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려다볼 곳은 오직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가혹하다 싶은 부르심을 받고 두려워해 본 적이 있는지요? 너무나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은 주님의 초대 앞에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던 적은요? 때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그는 볼이 발그레한 미소년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렸는지, 그리고 자신감이 없었던지 예레미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그러나 주님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한번 정했으면 그만이다. 일단 한번 가보자.” 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 7-8) 그렇게 해서 요즘으로 치면 중학생 나이의 소년 예레미야의 고달픈 예언자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린 예언의 내용이었습니다. “가서 유다 고관대작들과 백성들에게 말하라.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축복하셔서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 같은 듣기 좋은 말을 전하라고 하면 저라도 흔쾌히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해야 할 예언의 내용은 유다 민족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이 사라진 빈껍데기 같은 이스라엘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음이 완고한 이 백성, 이 땅은 철저하게 유린되고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얼굴을 돌려 당신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예레미야 예언자가 유다 고관대작들 앞에 섰습니다. 주님께서 내리신 예언을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결과는 ‘뭐 이런 애송이가 와서 헛소리?’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백성들 앞에 가서 외치니 반응은 더 심각했습니다. 가족과 친지, 친구들마저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치도 무리로부터 쫓겨난 한 마리 들개처럼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광야를 떠돌던 슬픈 예언자였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쓴소리를 자꾸 내뱉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두고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버리자.”(예레 18,18) 예언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혹독했던지 나중에는 자신이 태어난 까지 저주합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이렇게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의 생애 내내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 앞에 서있었습니다. 오로지 올려다볼 곳은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민족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렸지, 친구들도 그를 멀리했지, 사방이 원수요 적군이지, 그가 바라보고 의지할 곳은 오로지 주님 한분 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그가 온종일 하는 일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었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주님께 자신의 고달픈 처지를 하소연했고, ‘어떻게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실수 있냐?’며 그분께 따졌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울부짖고 기도하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선은 더욱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족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심각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는 훨씬 크다는 진리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욱 힘차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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