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바둑사에 기성(棋聖)이라는 최상의 찬양을 받은 사람은 도책(道策: 도사쿠)과 수책(秀策: 슈사쿠),
그리고 오청원(吳淸源: 우칭위엔)등 세 사람뿐이다.
그중 수책은 어전대국(御前對局)에서 당시의 최강자를 상대로 17연승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책이 18세 소년이던 시절, 당시 바둑계의 거장인 정상인석(井上因碩: 이노우에 인세키)이라는 선배와
선(先)으로 바둑을 둔 적이 있었다. 그들의 바둑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 중에는 의사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대국이 진행되는 도중 밖으로 나가자 밖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승부가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정상 선생이 질 것 같다.”고 대답하였는데, 사실상 그는 바둑에 관한 한 초보자에 불과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얼마 뒤에 바둑은 정상의 패배,
수책의 승리로 결정되어 그의 예측은 적중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의사에게 어떻게 승부를 미리 알았는지 묻자 그가 말했다.
“수책이 127번째 수를 힘차게 두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정상 선생은 그 수를 한참 음미하였는데,
관찰해 보니 양쪽 귀가 점점 붉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의사다.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귀가 붉어진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심리적으로 동요하고 있다면 그 수는 예리한 수였을 것이고, 어쩌면 치명적인 수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예측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수책이 둔 127번째 수는 ‘귀가 빨개진 수(耳赤之手(이적지수))’라는 이름이 붙은,
바둑 역사상 매우 유명한 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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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이 왕자였을 때의 일이다.
그의 부왕인 필립 2세에게 어떤 말장수가 명마 한 필을 팔러왔다.
나중에 ‘부파켈러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말은 아주 훌륭해 보였으나 왕은 그 말을 사지 않았다.
왕이 말에 오르자 말은 사정없이 날뛰어 왕을 바닥에 떨뜨려 버렸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던 것이다.
“훈련이 안 된 이런 말은 소용없다! 빨리 끌고 나가라!”
그때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알렉산더가 그 말 주위를 돌며 중얼 거렸다.
“이런 명마를 돌려보내다니 아깝군!”
부왕이 그 말을 듣고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그럼 이 말을 너에게 주랴?”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른도 타지 못하는 이 말을 네가 탈 수 있겠느냐?”
“탈 수 있습니다.”
“그럼 한번 타보아라. 만일 타지 못한다면 어떤 벌을 받겠느냐?”
“이 말 값만큼 벌금을 내겠습니다.”
알렉산더는 곧 말 가까이에 다가갔다. 그는 먼저 말의 머리를 해가 떠 있는 쪽으로 돌려
말이 제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하고는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그러자 말은 순순히 알렉산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말이 제 그림자를 보고 흥분하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알렉산더의 나이는 불과 열두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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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효종(孝宗) 때 아주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산 중에서 네 사람이 죽어 있는 것을 관가에서 발견하였다.
그들 중 세 사람은 백 척이 넘는 절벽위에 죽어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절벽 위에 있는 나무에 목이 매달린 채 죽어 있었다.
그렇다면 세 사람과 한 사람은 패가 다르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경우 세 사람이나
한 사람 중 어느 편인가는 살아 있어야 마땅한데 모두 죽어 있는 것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 패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 번째 패가 두 패를 모두 죽였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럴 수도 없었던 것은 그들 곁에 돈보따리와 빈 병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세 패가 있었다면 살아 도망친 패거리가 돈보따리를 가져갔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에
이 가설도 인정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일은 하도 이상하여 효종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었다. 효종은 곰곰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모두 도둑들이다.
처음 세 놈이 패를 지었는데 한 놈이 그 패에 가담하였다. 세 놈은 도둑질을 하고 한 놈은 망을 보았고,
돈을 훔친 뒤 한 놈은 기회를 보아 세 놈을 죽이고 돈을 모두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 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 절벽에 이르렀을 때 세 놈은 일을 의논하기 위해
한 놈에게 주막에 가서 술을 사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한 놈이 주막으로 간 사이에 놈이 돌아오면
죽이기로 계책을 정하였다. 머지않아 주막에 간 놈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놈은 오는 동안에 술에다 극약을 타 두었다.
그러나 그놈이 도착하자 세 놈이 한 놈을 나무에 매달아 죽여 버렸다.
그를 죽인 세 놈은 주막에서 가져온 술을 마셨고, 결국 놈들도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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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인조(仁祖)의 둘째 아들로 왕자 시절 이름은 봉림대군(鳳林大君)이었다.
인조는 정묘호란 때 청나라에 굴복하여 왕으로서의 체면은 물론 자존심까지 구긴 임금이었다.
청군(淸軍)은 그때 인조의 큰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갔다.
후에 두 왕자가 귀국하게 되었을 때 청나라 임금은 두 왕자에게 무엇을 선물로 줄까를 물었다.
봉림대군은 자기와 함께 인질로 잡혀간 백성들을 귀국시켜 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얻었고,
소현세자는 청나라 임금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인 벼루를 달라고 하여 그것을 받아 귀국하였다.
이 일은 인조를 격노케 하였다. 그는 소현세자를 엄중히 꾸짖었다.
“이 못난 놈! 아비가 차마 견딜 수 없는 욕을 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너는 한 나라의 세자로서
겨우 벼루 따위나 받아가지고 왔더란 말이냐? 네가 그러고도 내 자식이고, 이 나라 세자일 수 있단 말이냐?”
인조는 벼루를 들어 소현세자를 내리쳤고, 그 때문에 소현세자는 죽었다.
이로써 볼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생각하는 바는 위혜왕과 제위왕의 경우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위혜왕이 야광주를 보물로 아는 데 비해 제위왕은 인재를 보물로 알았고,
소현세자가 옥돌로 만든 벼루를 보물로 아는 데 비해 봉림대군은 백성을 보물로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승리는 더 깊은 생각을 가진 쪽이 차지하였다. 위혜왕은 제위왕 에게 번번이 패하였고,
봉림대군은 동생으로서 결국 왕위를 이어받아 효종이 되었다.
왕이 된 뒤에도 효종은 아버지와 민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벌을 도모하였고,
그의 이런 깊은 생각은 아리송하던 사건을 판결하는 데서도 잘 나타났던 것이다.
-《리더의 아침을 여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