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哭)하지 말라(물곡,勿哭)” 짧고 굵게 살았던, 39세 선비의 유언,
“사이팔만(四夷八蠻) 오랑캐가 황제를 칭(稱)했는데, 유독 조선은 中國을 주인으로 섬겼으니, 그런 누방(陋邦)에서 죽은들 무슨 한(恨)
있으랴”
호방 풍류 협기의 장부(丈夫)문장가, 백호 임제(1549~1587), 자 자순(子順), 부친은 5도병마사 관력의
‘임진(林晋,1526~1587)’, 외손자는 영의정 '허목'. 평소 ‘사육신, 생육신’ 절의를 흠모했고, 山僧들과 친했으며, ‘죽은
기생(황진이), 산 기생(한우)’과 사연도 전한다. 그 ‘임제’가 장흥 방문詩를 남겼다. “5년 만에 다시 모여(五年重作)”라 말했으니, 최소
두번은 長興에 왔을 터. 그 무렵 長興선비들, 김경추(1520~1612),백광훈(1537~15823), 정경달(1542~1602),
문위지(1532~1610), 문희개(1550~1610)와 인연이 <옥봉집, 반곡집, 백호집>에서 확인된다. 그 ‘임제’ 일생을 디딤돌
삼아 그 시절 장흥 연관사정을 되살려본다.
23세(1571)때 모친상(喪)에는 해남에 우거하던, 장흥출신 ‘백광훈(1564년
진사)’이 <병사(兵使) 林晋부인 만시>를 썼다. 27세(1575), 나주 영암 등 산천유람을 했고, 남도 순무어사의 군막에
출입했으나, 장흥에는 오지 않았다. 28세(1576), 소과 양시(진사, 생원)에 입격했는데, 진사시 동방이 '문희개'이다. 29세(1577),
대과에 급제했고, 제주목사 부친께 근친(謹親)하러 11월에 ‘어사花, 검(劍),거문고’를 들고 강진 남당포를 출발하였다.
다음해
2월에 하직하고 제주를 떠나 3월에 남원 광한루에 이르렀으니, 혹 그 중도에 장흥 땅을 들렸던 것 아닐까? 마침 진사시 동방 ‘문희개’의 고향이
된다. ‘임제, 백광훈’ 등 여러 선비들이 수창하던 광한루에 ‘백광훈’의 아들(백진남)도 배석했다. ‘백광훈’은 그에게 <차증(次贈)
林자순>을 준다. 34세(1582), 북쪽 고산도 찰방과 서도평사를 거쳐서, 이제 남쪽 해남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해
‘백광훈’이 타계하였고 ‘임제’는 <白옥봉 만사>에서 옥봉을 옥수(玉樹)에 자신을 백운(白雲)에 빗댔다. 35세(1583), 2월에
부친이 해남에서 가까운 長興부사로 부임할 때 역시 근친(謹親)했을 터이니, 그때 5년 만에 방문한 長興 땅에 이삼일 머물렀던 것 아닐까? 그해
‘임제’는 북쪽 평안도사로 옮겼다. 마침 평양서윤(庶尹)에 재직하던 장흥사람 ‘정경달’은 그에게 <차증(次贈) 林자순>을 주었고,
‘임제’는 <복침기도(伏枕箕都,평양에서 앓다가) 봉간(奉簡)서윤선생(庶尹先生)> 시문을 올렸다. 대동강 달놀이에 가겠다고 약속했다가,
감기 때문에 불참했던 모양이다. 37세(1585),고흥현감 등을 거쳐 ‘임제’는 드디어 관직생활을 마감했다. 39세(1587), 6월에
부친喪이, 8월에 본인喪이 있었다. 학(鶴)을 자처했으나, 그만 폐병이었다. 벼슬길은 현달하지 못했고, 주로 변방 한직(閑職)을 전전했다.
굽히는 성격이 아니라서 東西 붕당싸움에 초연했기 때문. 그 長興 방문詩 중에 특히 예양강 ‘청영정, 읍청정’에 관한 현장詩는 객관적 자료로서
소중하다.
- 詩,<가지寺>, 그는 ‘보림寺’ 대신에 “제일총림 가지寺”라 칭했다. - 詩,<청영정>,
“5년 중작(重作) 차한유(此閑遊), 5년만에 다시 여기서 한유(閑遊)한다.”라 했다. ‘문희개’의 부친 ‘백장(佰章) 문위천’의
정자였다. - 詩,<贈읍청정 주인>, ‘중장(仲章) 문위지’로 백장 문위천의 동생이다. - 詩,<贈관수정
주인>, ‘송정 김경추’로, 그 당대 장흥의 원로처사(處士)였다. 그 예양강변에는 <문씨중중기록>에 의하면,
문위천(1529~1573)의 ‘청영亭’, 문위지(1532~1610)의 ‘읍청亭’, 문위세(1534~1600, 叔章)의 ‘풍암정사’가
척령(할미새)지세로 정립(鼎立)하고 있었다. ‘임제’는 “형제들 정자가 척령원 東西에 있다”고 척령 우애를 칭송했다. 여기서 유념할 부분이
있다. ‘임제’는 詩<청영정>과 구별되는 또 다른 시, 그 詩題에 장소를 명기한 詩<용호(龍湖) 청영정>을 따로 남겼는데,
두 詩 분위기와 장소적 성격은 물론 다르다.
“龍湖 청영정”은 서울 한강 龍湖에 있었으며, 그 龍湖는 ‘남호 용산강’을 지칭한다.
‘옥봉 백광훈’의 <龍湖잡영>과 <청영정 사시詞>에 나온, 그 ‘龍湖, 청영정’ 역시 장흥 쪽이 아니다. 현재 장흥
부춘정의 용호바위 ‘龍湖’ 각자(刻字)는 이미 1582년에 타계한 옥봉 백광훈이 그 생전 당대에 13세 연하 조카벌 ‘문희개’에게 직접 써준
것은 아니고, 훗날 새겨졌을 것이다. 그 龍湖는 ‘문희개’의 호(號)도 아니며, ‘문희개’의 아들 ‘문익명’의 號이다. (별도 후술한다)
- 贈揖淸亭 主人 (읍청정 주인에게), 乃 淸暎主人弟 文萬戶也 (바로 ‘청영정 주인 문위천’의 동생,
‘문위지 만호’이다.)
弓馬無心出塞垣 궁마 타는 국경 출정에는 마음 비웠고 弟兄聊與樂具存 제형들과 더불어 이제는 다 평온해라 碧瀾珠箔東西岸 벽란 물결
주렴 구슬 양쪽에 마주보고 翠竹寒巖上下村 취죽 한암은 마을의 위아래에 있어라 半世幽期鷗鷺渚 반생 깊은 기약은 저 물새에
맡겨두고 一江淸興鶺鴒原 온 江 맑은 흥취는 할미새 나는 언덕에 他時倘借高亭宿 훗날 혹시 저 高亭에 하룻밤 묵게
되면 說盡閑愁到玉尊 온갖 시름을 풀며 옥주 술동을 비우리라.
<주>1) 鶺鴒飛原 兄弟急難(척령비원 형제급난), “들판에 있는 할미새가 바삐 날 듯, 형제는 위난을 급히 구하는도다.”
<시경(詩經>에 나온다. 2) 읍청정(揖淸亭) 주인 ‘문위지’는 ‘무반(武班)’이었다. 3) 100년후 무렵에 후손
'장육재 문덕구(1667~1718)'가 그 ‘읍청정’ 옛터를 찾아 詩, <망(望)읍청정 遺址>를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