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모성의 영성을 빚어내는 손
고진하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자연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다는 사실부터 꼽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공통점은 두 존재가 모두 시인에게는 자연스럽거나 진실한 생명체의 특징을 구현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각 작용을 집중적으로 활용하는 관찰의 시인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마음의 눈’을 강조하는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시인이기도 하다. 마음의 눈으로 그는 외부의 형상을 내부의 진실로 이끌어가는 시적 상상력과 주제 의식을 구현해 온 셈이다. 이런 상상력과 주제 의식을 나는 그의 두 번째 시집 해설의 제목으로 삼아 “견성(見性)의 시학”이라고 일컬은 바 있기도 하다.
시집의 서두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난 촉감의 신[Epaphus]처럼 흙 주무르기를 좋아한다네” 라고 밝힌 고진하 시인의 고백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고백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포함한 인간과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서 펼쳐 보인 ‘견성의 시학’과 조금 다른 시쓰기의 방법론을 제시해주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목차
[시인의 말] · 5
제1부
새벽 성전 · 13
고독이 사랑을 통과하면 · 14
황혼 · 16
영원의 빛깔 · 18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 · 20
변화의 간이역 · 22
20그램의 무심 · 25
현자(賢者) 양파 · 26
방죽 위의 성찬 · 28
비단풀 · 30
부고 한 닢 툭, · 32
낭보 · 34
직지사 꽃무릇 · 36
올빼미 학교 · 38
만물의 자궁, 진흙이여 · 40
꾸지뽕나무의 말씀 · 42
수묵화 · 43
제2부
야생 수업 · 47
칼칼한 왕붓 문장 · 48
불편당 · 50
좁쌀영감 · 52
가을걷이 · 54
반계리 은행나무 · 55
터미네이터 수박 · 58
똥장군 · 60
구멍수에 대하여 · 62
침묵의 봄을 견딜 수 없어 · 64
토종 씨앗이 왔어 · 66
아버지의 워낭소리 · 68
잰걸음의 봄날 · 70
오래된 별의 청춘 · 72
분재농원 · 74
느티나무 신방 · 76
저자 소개
저 : 고진하
강원도 원주 명봉산 기슭에 귀농 귀촌한 그는 불편도 불행도 즐기자는 뜻으로 ‘불편당(不便堂)’이라는 당호를 붙인 낡은 한옥에서 살고 있다. ‘흔한 것이 귀하다’는 삶의 화두를 말로만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야생초의 소중함에 눈떠 새로운 요리 실험을 즐기는 아내와 함께 잡초를 뜯어 먹고 살아간다. 야생에서 먹을 수 있는 풀을 찾아내는 기쁨을 누리며, 거친 야생의 풀들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겸허와 공생의 지혜를 배운다. 낮에는 낡은 한옥을 수리하고 텃밭을 가꾸며, 밤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하여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거룩한 낭비』 『명랑의 둘레』 『야생의 위로』 등의 시집과 『시 읽어주는 예수』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잡초 치유 밥상』 등의 산문집을 냈다.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박인환상 등을 수상했다.
책 속으로
숱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도
그 꼬리 어디서도
시(詩) 한 잎 발아하는 일은 드물지
그래서
자르고 또 잘라도
거듭 돋아나는
도마뱀 꼬리 같은 생각의 손에
괭이 한 자루 쥐어 주고
봄볕 아른거리는 텃밭으로 내몰았지
너 구슬땀 좀 흘려봐
네 괭이질에 토막토막 잘린 채
꿈틀대는 지렁이들과 입맞춰 봐
네 눈에 보이잖는 땅 속
미생물들과 으밀아밀 통화해 봐
생각의 폭풍이 좀 잦아들 거야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야
텃밭 가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꾸지뽕나무의 말없는 말씀이야
---「꾸지뽕나무의 말씀」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난 촉감의 신[Epaphus]처럼
흙 주무르기를 좋아한다네.
꿈도 밥도 사랑도, 느린 내
시의 보폭도 궁극에는 흙으로 수렴되는 것.
세상은 “대지에서 그 시적인 영혼을 떼어버린”(헨리 베스톤)
인간들로 진동한동 붐비지만
야생의 흙길을 맨발로 걸으며
흙에서 나고 자라는 식물들과 깊이 사귀는 동안
시적 감흥과 지혜의 희색(喜色)이 넘쳐 흐르는 순간도 있네.
흙이여, 시여, 고맙다.
2023년 10월
원주 명봉산 자락에서
고 진 하
추천평
거인의 어깨와 난쟁이
흙 주무르기를 좋아하는 손 이번 시집의 강력한 주제로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마음과 몸의 경계일 수도 있다. 책을 읽고 말씀을 전하고 시를 쓰는 인간에게 가장 집중적으로 사용되는 도구는 생각이나 마음일 것이다. 고진하 시인의 시쓰기가 꾸준하게 ‘견성의 시학’을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생각이나 마음은 가장 소중하며 유용한 시쓰기의 밑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생각이나 마음이 덫이 되거나 올무로 작용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바로 그럴 때 다음과 같은 해결책이 떠오르는 법이기도 하다.
- 이경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