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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맹세라도 실제가 되려면
마가복음 14:27~31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는 만찬을 나누신 후 일어난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이 사건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예수님이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서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 주는 행위는 하인 중에 가장 낮은 자가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낮은 종의 신분으로 행한 이유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현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에게는 믿음을 잊어버리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버리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 베풀어 주신 사랑을 외면하고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에 대하여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슥 13:7절에 기록된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분명하게 예언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기록된 바’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 이뤄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모순을 통과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실망하여 갈릴리로 떠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확실한 사랑의 표현을 위하여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 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로 미루어 하나님의 사랑이란 죽음과 살아남의 과정을 통하여 내게서 드러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아나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실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실현하기 위한 세 가지 과정을 말씀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헛된 맹세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질 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더불어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의 반응이 막 14:29에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는 확고한 결심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였고 그의 결단은 확고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마 26:33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그의 말에 ‘결코’라는 단어를 넣어서 말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결단하면 반드시 지킬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결의에 찬 모습에 막 14: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밤을 네 등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저녁 여섯 시에서 아홉시 사이의 저물 때입니다. 둘째, 저녁 아홉 시부터 자정 사이의 밤중입니다. 셋째, 자정에서 오전 세 시 사이의 닭 울 때입니다. 넷째, 오전 세 시부터 여섯 시 사이의 새벽입니다.
자정에서 오전 세 시 사이에 수탉들이 웁니다. 예수님은 수탉이 두 번 울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반박하는 모습으로 막 14: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말하자“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이렇듯 힘있게 말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날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힘있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결단과 각오 그리고 맹세가 헛된 것이라 착각하여 아예 마음에 어떤 것도 다짐하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태복음 5:33-37에 기록되었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맹세는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법정이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맹세에 대하여 영어로 ‘vow’와 ‘oath’를 모두 맹세로 병행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단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보통 맹세는 Oath라고 한다면 서원은 Vow라고 말합니다.
그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맹세가 일방적이라면 서원은 조건부란 겁니다. 맹세가 ‘무엇을 하기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혹은 ‘난 절대로 그런 적이 없음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이라면 서원은 상호조건부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먼저 A를 해주신다면 제가 B를 하겠습니다’고 맹세하는 겁니다.
성경은 또한 서원을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신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면 누군가의 강요도 아니요, 어떤 의무나 책임 때문도 아닌, 자원해서 하나님께 조건부 맹세를 한 것이고 하나님이 그 요구사항을 충족하셨기에 나머지 부분을 이행하는 것에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서원과 맹세는 반드시 성취됨을 말씀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너무나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워 예수님을 떠나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귀향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찾아오셨고, 이른 새벽에 밤새 그물을 바다에 던졌지만 허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생선과 떡으로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하시면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예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들어찬 후에 베드로의 헛된 맹세는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복음을 증거로 제시하다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달릴 수 없다고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는 고백과 맹세가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을 때 헛된 맹세가 실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구약의 예언 말씀을 들어 이 세상의 모든 사역을 십자가로 종지부 찍고 이로 인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가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치리니’의 원형은 헬라어 ‘파탓소 πατάσσω’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때리다, 치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행 7:24절에서는 ‘쳐 죽이는 것’으로 표현하였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에 대한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이시라도 이 세상을 떠나실 때는 오직 당신 홀로 남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이 자리에 아무도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세상에 살다가 떠나는 날이 오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옵니다.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셨습니다.
이런 영적 원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죽음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내가 죽어도 살 수 있음을 믿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실현할 수 있습니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만 죽임에 넘겨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게 될 때 징계의 과정을 겪습니다. 이 징계는 알 수 없는 고난을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하여 충성하였는데 몹쓸 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분이 있습니다. 밤낮 구하고 절규하였지만, 병은 떠나지 않고 더욱 심하게 아픔을 더할 뿐입니다. 게다가 병원비마저 없어 앞길에 먹장구름이 덮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징계요 채찍질입니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긴 어둠의 터널을 참고 견디며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처럼 성도의 고난에서 반드시 건져 올리실 것입니다.
성도의 고난에서 살림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내 온 인격을 통하여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안에 흐르게 될 때 내가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였던 모든 말들이 실현화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 고백하며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하시고 늙어 죽을 때까지 주님의 일을 하다가 하나님께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입니다. 내 힘으로 지킬 수 없는 헛된 맹세요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흘러들어와 요동칠 때 이 고백은 반드시 성취할 것을 믿습니다.
세 번째 나의 약함을 인식할 때 헛된 맹세라도 실제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예수님께 자기의 두드러진 믿음과 결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의지가 약하여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릅니다. 나는 의리도 있고 결단한 것에 대하여 굳건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결단과 끈기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강하다고 느끼고 그렇게 인정할 때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빌미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25절에서 강한 것이 반드시 강한 것이 아니고, 약한 것이 반드시 약한 것이 아니라는 역설을 보여줬습니다. 고대 지중해 연안의 세계인들은 가장 강한 짐승의 상징으로 양을 꼽았고, 동시에 가장 순하고 약한 짐승으로 양을 꼽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라는 역설을 보게 됩니다. 그 역설이 바로 기독교 사상과 구원교리의 핵심입니다. 복음서에서 세상의 구세주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묘사한 것이나 그리스도인들을 어린양으로 묘사한 것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예배와 경배의 대상인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지만, 동시에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어린양이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가 된다는 사상이 기독교교리의 핵심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1-13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때는 자기의 강함을 드러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 번 부인하고 난 후에는 자기가 얼마나 역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약함을 깨닫고 주께 나가는 자세가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안아주시고 격려하시며 그분의 넘치는 사람을 부어 주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자신감에 차서 말했을 때는 어는 것 하나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감옥에 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매 맞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를 구할 때 성령으로 충만해지면서 기꺼이 주님을 위해 매를 맞았고 감옥에도 갔습니다. 나중에는 주님을 위해서 죽는 자리에 들어섰을 때도 즐거움으로 그것을 맞이 할 수 있었습니다.
약할 때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을 듣고 계십니다.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맹세 할 때가 있고, 서원 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 인정되어 실현화되는 배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실제화될 때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중에 십자가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깨어지고 부서지면서 나의 약함을 깨닫고 주님께 나가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헛된 맹세라도 실제가 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