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2010. 동아 신춘
빨강 ㅡ유병록
아무래도 나는 빨강이 되어 가는 중이다
빨강을 만난 건 겨울이었거나 겨울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흰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혹은 얼음 속의 불……
우리 잠시 스쳤을 뿐인데
묻었나 봐 꼭 여며 두었던 소매 끝이거나 긴 목도리의 한쪽에 열꽃이 번지고
나는 사흘에 한 번 빨강을 앓고 하루에 한 번 그를 앓으며…… 빨강이 되어 간다
빨강은 얼어붙은 불이었거나 불타는 얼음
이미 날은 어두워졌는데 얼음에는 관용의 기미가 없는데
몇 켤레의 빨강 발자국이 지나간다 구름 위 어느 따뜻한 나라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사과처럼 몇 개의 붉은 지붕이 빛난다
빨강은 죽어 간다는 증거 그러나 아직은 살아 있다는 증거
色에 빠지면 흑백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데
나는 붉어진다 홍조를 띤 것처럼 빨강이 되어 간다 불타오를수록 추운
계간 『시작』 2013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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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달 ㅡ유병록
붉게 익어가는 토마토는 대지가 꺼내놓은 수천 개의 심장
그러니까 오래전 붉은 달이 뜬 적 있었던 거다 아무도 수확하지 않는 들판에 도착한, 이를테면 붉은 달이라 불리는 자가
제단에 올려놓은 촛불처럼, 그것이 유일한 제물인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던 거다 비명을 안으로 삼키며 들판을 지켰으나
아무도 매장되지 않은 들판이란 없다
붉은 달은 저 높은 곳에서 떨어졌던 것, 사방으로 솟구친 붉은 빛이 들판을 물들였던 것
이것은 토마토밭 사이로 구전되는 동화 피 뿌린 대지에 관한 전설
그를 기리기 위해 운집한 군중처럼 올해의 대지에도
토마토는 붉게 타오른다 들판 빼곡히 자라난 붉은 빛이 울타리 너머로 흘러넘친다
토마토를 베어 물 때마다 내 심장으로 수혈되는 붉은 빛
붉은 달이 뜬다
계간 『시와 표현』 2011년 창간호(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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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ㅡ유병록
아무래도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
따듯한 살갗 안쪽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곧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 같다
순간의 촉감으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부는 식어간다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한 것처럼 차분하게
차가워지는 가슴에 얹었던 손으로, 이미 견고해진 몸을 붙잡고 흔들던 손으로
두부를 만진다 지금은 없는 시간의 마지막을, 전해지지 않는 온기를 만져보는 것이다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
두부를 오래 만지면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느낌, 곧 떠날 영혼의 머뭇거림에 손을 얹는 느낌
이것은 지독한 감각, 다시 위독의 시간
나는 만지고 있다 사라진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리고 있다
―《詩로 여는 세상》2011년 겨울호 ...................................................................... 식어가는 두부와 죽음의 과정을 재치 있게 겹쳐 놓은 시이다. 소멸의 순간을 응고시켜 놓은 두부 한 모의 서늘함 속에 아직 지상을 뜨지 않은 온기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위독의 시간을 지키는 저 따듯한 손길 때문이리라. 지독에 이른 감각이 명계의 혼들을 눈뜨게 할 듯 섬뜩하다.ㅡ 손택수(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눈썹 ㅡ유병록
침이 흐른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고통이 지나갈 때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일그러지는
저기 무성한 숲이 있었다니 욕망의 키를 재어볼 수 있는 나무가 있었다니 그 나무들을 베어 식탁과 책상을 만들었다니
저 숲을 밤새도록 흔들어대던 폭풍의 밤은 지나갔다 숲에서 벌어졌던 몇 가지 연애 사건도 모두 소문이 되었다
구부러진 나무 몇 그루 간신히 대칭의 무늬를 이루고 있는 숲 금이 간 자연의 비유는 복원되지 못한다
날개가 상한 나비처럼 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이 곧 무너져 내릴 대칭의 세계
그녀가 웃는다 혹은 운다 죽기 전에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펼쳐 보이듯
웹진 『시인광장』 2011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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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공이 떠나고 ㅡ유병록
고통을 연주하는 음악이 아름다워도 될까
방금 전까지 수천수만 갈래의 현(絃)으로 착란을 연주하던 악공이 떠나고
버려진 악기는 말하지 누가 날 연주해 주세요 당신을 위해 노래할 거예요
리듬은 이번 생의 음악이 잠시 머무는 거처, 떨림을 어쩌지 못하는 악기에게는 윤리가 없고
그러나 고통을 연주하기에 적합한 저 악기를 어루만지는 것은 손가락이 없는 바람이거나 어둠
수많은 현은 더 이상 밤을 건너가는 계단을 건축하지 못하고
누군가 방금 전까지 당신의 것이었던 머리칼을 어루만진다
이미 끝나버린 음악의 음계를 기억해내는 데 하루를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비명에는 음계가 없다 나는 리듬을 증오한다
—《포지션》2014년 봄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염소 계단 ㅡ유병록
주저앉는다 말뚝에 매인 염소처럼 도망치지 않는 돌계단은 주저앉기에 좋은가
무엇을 잃어버릴 때마다 염소의 등짝 같은 돌계단에 앉아 생각한다
내려가는 중인지 올라가는 중인지
듣는다 귀를 세워 저 높은 곳에서 걸어 내려오는 불안한 숨소리를 저 낮은 곳에서 걸어 올라오는 고단한 숨소리를
그사이 돌계단은 천천히 식어가고
곧 어떤 결심이 근육을 팽팽하게 한다
돌계단이 구부리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면 나는 그 엉덩이를 때리며 말한다
가자고 까마득한 계단 저 높은 곳으로 아니면 저 낮은 곳으로 날 태워 가라고
결심을 경멸하면서 돌계단의 목덜미를 붙잡은 두 손은 놓지도 못하면서
월간 『유심』 2014년 6월호 발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낙관도 비관도 없이 ㅡ 유병록
걷는다 귀를 막고 진열된 희망들 사이로, 입을 닫고 버려진 절망들 사이로 낙관도 비관도 없이
희망에게는 불길한 몇몇의 아나키스트를 길러내서 내쫓는 풍습이 있다 자진해서 국경을 넘는 자들이 있다
절망에게도 얼마쯤 행복이 있겠다 사소한 즐거움은 있겠다 작은 고통이 큰 고통 곁에서 위로받듯이
희망이 절망을 경멸하고 절망이 희망을 짓밟는 광장을 지나서 간다
나는 둔감하고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미소를 짓지 않는다 지옥을 떠올리며 농담을 건넬 수도 있다
나를 경멸하는 너에게 나를 가엽게 여기는 너에게 말한다
사양하겠습니다 교수대 앞에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던 위대한 악인들처럼
월간 『유심』 2014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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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들 ㅡ유병록
산 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가 죽은 자도 가끔 산 자의 안부를 궁금해하는가
연인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이별한 자는 사랑을 정의하는가
검은색으로 빨강과 파랑을 기록할 수 있는가
차분한 목소리로 분노할 수 있는가 경어체로 항의할 수도 있는가
가난을 위한 노래는 빈털터리만이 부를 수 있는가 빈털터리의 노래는 항상 단조로워야 하는가
사물과 대화를 나누려면 그를 흉내 내야 하는가 사물에게 사람 흉내를 부탁해야 하는가
기억은 말할수록 각인되는가 떠들어댈수록 휘발되는가
깨어난 자가 꿈을 기록할 수 있는가
지금 질문하는 자는 나인가 당신인가 대답은 내 몫인가 당신의 몫인가
계간 『포엠포엠』 2014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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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사 ㅡ유병록
자는 길고 저울은 튼튼합니다
아마도 자는 해발과 수심을 재던 물건이었을 겁니다 저울은 정육점에서 쓰던 물건 같습니다
무엇이든 잴 수 있습니다 악취를 풍기는 구덩이, 머뭇거림이 뛰어내지 못하는 난간, 분노가 가시지 않은 돌, 톱질의 기억이 앉아 있는 의자……
자의 일은 높이를 재는 것이고 무게를 달아야 저울입니다
불안이 사라져도 키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감이 악몽으로 바뀌어도 중량은 그대로입니다 고통은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지 못합니다
나는 무감합니다 높이가 없는 것을 상상하지 않습니다 무게가 없는 것을 수긍하지 못합니다
무엇이든 자 옆에 세웁니다
측량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높이와 무게가 있을지 모르지만 사소한 오차일 뿐입니다
계간 『문학과 사회』 2014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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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ㅡ유병록
지나간 고통은 얼마나 순한가
인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다니는 네발짐승 같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축 같다
소리 없이 나를 태우고 밥집에도 가고 상점에도 들른다 달리거나 한곳에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한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네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길들여진 고통은 얼마나 순종적인가 사나운 짐승의 시간은 이미 오래 전의 일 네 발이 내 것 같다
말을 듣지 않고 날뛰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나를 껴안으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위험한 길
참을 만한 시간이 참기 어려운 밤
발을 어루만진다 발가락을 하나씩 세어본다 내 발이 네 것 같다
나는 나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가려 한다
네 등은 따뜻하고 나는 그 커다랗고 우멍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월간 『현대시』 2015년 6월호 발표 ㅡㅡㅡㅡㅡㅡㅡ 유병록 시인의 「발」은 시 읽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선 “발”이라고 하는 하나의 대상을 몸에서 분리해, 그것을 살아 있는 주체처럼 풀어가는 상상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감각적인 즐거움이 인간의 형상에 대한 흥미로운 반성을 가져온다는 점도 중요하다. 사실 주체와 몸은 분리되지 않는다.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몸의 실존과 감각의 토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몸과 주체를 등식화하는 이러한 논리 속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존재해왔다. 가령 주체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손이 심장보다 중요한가?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부분과 전체의 기계론적 위계화하는 유기체적인 상상이 개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고체계는 ‘나무’라는 표상구조로 비유되곤 한다. 나무는 나무라는 전체와 이를 구성하는 부분들(기둥, 뿌리, 줄기, 잔가지, 잎 등)이 존재한다. 나무라는 추상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의 계열적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심(나무)과 주변(가지)이라는 의미의 지정학이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유병록 시인이 생각하는/거부하는 의미의 체계이기도 하다. 기실 발은 존재의 의미(‘나’라는 주체)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발은 주체의 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전체 몸을 떠받치지만 중심은 아니다. 몸을 구성하는 부분 또는 주변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병록의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전체와 부분,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지정학적 상상 바깥에서 출발한다. 발은 순한 “짐승” 같고 “가축” 같다. 나는 발의 주인이다. 고통에 길들여진 너는 순하고 순종적이다. 그러나 어느 날 너를 만지다가 깨닫는다. (그것은 특별한 계기 없이 직관적인 깨달음이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간 것은 내가 아니라 너였으며 네 등을 타고 내가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발은 하나의 몸이자 하나의 정신이다. 나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부분(신체 없는 기관)인 동시에 나를 넘어선 존재(기관 없는 신체)다. “너는 나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가려 한다.” 하나의 삶을 길로 비유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결국은 어딘가로 떠나고 있는 유목민이라면, 짐승과 가축은 언제나 그렇듯 삶 전체를 의미한다. 가축이 있으므로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꿈꾼다. 존재에 대해 발이 그러하다. 신진숙 (문학평론가,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
멀리 가지는 않고 사과나무 말치에서 썩어간다 사이를 짐작하다 말을 잃은 자처럼, 그의 핏기 없는 입술처럼
—《현대시》2015년 6월호 ------------- "사과밭에서는 모든 게 휘어진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힘을 지닌 도입부. 제 2연 한 연에서 봄, 여름, 가을이 노련하게 처리되고. 사과의 썩음은 향기를 대동하는 법. 그런데 "사과가 한 광주리의 향기가 쏟으며 썩어간다" 이 한 행 도무지 주술 관계 호응이 이상합니다. '향기를'이라고 다듬었더라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불 ㅡ유병록
방 한쪽에 코끼리 한 마리가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무 말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위로도 타이름도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듯이, 널따란 귀로 얼굴을 가리고
여기는 이제 네 집이 아니라고, 그만 일어나 저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나는 재촉하지 못하고
이불처럼 커다란 귀를 덮고 코끼리는 잠을 잤다 방을 어지럽히거나 물건을 부수는 일도 없이, 간직한 이야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듯이
내모는 일은 어렵겠구나 마음먹고 들여다보지 않은 며칠
너는 떠났다 광목 이불 같은 귀를 베어서 머리를 두고 눕던 자리에 곱게 개어놓고
나는 그것을 펼쳐서 덮지는 못하고 가만히 베고 누워 우리 함께 이불을 빨던 여름날을 생각했다 이제 온기라고는 없는 서러운 바닥에서
—《현대시학》2015년 11월호 ---
산다 ㅡ 유병록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짐작의 세계를 닮아가는 일이 가능할 뿐입니다
말 배우는 아이처럼 소리 내어 책을 읽습니다 아직 어색한말투, 얼른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싶습니다
당신의 말투로 인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당신의 말투로 다짐을 하면 쓸쓸해집니다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차츰 익숙해집니다 더듬거리지 않고 조언을 건넬 수 있습니다 사소한 농담에 성공하기도 합니다
고함을 치거나 비병을 지르는 일은 어렵습니다 울음을 닮으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맙니다
떨림을 닮느라 침묵을 축적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내 목소리는 잃어간다는 걱정, 알고 있습니다 기어이 실패하리라는 말, 틀리지 않습니다
무덤이 죽음을 거부하지 않듯이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흐느낄 만한 곳에서 흐느낍니다 당신이 웃을 만한곳에서 웃겠습니다
기로에 서면 당신에게 묻습니다 나에게 당신의 생각을 말해주는 일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입술에서 당신의 억양을 발견할 때마다 지독한 다행입니다
월간 『현대시학』 2015년 11월호 발표
언어의 교란 속에 열리는 또다른 세상 —유병록의 시 다섯 편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6년 1, 2월호 중에서
언어의 교란 속에 열리는 또다른 세상 —유병록의 시 다섯 편
1 시의 세상에선 종종 교란이 발생한다. 언어의 교란을 말함이다. 사실 교란이란 말이 가장 흔하게 쓰이는 경우는 자연 생태계를 말할 때이다. 자연 생태계는 안정된 듯 보이는데도 가끔 교란이 발생할 때가 있다. 자연 생태계의 교란은 대개 뜻하지 않은 외래종의 유입으로부터 발생한다. 자연 생태계에 교란이 발생하면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먹이 사슬의 균형이 무너진다. 그러면 일부 종의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며 그동안의 안정되었던 생태계에 혼란이 온다. 이런 교란에 대한 사람들의 대응은 외래종을 제거하여 자연 생태계를 예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시의 세상에서 언어 생태계의 교란이 발생했을 때의 대응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교란이 발생하면 시를 읽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겪게 되는 고충은 의미의 혼란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언어가 교란된 세상을 마주하면서도 이를 우리들에게 익숙한 일반적인 언어 체계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교란된 언어들을 잘 살피고 정리하여 시가 만들어낸 언어 생태계에서 새롭게 유영하고 있는 의미의 종들을 낚아내는 일이다. 자연 생태계에서 교란이 발생하면 느닷없이 유입된 외래종을 제거해야 하지만 시의 세상에선 언어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는 종을 찾아내 그 종을 새로운 맛으로 요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연 생태계의 교란은 기존 생태계의 파괴를 뜻하지만 시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언어 생태계의 교란은 또다른 세상의 탄생이기도 하다. 물론 새로운 종을 낚아올리는 과정은 쉽지가 않다. 시의 언어 생태계에 나타난 새로운 종, 즉 한 시인의 언어 생계태 안에서만 통하는 새로운 의미가 겉은 기존의 종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유병록의 시 다섯 편을 마주하며 이렇듯 교란된 언어 생태계를 보았다. 그리하여 그 생태계 속에서 언어의 전후 맥락을 살피고 정리하는 것으로 미끼를 내리거나 그물을 쳤으며, 그것으로 새로운 종을 낚아올리는 방식으로 삼아 그의 시를 읽었다.
2 다섯 편의 시 가운데서 「사과」로 시작해본다. 사과는 처음에는 과일로서의 사과로 여겨졌다. 시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만나는 ‘사과밭’이란 말과 묶어 이해를 하면 이러한 짐작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과밭이란 말만 그렇고 그 말을 첫부분에 내세우며 시작하는 싯구절은 그렇질 못하다. “사과밭에서는 모든 게 휘어진다”는 시의 첫구절은 사과를 과일이려니 생각한 우리의 짐작으로는 그 의미를 곧바로 해독해내기가 쉽지 않다. 사과밭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그 사과가 과일이었다면 그곳은 봄에는 사과꽃이 피고 여름에는 사과가 익어가며 가을은 그 열매를 수확하는 곳이다. 그런데 시 속의 사과밭은 그렇질 못하다. 시 속의 사과밭은 “봄날의 약속이 희미해지고 한여름의 맹세가 식어”가는 곳이며, 가을이 왔을 때는 어떻게 완력으로 버텨보지만 결국에는 “사과밭을 지탱하던 가을의 완력도 무력해”지는 곳이다. 유병록이 말하는 사과가 우리들이 처음에 짐작한 과일로서의 사과가 맞는 것일까. 우리의 머릿속에서 슬그머니 의문이 들자 시인이 이렇게 말한다.
벌레 먹듯이 이제 내가 말하는 사과는 네가 말하는 사과가 아니다 —「사과」, 부분
이 사과는 단순히 과일로서의 사과가 아니다. 이 사과는 과일이면서 동시에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할 때의 그 사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사과밭은 사과나무가 자라는 곳이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하는 사이이거나 사과를 해야 하는 자리가 된다. 과일로서의 사과에 잘못을 빌 때의 사과가 섞여들면 “내가 사과를 건네도 네 손은 비어 있다”는 구절도 잘 이해가 간다. 사과를 했는데도 상대가 받아들이질 못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맥락에 서면 “사과밭에서는 모든 게 휘어진다”는 첫구절은 사과의 태도가 될 수 있다. 사과를 할 때는 강경하게 자기 입장을 고수할 수가 없다. 사과를 요구하는 상대방의 강경한 입장이 내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는 완력으로 작용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금증은 생긴다. 왜 하필 유병록은 과일로서의 사과와 잘못을 빌 때의 사과를 뒤섞어 그 의미를 교란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 사과가 미묘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과는 사과를 할 때는 둘 사이를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과가 떨어”질 때 “돌이킬 수 없는 거리로 아득해진다”는 구절이 그런 점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도 둘의 사이는 그렇게 쉽게 끝이 나질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도 “멀리 가지는 않고/사과나무 발치에서 썩어간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랑하는 사이는 마치 끝장을 낼 듯이 사과를 요구하고 또 버티다가 사과를 하면서 서로 끝을 내진 않고 지루하게 사이를 계속 이어간다. 사랑하는 둘은 그만큼 그 사이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 둘은 자로 명확하게 잴 수가 없는 사이이다. 때문에 그 둘의 앞에선 “사이를 짐작하다 말을 잃는 자처럼” 되기가 쉬우며, 그 무엇으로도 둘의 사이는 짐작이 어렵다. 그런 사이에서 사과가 갖는 의미와 역학을 나타내기는 쉽지가 않다. 사과라는 하나의 말 속에 과일로서의 사과와 잘못을 빌 때의 사과가 뒤섞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시가 그렇게 전략적으로 씌여질리는 없다. 때문에 정작 내가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진 것은 이 시가 어떻게 쓰여졌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상상했다. 시인에겐 여자가 있다. 아마도 아내나 연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다툼은 발생하고 걸핏하면 사과를 요구하거나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도 생각보다 잦다. 내가 잦다고 생각한 것은 ‘한 광주리’란 말 때문이다. 한 광주리면 많은 사과가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시인은 가을의 사과밭을 지나게 되었다. 사과밭의 사과나무 아래는 사과가 한 무더기 버려져 썩어가고 있었다. 시인은 그 광경을 보며 과일로서의 사과 앞에서 잘못을 빌 때의 사과를 떠올리며 그 둘을 뒤섞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둘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잦은 사과와 용서도 이 사과밭의 사과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러한 생각이 한편의 시로 엮여지기에 이른다. 이 시가 탄생하게 된 비밀은 나의 상상 속에선 그렇게 짐작이 되었다. 그것은 시인의 놀라움이기도 하다. 누가 사과밭을 지나며 그 밭으로 사랑하는 사이의 다툼과 갈등을 끌여들여 둘의 사이를 돌아볼 수 있겠는가. 그건 시인이 아니면 아무도 못한다. 시인은 언어 생태계를 교란시키지만 그 교란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의 다툼과 갈등을 어느 비유에서보다 새롭고 기발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 살펴볼 시는 「발」이다. 「발」에선 「사과」와 달리 전혀 다른 두 개의 의미가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시가 어떻게 탄생되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상상력을 동원해야할 필요도 없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발은 있기 때문이다. 그 발은 모두 우리들 각자의 발이며 신체의 일부로서의 그 발이다. 수족처럼 부리다라는 말이 누군가를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경우를 뜻하듯이 우리는 대체로 발을 내 마음대로 부린다. 발이 스스로 생각하며 독립된 움직임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병록의 시 「발」에선 그런 일이 발생한다.
인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다니는 네발짐승 같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축 같다
소리 없이 나를 태우고 밥집에도 가고 상점에도 들른다 달리거나 한곳에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한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네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발」, 부분
우리는 두 발밖에 갖고 있지 않은데 그 두 발이 시 속에선 네 발의 짐승으로 독립을 한다. 왜 시인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삶은 종종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그 고통을 모두 감내하고 견딘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 “참을 만한 시간이 참기 어려운 밤”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시인은 우리가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가는지를 우리의 의지라는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우리는 고통에 순종하지 못하나 우리 몸 가운데 일부에서 그 고통을 감내하며 삶의 하중을 짊어져 주는 부분이 있어야 고통을 견디는 우리의 삶이 오히려 설명이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부분으로 시인의 눈에 띈 것이 바로 발이다. 우리가 스스로 삶의 고통을 이겨나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견디지 못할 때 우리 몸의 일부, 바로 발에서 그 고통을 감내하며 삶의 짐들 가운데서 가장 힘겨운 부분을 그 등에 나누어 짊어진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시를 읽고 나면 시인의 시각이 훨씬 더 삶에 대한 통찰력있는 설명으로 들린다. 「발」을 우리의 몸에서 독립시켜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중심축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이러한 시각은 「산다」에선 정반대의 양상으로 뒤바뀐다. 우리는 보통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바람직한 삶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병록은 「산다」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내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말은 한없이 자세를 낮추며 스스로를 비우려고 드는 말처럼 들렸다. 시인이 스스로를 비운 자리에는 “말할 수 없는 짐작의 세계를 닮아가는 일”이 들어선다. 그 짐작의 대상은 ‘당신’이다. 당신이 전부 괜찮은 것은 아니다. “당신의 말투로 인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당신의 말투로 다짐을 하면 쓸쓸해”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인은 당신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도 알고 있다. 이러한 삶이 어느 정도 걱정스럽다는 것을. “내 목소리를 잃어간다는 걱정, 알고 있습니다 기어이 실패하리라는 말, 틀리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시인의 우려스런 심정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당신을 거절하고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질 않다. 시인은 여전히 자신을 낮추고 비우려 한다. 아니, 단순히 비우려는 정도가 아니라 비우겠다는 의지까지 내비친다.
무덤이 죽음을 거부하지 않듯이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다」, 부분
어떻게 내가 죽어 사라지는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비울 수 있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대체로 나를 지키고 나만의 길을 걸어갈 때 그 의미가 더 빛난다. 그러나 반대일 때도 있다. 사랑할 때이다. 사랑할 때는 나를 내려놓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웠을 때 오히려 삶이 빛나는 역설이 발생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 목소리로 내 얘기를 당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내 “입술에서 당신의 억양을 발견”하는 일이다. 시인은 그것을 “지독한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독하다고 했을 것이며, 그 지독한 일이 아직 그에게 가능하여 ‘다행’이라고 했을 것이다. 사랑하며 「산다」는 건 바로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시 「모자」 또한 「발」과 비교가 된다. 「발」에서 우리 신체의 일부분이 삶의 고통을 감내하며 우리들의 삶을 업고 가는 등으로 분화한 반면 「모자」는 그 반대이다. 모자는 우리 신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때로 오래 같이한 물건은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시는 시인이 “친구 만나러 인천 가는 길”이란 것을 알려준다. 그런데 아마도 모자를 잃어버렸는가 보다. 시인이 “괜찮다고, 잃어버릴 때가 되었다고, 곧 나한테 어울리는 모자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고 스스로 위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모자에 대한 시인의 애착은 매우 깊다. 그 애착은 보통을 넘어선다.
인천의 친구가 모자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다
네 손이 어디에 슬그머니 두고 온 모양이지 잘됐어, 곧 어울리는 모자를 구할 수 있을 거야, 원한다면 내가 하나 사줄 수도 있어 모자한테도 잘된 일일지 몰라
그가 미워지고 모자를 잃어버린 사실도 미워지고 —「모자」, 부분
내게 친구의 말은 위로로 들린다. 그런데도 시인은 친구가 미워졌다고 한다. 도대체 왜 미워진 것일까. 그건 모자가 시인에겐 모자가 아니라 몸의 일부인데 친구에게 있어선 그것이 그냥 모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몸의 일부를 잃어버렸을 때도 우리가 그런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시인은 “모자도 없이/인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을 모두 벗기고 싶”었다고 말한다. 때로 어떤 상실은 그 상실을 똑같이 겪지 않는한 이해가 되질 않는다. 유병록에게선 모자가 그렇다. 시 「이불」은 「모자」보다 양상이 더 확대된다. 모자처럼 신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불이 누군가를 완전히 대신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얘기로 보자면 그리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방 한쪽에 코끼리 한 마리가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무 말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위로도 타이름도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듯이, 널따란 귀로 얼굴을 가리고 —「이불」, 부분
상황은 짐작이 간다. 누군가 토라져서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마치 커다란 코끼리처럼 방 한쪽의 공간을 모두 차지하고는 누워 잠들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대방은 지금 침묵 시위 중이다. 함께 살다보면 이런 일이 발생할 때가 있다. 시인은 그 침묵 시위를 “이불처럼 커다란 귀를 덮고/코끼리는 잠을 잤다 방을 어지럽히거나 물건을 부수는 일도 없이, 간직한 이야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듯이”라고 말하며 받아들인다. 시의 마지막은 다행이 해피엔딩으로 짐작된다. 나는 시의 마지막 구절, “너는 떠났다/광목 이불 같은 귀를 베어서 머리를 두고 눕던 자리에 곱게 개어놓고”라는 대목을 상대방이 집을 나갔다는 말로 이해하지 않았다. 시인이 기다려주는 동안 상대방의 마음이 풀려 다시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으로 이해했다. 둘 사이에 갈등이 있으면 감정이 격해지기 쉽고 그러면 그러한 상황은 시적으로 녹여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유병록은 그러한 상황도 시의 언어 생태계에서 새롭게 구성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사실 그의 시 「이불」을 읽으며 나는 조금 킥킥 거리며 웃었다. 부부 싸움할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도 종종 부부 싸움이 벌어지면 시 속에서와 똑같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며칠 동안 침묵 시위를 벌이곤 하기 때문이다. 이불을 둘둘 감고 방의 한쪽 구석에 누워있는 것이 시인 자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앞으로는 그럴 때면 유병록의 시를 인쇄하여 상대방의 앞으로 슬쩍 디밀어 주며 며칠간 참아달라는 신호삼아 건네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때로 대책없는 인생 문제의 가장 현명한 답이기도 하다.
3 생명체들이 살아 있는 자연 생태계와 달리 우리의 언어 생태계는 완고하게 굳어 화석화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유병록의 시는 그 완고한 일반적 언어 생태계를 교란시켜 말들이 숨을 쉬는 살아있는 언어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사과라는 말 속에 과일로서의 사과와 잘못을 빌 때의 사과가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것은 그 생태계 교란의 가장 확실한 예이다. 정도는 약하지만 교란은 그의 어느 시에서나 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의 일부인 발이 스스로 생각하며 우리의 몸에서 독립을 한다. 내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 부족할 판에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며 나를 내려놓는 일도 벌어진다. 또 모자가 우리 몸의 일부가 되고, 우리들이 이불을 둘둘말고 토라지면 코끼리로 뒤바뀐다. 이런 교란은 시를 쉽게 읽을 수 없도록 방해하는 측면이 있지만 교란을 통하여 화석화되어 있던 언어 생태계가 새로운 생명을 얻어낸다는 긍정적 측면을 갖는다. 유병록은 이렇게 언어의 교란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일반적 언어 생태계에선 접할 수 있는 또다른 세상을 열고 있다. 그 세상은 일반적 언어 생태계보다 한결 깊이가 깊다. 시의 세상에서 교란은 혼란과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징조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징조를 감지할 때마다 시가 어렵다고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열릴 시의 세상에 들뜨며 새로운 언어 생태계로 더 자주 깊이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러면 시는 읽는 이들을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다. 물론 유병록도 그 점에선 예외가 없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6년 1, 2월호)
**대상 시의 원래 발표 지면은 다음과 같다. ―사과, 월간 『현대시』 2015년 6월호 ―발, 월간 『현대시』 2015년 6월호 ―산다, 『현대시학』 2015년 11월호 ―모자, 계간 『한국문학』 2015년 가을호 ―이불, 『현대시학』 2015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