, 이 수필을 감동의 고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단조로운 생에서 변화를 주려는 여심을 ‘바람놀이’에 비유함으로써 작가는 삶의 단조로운 결을 노래하고, 거기에서 반성적 성찰로 지혜를 구하는 수필 장르의 특징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겠다.
III. 로그아웃
이상에서 한 작가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인식론적으로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을 세 분의 수필작품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았다. 수필에 있어서 형상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의미화 작업이란 남과 차이나는 언어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남다른 생각, 남다른 사고, 남다른 세계관을 갖게 해주는 게 바로 제재와의 상관화 작업이며, 의미화 작업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문학의 성취도는 참신한 소재와 그에 대한 참신한 해석 그리고 그 해석한 내용을 어떻게 새롭게 형상화하는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거기에 지배적 심상심기, 즉 형상화가 이루어졌다면 성공은 보장된 셈이다. 비록 소재가 신변이라 하더라도 그 해석이 참신한 이상동의 <비명>, 그리고 따뜻한 인정의 온도가 느껴지는 김경자의 <귀한 인연>도 일독을 권한다. 이렇게 하나의 작품은 세계에 대한 개성적 해석과 형상화를 통해 예술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수필의 예술성은 지배적 심상 그리기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다. 해석에서부터 지배적 심상이나 인상에 해당하는 형상화까지의 과정은 그 가운데 하나의 통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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