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4. 03
중국이 1958년 대만 진먼다오(金門島)를 점령하려고 엄청난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미국 항공모함이 개입하면서 공격을 멈춰야 했다. 1996년에도 대만 건너편에 병력 12만을 배치하고 미사일을 쐈으나 미 항모가 뜨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으로선 미 항모 견제가 지상 과제였다. ‘항모 킬러’라는 탄도미사일(둥펑 21D)을 실전 배치하고 중국산 항모도 만들었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통한 해킹까지 시도했다. 온갖 수를 썼는데도 여전히 미 항모는 세계 바다와 하늘의 제왕이다.
▶ 2013년 중국이 돌연 동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했다. 그러자 미국은 항모 시어도어 루스벨트호를 이 지역으로 보냈다. 서태평양 제해권을 넘겨주는 일은 없을 것이란 상징적 조치였다. 2017년 북한이 6차 핵실험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도발을 했을 때도 이 항모를 한반도로 급파했다. 루스벨트호는 일본에 배치된 레이건호와 함께 서태평양에서 북·중·러를 견제하는 핵심 전략 자산이다.
▶ 1986년 취역한 이 항모는 미 해군 주력인 니미츠급이다. 비행 갑판 면적이 축구장 세 배이고 배수량은 10만t에 이른다. 승조원 5000~6000명이 물을 하루에 1500t 쓰고 세탁물 2.5t을 내놓는다. 우체국·교회·방송국도 있다. "탈영한 병사를 자수 때까지 못 잡는다"는 말도 있다. 작은 도시다. 최신형 전투기 80여 대를 실을 수 있다. 미 항모 위력은 이지스함과 핵 잠수함 등이 전단(戰團)을 이루면서 배가된다. 항모 전단 하나가 작은 나라의 공군력과 해군력 전체를 능가한다.
▶ 중국 앞바다에 있던 루스벨트호가 최근 괌에서 승조원들을 하선시키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100명 넘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승선한 4800여 명 중 3700명이 내릴 것이라고 한다. 총알 한 발 날아오지 않았는데 배가 멈추고 병력 77%를 잃었다. 필수 인원이 남는다고 하지만 자가 격리 기간에는 임무가 중단될 수 있다. 항모 안에는 엄청난 양의 폭탄과 미사일이 적재돼 있다. 원자로도 가동되고 있다. 이런 배에 퍼진 전염병이라니,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다.
▶ 그런데 인근 레이건호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고 한다.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에 중국을 견제하던 미 항모 2척이 한꺼번에 타격을 받은 것이다. 무적이던 로마 군단은 160년대 ‘안토니누스 역병’에 무너졌다고 한다. ‘무적 함대’ 소리를 듣는 미 항모의 최대 적이 전염병일 줄은 몰랐다.
안용현 논설위원 ahnyh@chosun.com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