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178호 왜 감독들은 반복적인 훈련을 시킬까 (눅14:16~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 교회는 항상 사회자가 이렇게 기도하고 예배를 시작합니다. 왜냐? 예배란 ‘예도 예(禮)와 절 배(拜)’로 이루어져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춘다’는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 온전한 예배입니다. 예배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드려야 합니다(신6:5).
여러분,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셨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안 받는 예배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예배를 안 받으실까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11:4). 아벨은 믿음으로,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렸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곧 형식적인 예배, 가증한 예배는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행사가 아니고 이벤트도 아닙니다. 예배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는 안식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출31:13~14). 하나님은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을 하고, 제 칠일은 거룩한 날이므로 온전히 예배하라고 당부하셨고,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면 죽인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대통령을 만난다는 가정을 해봅시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시죠? 그러면 아마도 며칠 전부터 때 빼고 광내고 야단법석을 떨 것이고, 예의상 아무 옷이나 못 입는다고 땡빚을 내서라도 옷도 한 벌 장만할 겁니다. 당일에는 서둘러 약속 장소에 도착할 것이고, 가서는 행여 뭔가 실수하지 않을까, 대통령과 눈 한 번 맞춰볼까 예의를 갖추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말을 경청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는 어찌합니까? 입던 옷 대충 입고 예배가 시작되어서야 도착해서는 꾸벅꾸벅 졸다가 동냥하듯 헌금하고 축도도 끝나기 전에 서둘러 나가지 않습니까?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면서 늦게 도착한 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기도하고 있는 자들을 툭툭 치면서 인사나 하고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그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까요? No! 하나님은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말1:6~7).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 ‘그렇게 할 거면 오지 마라. 그런 예배 안 받는다. 너 아니라도 예배할 자는 많다.’는 겁니다.
여러분, 제사에 실패한 가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창4:12).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오래전에 제가 뇌출혈을 일으켜 눈이 거의 실명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왜 그랬냐 하면, 외국 집회 중에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복잡한 상황이었는데, 어느 목사가 일방적으로 예배를 잡아 놓고는 같이 가달라는 것입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던 저는 그에게 “내가 거기 예배드리러 온 줄 아느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그래도 잡아놓은 예배인지라 안 갈 수가 없어서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정말이지 대충 드렸습니다. 그날 밤 눈이 터졌습니다. 하나님께 한 방 얻어맞은 겁니다. 예배를 대충 드린 대가입니다. 깨달은 저는 그 후로는 한 명이 있든 열 명이 있든 예배에 최선을 다합니다.
여러분,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솔로몬 아닙니까?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진정과 신령으로 드렸습니다. 일천 번 중 한두 번쯤은 대충, 대강 드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일천 마리 소를 드리며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지혜와 부유가 넘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안에 거했던 이유도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에 들어올 때에 다윗이 자기의 몸이 드러날 정도로 여호와 앞에서 뛰고 춤추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내 미갈이 비웃었지만 다윗은 개의치 않고 여호와를 기쁘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옳으냐?’라고 물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1~24)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 장소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겉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신 것입니다(눅21:3).
주일에 끌려온 소처럼 어쩔 수 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아니면 놀러갈 계획 세워놓고 잠시 출석체크나 하러 오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헌금시간에 지갑을 열어 관람료 내듯 헌금하는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내 기분에 취해서 찬양하는 것 역시 찬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1:8).
에이브라함 링컨이 예배에 늦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켰더니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고, 록펠러가 예배는 제일 앞자리에서 드리라라는 어머니의 교훈을 받들더니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왜 고넬료가 이방인으로 최대의 복을 받았는지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끝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네요. 어느 주일, 조만식 장로가 급한 일로 손님을 만나다 예배 시간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조만식 장로가 예배당에 도착하여 막 신발장에 신발을 넣으려고 하는 순간, 주기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 조만식 장로는 신발을 든 채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 상태로 설교가 끝나고 주기철 목사님은 “장로님,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신발을 든 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큰 잘못을 했습니다. 사람 만나느라 하나님 전에 늦게 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주의 종에게 심려를 끼친 것을 용서해주시고, 장로로서 성도들에게 본이 되지 못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조만식 장로가 매주일 예배에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 번 늦은 겁니다. 조만식 장로 같은 분이 늦을 때에야 얼마나 황급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주기철 목사가 졸렬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예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삶의 중심축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나면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예배 위주의 삶을 살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 같이 비천한 것이 하나님의 존전에 나와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것, 그것이 최고의 은혜요, 기적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할렐루야.
예배에 성공해야 삶도 성공한다
하나님도 대접받는대로 우리를 대접하신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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