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칼이나 원자력은 중립적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 인간에 따라 무기도 되고 유용한 도구와 에너지 원이 될수 있다고 알고 있다. 시간과 돈도 동일하게 중립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과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이 성공한 인생을 사느냐 아니면 실패한 인생을 사느냐에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공감과 성욕은 어떨까? 좀 쌩뚱 맞기도 한 질문이다. 두개의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 또한 그 자체가 선이고 악이라 단정지을 수 없는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공감은 인류가 지금까지 역사의 흐름속에 살아 오면서 발전해 올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이다. 인간은 공감을 기반으로 상호 협력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 즉 타인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축하하고 함께 아파하며 반응하고 이해하는 감정을 통해 인류는 오늘날 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공감능력으로 인류는 사랑을 전파하고 위대한 일을 해 낼수 있었다. 한편, 인간의 뇌는 분석하는 능력과 함께 공감하는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과학과 철학등 논리적인 분석능력이 중요하게 생각되었지만 사회가 각박할 수록 인간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것이 중요시 되고 있다. 하지만 공감이란 것은 그냥 좋은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공감하기위해 상대방의 기분, 상태, 느낌이 그대로 수용하다보면 피해의식, 감정폭팔, 상대방에 대한 증오감과 악마화, 폭력성, 소외의식, 편가르기등이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나에게도 이입되어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감이 광기의 폭주기관차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무작정 감정이입은 건전한 관계를 깨트리고 피로감을 주며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무너트리고 감사와 기쁨을 거둬가고 대신 불평과 불만으로 채워지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성적인 욕망은 인간이 자식을 낳아 생존하고 인류를 지구위에 보존시켜 온,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성욕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잠언서 5:15 에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말씀하신다. 또한 네 샘물을 집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성욕에 대해서 분명한 통제와 관리가 있어야 함을 의미하며 이는 곧 사랑하는 아내를 즐거워 하며 기뻐하고 만족하고 성욕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 다윗처럼 밧세바를 범하거나 솔로몬 처럼 이방여인들을 품어 우상숭배에 빠지거나 하게 됨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가서 8장에는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느니라. 통제되지 않은 성욕은 폭팔성이 있다. 죽음을 부른다. 성욕을 잘못 활용하면 소유욕에 사로잡히고 질투하고 폭력으로 나아가게 되고 죽음으로 귀결된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이후 그 집안에는 죽음이 찾아와 아들들이 죽게 되었고 우리아라는 충신도 죽게 되었다. 사랑은 희생이 따른다. 사랑은 전부를 주고 전부를 받는다. 첫사랑은 날마다 뜨겁다. 날마다 새롭다. 사랑이 없는 성욕은 짐승과 다름없다.
공감과 성욕은 야생마와 같아 길들이지 않으면 잘못 올라탔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게 된다. 우리는 공감을 느낄 때, 혹은 성욕을 느낄 때 이들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하는 지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가지 에너지의 크기와 방향이 하나님의 뜻, 곧 사랑으로 이끄는지 아니면 피해의식, 증오, 악마화, 우덜식 편가르기로 끌고 가려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지 분별하고 공감과 성욕의 곱삐를 잡아 당겨 그 방향을 주님이 원하시는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그 방향을 인도하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