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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
1)김 윤 규*
Ⅰ. 논술할 문제
Ⅱ. 의성과 의성김씨의 유래
Ⅱ.1 의성 지역의 역사와 현황
Ⅱ.2 김씨의 현황과 의성김씨
Ⅱ.3 의성김씨의 유래와 현황
Ⅲ. 오토산 진민사 사적
Ⅲ.1 오토산 묘소 사적
Ⅲ.2 오토재 사적
Ⅲ.3 진민사 사적
Ⅳ. 오토산 진민사 사적의 문화적 가치
국문초록
의성의 읍민들과 의성김씨 문중에서 오랫동안 향사하고 기념하던 오토산
진민사의 문헌들이 일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는 이 문서들이 가진 역사
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문서가 생산된 오토산과 진민사의
문화유적이 중요한 민족문화의 일부임을 확인한 일이다.
의성김씨는 시조 金錫의 후손으로 그 중 대부분이 고려태자첨사 金龍庇의
후손이다.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한국의 중요한 성씨 중 하나로 국가적 사명을
담당했으며, 지금도 3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큰 씨족이다. 이들의 조상인 김용
비는 고려시대에 의성읍의 사람들에게 큰 공덕을 끼쳐 지역민들이 사당을 지
어 향사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록된 수백년의 제
* 한동대학교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 kimyk@handong.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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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록은 잘 해석되고 설명되어 민족문화유산으로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오토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는 지질시대의 유적인 공룡화석산지로부
터 신라 이전시기인 조문국 유적과 신라시대의 탑리오층석탑 유적 등이 있
고, 조선시대의 선비문화를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는 유서깊은 마을들이
있다. 이 중에 고려시대의 오토산 유적을 연결하면 한국사 전 시기의 중요한
역사와 유적을 연계하여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는 유적지구가 될 것이다.
오토산 지역은 “역사문화유적지구”로 지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지역
의 지질시대 유적은 이미 전국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고, 삼국시대 전후의 국
가발생 유적도 보기 드문 특징을 가지고 발견되고 연구되었으며, 신라 후기
최고의 유적 중 하나인 탑리 오층석탑은 국보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있다. 조
선시대에는 명문가의 학자들이 근처에서 생장했으며 조선의 위기와 일제 강
점기에는 수많은 의병들과 우국지사의 활동이 있었던 지역이다. 일련의 역사
시기 중에 흠결이 되었던 고려시대의 유적으로 오토산 묘소와 진민사 사적
이 조명됨으로써 모든 시기가 일관된 역사유적으로 설명될 수 있도록 완성
되었다. 이제 필요한 노력은, 산재한 이야기들과 유적들을 서로 연계된 이야기의
틀로 연결하는 일이다. 선대의 삶과 노력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
는지를 설명하고 공감하게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주제어 ------------------------------------------------------------------------------------ 의성, 의성김씨, 오토산, 진민사, 김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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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논술할 문제
경상북도 의성군에 있는 五土山 鎭民祠에 보관된 문서들이 경상북도 문화
재자료로 지정되었다.1) 이 지정을 통해 이 문서들은 개별 문중의 역사자료
에서 지역사, 민족사의 자료로 가치의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이에 여러 연
구자들이 오토산 진민사 문서의 성격과 가치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들 연구의 기본적인 확인사항으로 먼저 이 문서가
생성된 배경으로서의 의성지역과 의성김씨 및 오토산 진민사의 사적에 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문서들의 대부분은 이 지역의 한 유력한
가문에 의해 조성되고 유지된 묘소와 재사에서 생산한 문서이며, 또한 주민
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하여 한 유력한 지역문중에 의해 여러 세기동안 전승
유지된 祠宇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문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서를 생산한 지역인 의성과 문중인 의성김씨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런 이해가 이 문서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며, 나아
가 이 문서들이 표현하고 있는 문화적 역사적 자산에 대한 활용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 검토하려는 것은 의성지역의 역사적 유래와 문화적 배경, 의
성김씨의 유래와 현황, 오토산 진민사의 역사와 현황 등이다. 이 논문에서
설명할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확인되었거나 기록된 사실이며, 의문이 있거나
이견이 제기될 부분에 대해서는 이를 소개해 둠으로써 지속적인 연구의 소
재로 삼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자 한다. 많은 부분이 기존의 자료에 기대고
있으므로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나 진전된 논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점이 이
1) “…… 이들 문서는 조선 중기부터 근현대까지 작성된 것으로 가장 이른 것은 16세기
후반의 기록이다. 사우의 제향, 재산관리, 문중 문화 등과 관련하여 문화적 전통을 살
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문서 특징은 시기적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기록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가 있으며, 한 문중에서 장기간에 걸쳐 향사와 문중 관련
문서를 수장해 온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따라서 진민사 소장 고문서 133점을
일괄하여 문화재자료 지정대상으로 선정한다.”(경상북도보 제6070호, 2016.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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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기존 일반 자료들 중에서 오토산 진민
사 문서를 생산한 배경에 집중하여 자료를 수합하고 정리하는 정도의 의미
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자료정리와 해석이 지금까지 진행되
지 못했으므로, 이런 정도의 노력이라도 해 두는 것이 다음에 이어질 연구와
활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수행한 연구이다. 유의한 것은,
지역사 또는 문중사에 대한 연구는 이미 다양하고 풍부하게
진행되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객관적이지 않은 결론에 도달하거나 논리적
결함을 가진 논의가 있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를 감안하여, 이 연구에서는
논증 가능한 자료를 중심으로 하여 의성 지역과 오토산 진민사 사적과 문서
의 성격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또한, 이 문서와 이를 생산한 오토산 진민사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궁극적으로 이 지역이 문화를 어떻게 재생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제안
을 개진하고자 한다. 수백년의 문화적 전통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
적 의미의 문화망을 구성하고 지속적으로 지역 문화가 재생산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오토산 진민사 지역을 역사유적지구로 정비하는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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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의성과 의성김씨의 유래
1. 의성 지역의 유래와 현황
義城은 경상북도에 속한 郡의 이름이다. 현재는 1읍 17면을 가진 하나의
행정단위인 군으로 되어 있지만 역사적 유래는 좀 더 복잡하다.
의성은 현재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대에 다양한 공룡이 서식했던 유적지
로 알려져 있어2) 지질시대에도 좋은 환경이었음을 짐작하게 하거니와, 가까
운 과거에도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형과 기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
려져 있다. 義城郡誌3)에 의하면, 의성 지역에서 유적이 발견된 가장 오래
된 흔적은 대체로 3천 년 전인 청동기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점곡, 금성, 봉양 등지에 고인돌이 축조되었고, 옥산, 금성, 봉양, 안계, 다인 등지에 선돌
이 세워졌다. 지금까지의 기록은 이를 근거로 이 지역에 큰 세력규모를 가진
부족 집단이 광범하게 거주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 시기 이 지역
에 거주한 집단의 성격이나 문화적 특징은 아직 세밀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의성지역이 역사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시기는 신라 초기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三國史記에 召文國4)이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 최초이다.5)
이 기록에 의하면 조문국이 신라에 정벌된 것은 서기 185년에 해당된다.6)
조문국의 중심 위치는 현재의 금성면 대리리인 것으로 보이며, 2015년 조사
2) 의성조문국박물관, 義城, 2014. 12~19면
3) 의성군지편찬위원회, 義城郡誌, 1998. 이하 별도의 각주가 없는 의성군에 대한 역사
자료는 이 군지를 따른다. 4) 이 국명을 한글로 적을 때에 ‘조문국’이라 할 것인지 ‘소문국’이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다. 논의의 경과와 대체적인 결론에 대해서는 의성조문국박물관 한국고대사
탐구학회, 조문국의 지배세력과 친족집단, 2014. 87~90면을 참조한다. 5) 三國史記 卷二 新羅本紀 第二 伐休尼師今,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二月 拜波
珍飡 仇道 一吉飡 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始於此」 6) 전덕재, “고대 의성지역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고찰”,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신라문화 39, 2012. 8면 “3. 신라의 召文國 통제방식과 領域으로의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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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하면 傳 景德王陵을 포함하여 374기의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당시에
이 정도의 고분군을 남길 국력이라면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번영했
던 꽤 큰 규모의 정치체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근의 몇몇 고분군에 대
한 자료를 보건대 대리리 고분군을 중심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다수의
권력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의 의성군 단밀 단북 지역에는 또다른 부족국가인 難彌離彌凍國과 弁
辰彌離彌凍國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들 소국은 안계평야의 大堤池의 옛
이름인 彌基池를 중심으로 하여 米作 농사를 영위한 부족이었을 것으로 보
고 있다. 그 밖에 如湛國도 군위 가까운 의성 지역에 있었던 국가라는 설이
있다. 그 뒤 525년 상주에 沙伐州를 설치하였으며 그 관하에 阿尸村小京을 두었
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아시촌이 의성의 안계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의성은 신라시대에 중요한 지역거점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통일한 뒤 673년에 召文城(金城山城)이 축조되었으며 757년에 지
방행정기관 명칭을 한자로 개명하면서 聞韶郡이 설치되었다. 문소군 안에는
比屋縣(阿火屋縣), 安賢縣(阿尸兮縣), 單密縣(武冬彌知縣), 眞寶縣(漆巴火縣)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개국 초기부터 의성이 중요하게 기록되었다. 고려 태조의 통
일전쟁 시기인 923년 호족 洪術(金洪術)이 태조에게 귀부하여 견훤과 싸우
다가 929년 전사하였고, 태조가 이에 감동하여 문소군을 義城府로 바꾸었다
고 하였다. 의성부에는 安貞縣, 比屋縣, 單密縣, 多仁縣 등이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義城縣과 安貞縣이 독자적인 행정기관이었고 기타 영현이
있었으나 안정현이 比安縣이 되고 기타의 속현들이 面制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도 경계지역의 일부는 상주나 예천에 속하기도 했고 다시 의성에
속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현재의 의성 지역이 구획되어 있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지방행정제도가 조정되면서 비안군이 의성군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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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17개 면을 두었다가 1940년 의성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1읍 16면 체
제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과거의 읍면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1990년 신평면
에서 안사면이 분리되었으므로 현재와 같은 1읍 17면이 완성되었다.
현재 의성의 면적은 1,176.6㎢로, 전 국토(99,060.58㎢)의 1.19%에 해당
된다. 현재 의성의 인구 51,021명으로 전국 인구(51,069,375명)의 0.10%에 해
당된다. 의성 지역을 本貫으로 하는 성씨는 원래 金, 蔣, 丁, 具, 朴씨 등이 있다고
했다.7) 그 뒤 인구이동을 거쳐 조선시대에는 의성지역 본관 성씨가 수십 종
이 있었다.
이들은 의성의 金, 沈, 洪씨와, 안정의 羅, 吳, 林씨, 비안의 孫, 鄭씨, 다인의
陸, 張, 崔, 黃씨 등이었다.8) 그러나 소수 씨족은 다수 본관으
로 편입해 가거나 후손이 단절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의성을 본관으로 하는
유입성씨들의 소수 인구만이 집계되어 있다.
현재 가진 자료는 통계청에서 조사한 것인데, 본인이 진술하는 대로 집계한
것이므로, 계보적 검토를 거친 것이 아니다. 의성의 현재 지명을 본관으로 한
경우와 옛 지명을 본관으로 한 경우를 모두 조사했으나, 한자가 병기되어 있
지 않아서 ‘금성’이나 ‘단성’ 등은 다른 지방과 혼동의 여지가 있으므로 제외
했다. ‘신평’도 李, 朴, 林, 張씨 등에서 본관으로 나타나는데, 충청남도 당진
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와 의성 신평면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를 구분할 수 없
으므로 제외하고 보아야 한다.
그 결과 ‘의성’ 본관은 金, 盧, 馬, 朴, 孫, 李, 林, 丁씨 등이 있고 ‘안정’은 羅씨, ‘
병산’은 朴씨, ‘비안’은 朴, 孫씨, ‘단산’은
張, 鄭씨 등이 있다.(별표 1. 의성을 본관으로 하는 전국의 인구)
이 통계에 의하면, 과거 의성의 옛이름이나 지역명을 따라 ‘문소’, ‘안정’,
7) 義城郡誌 1310면
8) 의성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1760년대에 17본관이 있었으나, 1997년 조사에
의하면 의성김씨, 문소김씨, 비안박씨, 병산손씨, 의성이씨, 의성임씨 정도만 있는 것
으로 나타나 있다. (義城郡誌 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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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 ‘비안’, ‘다인’, ‘단밀’, ‘병산’ 등으로 쓰이던 본관들이 대부분 소멸되
거나 ‘의성’으로 통일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義城郡誌에 기록되
지 않았던 의성곽씨, 의성구씨, 의성권씨 등이 다수 새롭게 집계되었다. 이러
한 성씨들에 속한 것으로 파악된 인구는 100명 미만이 많고 심지어 5명 가
량인 경우도 많았다.
만성보나 백과사전에도 거의 등재되지 않은 이런 성씨가 조사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관지 또는 집성지에서 고립된 일부 거주자들이 현
재의 거주지나 본적지를 본관으로 등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현재 의성을 본관으로 가진 성씨 중에서는 의성金씨, 문소金씨, 안정
羅씨, 비안朴씨, 의성丁씨 정도가 1천 명 이상의 규모를 유지하면서 계승되
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중에서도 문소김씨를 포함한 의성김씨가
295,793명이므로, 의성김씨는 의성을 본관으로 하는 대표 성씨이며 의성에
대해 본향의식을 가진 가장 큰 성관 집단이다. 2. 김씨의 현황과 의성김씨
현재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남한의 전 국민이 성씨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조선 후기까지는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나, 조선 말기에 신
분제도와 문중의식이 흐려지면서 거의 모든 국민이 본토 유래나 중국 유래
등의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에 전 국민이 호적을 갖게
되면서 의무적으로 성씨를 등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역사를 거
슬러 자신의 성씨를 찾기도 했고, 투탁이나 날조에 의해 성씨에 편입하기도
했다. 그 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오면서 일부 일본 유래의 성씨도 유입되었으나
해방 이후 거의 소멸되어 현재 통계로 보아서는 武本씨 6명, 藤井씨 5명 정
도가 남아 있고, 최근에 결혼이나 이민 등의 사유로 신생 성씨가 발생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 남한에서 인구 5인 이상으로 통계에 잡히는 성씨는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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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있다. 성씨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 것은, 새로 발생하거나 발견된 성씨
로 인한 것도 있겠지만, 나[羅]-라[羅], 유[柳]-류[柳]씨가 별도의 성씨로
잡혀 있기도 하고, 南宮-南宫씨처럼 사실상 같은 글자를 따로 잡은 경우도
있고, 柳-㧕씨, 諸葛-諸曷-諸渴씨처럼 誤記를 별도의 성씨로 취급한 경우 때
문이기도 하다. 현재 남한의 성씨 중에 1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성씨는 金씨 1성이
며, 인구 1백만 명 이상이 金李朴崔鄭姜趙尹씨 8성, 인구 10만 명 이상이
54성, 인구 1만 명 이상이 112성이 있다. 인구가 희소한 성씨로 인구 1천
명 미만이 378성이며 그 중에서 1백 명 미만이 299성, 10명 미만도 129성
이나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김씨는 10,689,959 명으로 단연 최다수를 차지하고 있
다. 이는 전 국민의 21.51%에 해당되는 인구로, 5분의 1이 넘는 비중을 차
지하고 있다. 2015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김씨는 1,000개가 넘는 많은 본관
을 가지고 있다. 현재 5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김씨의 본관만도
1,011관이다. 이 자료는 신고자가 현재의 독음대로 자신의 본관을 신고하면 공공기관이
그 신고를 그대로 수록한 결과이기 때문에, 신고자가 오해나 무지로 誤記했
을 경우나 본관의 異稱을 별도의 본관으로 인식했을 경우에도 별도의 본관
으로 집계했으므로 본관의 숫자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金
(금, 김), 寧(녕, 령, 영), 陵(능, 릉), 尼(니, 이), 羅(나, 라), 樂(락, 악) 藍(남, 람), 靈(령, 영), 禮(례, 예)처럼 同字異音이 다르게 집계된 경우도 있고, 경주
-계림-월성, 완산-전주처럼 지명이 新舊異名일 경우 다르게 집계되어 있기
도 하다. 인구 5명 미만인 ‘기타’ 본관이 75,790명이 있는데도, 기계적인 통
계의 결과로 ‘불명’이 5명, ‘불상’이 569명이나 독립 본관처럼 잡혀 있다. 김씨는 크게 신라계와 가야계로 나뉘어 이해되고 있지만, 세부를 보면 귀화
계도 있고 賜姓계도 있는 등, 좀 더 다양한 형성과정을 가지고 있는 계열도
있다. 최근에는 전 세계에 진출한 김씨들도 많고 이입하여 김씨가 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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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많은데, 대부분은 기존의 본관을 따르고 있지만, 일부는 별도의 본관을 창
설하기도 해서, 8명의 ‘월남김씨’와 6명의 ‘일본김씨’가 통계에 잡혀 있다.
김씨의 각 본관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것은 4,456,700명의 김해김씨이
며, 10만 명 이상은 10본관, 1만 명 이상은 48본관, 1천명 이상은 111본관
이다. 소수 본관으로, 1백 명 미만의 인구를 가진 본관은 735본관이고 그
중에서 인구 10명 미만인 본관은 270본관이다.
그런데 이 통계도 단순히 주민이 신고한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동일 본관에 속하면서도 발음대로 쓰던 습관으로 다르게 집계한 예가 많이
발견된다. ‘강능’과 ‘강릉’, ‘금녕’과 ‘금령’과 ‘금영’, ‘김녕’과 ‘김령’과 ‘김영’,
‘부녕’과 ‘부령’과 ‘부영’, ‘함녕’과 ‘함영’ 등이 다 따로 잡혀 있는 경우가 그
것이다. 또, 많은 경우에 古今異名의 지명을 별도의 본관처럼 신고하여 집계
된 예도 많다. ‘경주’와 ‘월성’, ‘상산’과 ‘상주’, ‘선산’과 ‘일선’, ‘예안’과 ‘선
성’ 등은 동일한 본관을 다르게 집계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삼섭김씨’의
경우는 ‘삼척’의 ‘三陟’을 ‘三涉’으로 오기하여 발생한 것을 세습한 듯하며,
연유를 짐작하기 어려운 본관도 더러 있다.
그 중에서 ‘의성’과 ‘문소’의 경우는 연유가 명확한 편이다. 聞韶는 義城의
옛 이름이며 오랫동안 혼용해 오던 것인데, 근간에는 거의 ‘의성’으로 일치하
여 287,469명이 의성김씨로 신고했지만, 아직도 8,324명이 ‘문소’를 본관으
로 쓰고 있음이 통계상 나타났다. 현재의 문소김씨에 대해 검토한 결과9), 이
들은 金錫의 현손인 金景珍의 아우 金景琰의 5대손 金成丹의 후손들10)로 일
시적으로 계보를 잃었다가 회복된11) 義隱公 金成丹系 潛江公派 등 일부인
9) 현재 호적상 문소김씨로 등재된 사람과 면담하고 그들의 파보를 검토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의성김씨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파보의 명칭도 義城金氏世譜라고 하고 내부
명칭은 「義隱公派譜」라고 하였다. 다만 호적을 정리할 때 문소김씨로 등록했기 때문
에 그 후손은 모두 통계상 문소김씨로 잡히고 있다. 1
0) 累經兵燹 文獻無徵 以上世系 未得詳焉 故辛酉譜 以府君爲始修譜矣 今考新羅璿源譜
新羅世譜 源流錄 高麗世家 乃正焉(金成丹 譜註, 義城金氏大同譜 1992, 1권 13~1
4면)
11) 贊成公諱成丹 以門下侍郞 諱國之玄孫 失系而不能共敦者 已經數等 而今有班班可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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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판단된다.12) 그러나 현재 정부 공식 통계상 문소김씨는 의성김씨와
별도로 집계되어 있으므로 전체적인 통계를 위해서는 의성김씨와 문소김씨
를 합산하여 보아야 한다.13)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이 문소김씨들은 의성김씨의 일부이며 이들을 포함
하면 현재 통계상 의성김씨는 295,793명이 되어 거의 30만 명에 이를 것이
다.(별표 2. 문소김씨와 의성김씨의 인구수와 분포)
3. 의성김씨의 유래와 현황
의성김씨는 신라 王姓인 金氏의 일파로 경순왕의 4자(혹은 5자) 金錫이
義城君으로 봉군되고부터 시작된 성씨라고 알려져 있다.14)
일반적으로 불리는 ‘의성 김씨’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義城君 金錫의 후손’이라는 것이며, 하나는 ‘(주로 고려 초까지) 의성
에 살고 있던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해되고 현재도 통용
되는 개념은 전자이다. 이에 대해서도 논의할 내용이 있지만 족보상으로는
별로 異論이 없다. 후자의 경우 즉, 의성에 토착한 김씨들에 대한 문제는 金洪術과 관련된 것
이다. 의성에서 의성김씨로 여겨지는 (金)洪術15)은 신라 말기에 眞寶의 호족
者(金柄洛, 第八次譜序, 義城金氏大同譜 1992. 1권 38면)
12) 金氏는 大輔公 諱 閼智로부터 시작하여 敬順王 諱 傅에 이르기까지 28世이고 敬順王
으로부터 義隱公 諱 成丹에 이르기까지 10世이다. 이상 同祖의 孫이 全國에 散在하
여 아직 譜를 合하지 못하였으니 다만 義城 주변에 사는 諸族을 義隱公으로써 中祖
로 起源하여 義隱公派譜라 稱한다.(義城金氏世譜 義隱公派譜 卷之一 1984. 서문)
13) 현재 문소김씨로 집계된 사람들은 1992년판 義城金氏大同譜 13권에 별도의 표시
없이 의성김씨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공공기록인 호적상으로는
문소김씨이고 족보상으로는 의성김씨이다.
14) 金氏 중에서 다른 본관의 경우에는 新羅계, 駕洛계, 賜姓계 등으로 동일 본관 내에
상이한 유래를 가진 계파가 있기도 하지만, 의성김씨는 현재 기록상 신라계로 정리
되어 있다.
15) 金洪術( ?~929)은 원래 신라 말 진보현眞寶縣의 촌주였다. 그는 眞寶 城主가 되었다
가 922년(태조 5) 11월에 왕건에게 귀부하였고 이후 聞韶郡으로 진출하여 義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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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왕건에게 귀부하여 의성에서 벌어진 고려 건국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고
려조정은 이를 매우 후대하였으며 의성 사람들은 그를 성황신으로 숭배하여
제사하였다.16) 그는 신라가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진보의 향리로 성주가 된
인물이므로,17)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한 뒤에 고려왕녀와 혼인하여 태어난
金錫보다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앞선 사람이며 현재의 의성김씨 계보에서 보
이는 金弘述(金洪術)과는 다른 사람이다. 현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洪術은
경순왕과 동년배의 사람일 것이며, 그러므로 경순왕의 아들인 金錫의 손자
김홍술과 동일인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고려 건국기에 진보와 의성의 성주
일 때에는 이름이 洪術로 나오고18) 이후의 기록에서 金弘述 또는 金洪術로
나오기도 하다가19) 성황신으로 제사될 때에는 金洪術로 이름이 굳어진다.20)
이후에 그를 ‘의성사람[義城人]’이라고 표현21)했으므로 그를 의성김씨로 이
해한 듯하지만, 현재 의성김씨 중에서 金錫 이전의 金洪術을 조상으로 한 후
손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자료에는 洪術이 고려의 개국공신 洪儒22)이며
城主 將軍이 되었다. 929년(태조 12) 견훤이 의성부를 침범했을 때 맞서 싸우다 전
사했다. 그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의성의 토착 세력들이 사망한 장소에 城隍祠를
건립하고 의성의 성황신으로 모셨다. 그러다가 1706년(숙종 32)에 성황사에 위패를
안치하고 ‘忠烈祠’라는 편액을 걸어 유교적인 祠宇로 전환시켰다. 충렬사는 의성읍
상리리 사당골에 있고, 의성김씨에 의해 매년 춘향이 거행되고 있다.(義城郡誌 14
05~1406면 참조)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은 “원래 이름은 홍술(洪術)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게 김씨 성을 사성받은 것으로 보인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라
고 기록하고 있다.(http://uiseong.grandculture.net)
16) 김홍술이 성황신으로 제향된 내력과 그 이후의 성격에 대해서는 邊東明, “城隍神
金洪術과 義城”, 역사학회, 역사학보 189, 2006에서 상세히 논의하였다. 17) 金洪術 高麗 太祖時 以吏爲城主將軍焉(慶尙道地理志 義城縣 人物條. 尹熙勉, “新羅
下代의 城主 將軍 – 眞寶城主 洪述과 載巖城將軍 善弼을 中心으로”,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39, 1982. 54면에서 재인용)
18) 眞寶城主洪術 遣使請降(高麗史 권1 太祖5년 11월)
19) 金洪術 高麗太祖時 以吏爲城主將軍(慶尙道地理志, 安東道)
20) (城隍祠) 在縣北三里 新增 俗傳 金洪術貌似麗祖 與百濟甄萱戰 敗死之 仍祠于此(新
增東國輿地勝覽 권25, 義城縣)
21) 史云 金洪術 義城人(㵢溪集 권7 「城隍祭送迎神歌序」)
22) 洪儒는 고려 태조의 26비인 義城府院夫人의 아버지이다. 高麗史에 의하면 의성부
원부인은 太師 三重大匡 洪儒의 딸이며 義城府院大君의 어머니이다.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29
義城洪氏의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근거도 있다.23)
의성김씨가 중국에서 도래하여 의성에 정착한 김씨 씨족이며 그 확산범위
가 일본까지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에 의하면 의성김씨가 한국과
일본의 왜국 조상이라고 하였다.24) 그러나 이는 학술적 근거가 미약하여 설
득력 있게 증명하기에는 많은 과제가 있다. 그러므로 현재 의성김씨는 모두 金錫의 후손으로 간주되고 있다. 1992년 대동보를 기준25)으로 하면 金錫으로부터 金龍庇까지 錫 - 逸 - 弘術 - 國 - 景珍 - 彦美 - 襲光 - 公瑀 - 龍庇로 繼代되어 있다. 그러나
제2세부터 제8세까지의 사적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경우에 따라 다르게 기록
되어 있고,26) 족보에서도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주를 달아 표시해 두기
도 했다.27) 그 결과 첨사공 김용비 이전의 기록은 신뢰하지 않고 첨사공을
실질적인 시조로 기록한 경우도 있다. 신빙할 수 있는 기록을 전거로 삼는
관례에 따르면 이 역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첨사공 이전에 분파
된 경우에도 의성김씨로 대를 이어 살고 있고 대동보에도 등재되어 있으므
로, 대동보상 9세인 첨사공을 시조로 표현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현재 의성김씨 중에서 얼마가 첨사공의 자손인지, 각 분파별 의성김씨 인
구수가 얼마인지를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대동보에 수록된 사람
이 의성김씨의 전체 인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2015년 통계상 문소김씨를
포함한 의성김씨가 295,793명인데, 1992년 대동보 총 13권에 수록된 인구
23) 洪儒 初名術 義城府人(高麗史 列傳, 洪儒 裵玄慶 申崇謙 卜智謙)
24) 朴燦, 召文國과 日本天皇家, 대보사, 2010
25) 1992년판 義城金氏大同譜. 이 대동보는 金錫을 1世로 하고 이하 대수에 따라 표시
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른다. 26) 이 4대에 대한 入錄 여부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데 대해서는 金時晃, 앞의 논문
61~62면에 설명되어 있다. 27) 庚子譜云 一譜 無弘術 有諱國諱景珍諱彦美諱襲光四代 謹按 自義城君至典書先祖 只
九世 而萬戶先祖至後孫以鉉 十二世 何四百五十年間 代數甚促 而三百餘年間 代數如
是太多也 其間或有失傳 不系而然耶 丁時述所記萬姓譜 亦以上四代 系公祐之上 似是
實錄當以此連代 而或恐有差誤 不敢入錄 以待博識者正之(1958년판 義城金氏 靑溪
公 宗派譜)
제62호(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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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는 42,965명으로 2015년 총인구의 14.52% 정도에 불과하다. 대동보와
통계 사이에 20년 가량의 연대 차이는 있으나 이를 감안해도 수록비율이 낮
다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확한 분파별 인원수를 산출하
는 것은 어려우므로, 간접적으로 대동보에 수록된 면수를 비율로 파악하여
대체적인 비중을 알아보는 것만이 가능하다.(별표 3. 의성김씨의 계파별 비
중(1992년 대동보 면수 기준))
이 대동보 기록 자료에 의하면, 수록된 인구 중에서 99.87%가 金洪術의
자손이며 그 중에서金龍庇의 자손이 전체 의성김씨의 87.33%이고 그의 형
제인 金龍弼의 자손이 7.56%, 金龍珠의 자손이 1.32%이다. 그러므로 의성김
씨가 대부분 김용비의 자손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적지 않은 예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용비의 후손이 아닌 분파로 의성김씨에 포함되어 수록된 사람들은 다음
과 같다. 2세 金逸의 아들로는 金弘術과 金仁術이 있다. 김홍술의 후손이 첨사공으
로 이어지는 의성김씨의 일반적인 계보이지만, 김인술의 후손인 宣略將軍派
에 掌令公派, 淸巖公派, 參奉公派 등이 대동보에 실려 있다.28)
또한 4세 金國의 아들에는 金景珍과 金景琰이 있으며 첨사공의 조상인 김
경진 후손 이외에도 김경염의 후손 贊成事 金成丹의 후손으로 의성 長林派, 晩隱公派, 潛江公派, 義思堂派 등이 대동보에 실려 있다.29)
첨사공 金龍庇는 金公瑀의 맏아들이지만 그에게는 아우로 金龍弼과 金龍
珠가 있었다. 그중 김용필의 후손 守司空公派에 慕齋 金安國과 思齋 金定國
등 현저한 인물이 있으며 김용주의 후손 忠毅公派도 대동보에 수록되어 있
다.30)
28) 1992년판 義城金氏大同譜 13권 1163면~1184면
29) 1992년판 義城金氏大同譜 13권 534면~1162면. 金景琰의 5대손 金成丹까지 독
자로 계대되었으므로 이들은 모두 김성단의 후손이다. 30) 1992년판 義城金氏大同譜 12권 376면~13권 306면(守司空公 김용필의 후손),
13권 307면~533면(平章事公 김용주의 후손)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31
이로 보아, 첨사공 이전의 상계 계대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현재의 자손들
을 모두 아우르기 위해서는 金錫을 시조로 표현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다
만 선인들이 왕왕 첨사공을 “우리 시조[我始祖]”라고 칭한 것31)은 이전에
1656년 丙申譜의 서술태도를 따르면서 선조에 대한 사모와 친밀함을 표한
것으로 이해된다. 첨사공 金龍庇의 시대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다.32) 그 원인은, 그 상
계 계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생몰년이나 활동시대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
고, 이에 따라 후대에 기록된 업적도 상호 차착이 있게 되었다. 문중에 전해
지는 기록상으로는 ‘백성들에게 큰 공덕이 있어서[大功德於民]’,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적이 있어서[討紅巾有功]’, ‘벼슬이 요양성 참지정사에 이르고
[官至遼陽城參知政事]’, ‘명종 때에 벼슬하여 정승에 이르렀으며[明宗朝入官
至政丞]’, ‘추성보절공신으로 의성군에 봉해졌다[推誠保節功臣封義城君]’ 등
의 서술이 있다. 또는 ‘증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태자첨사[贈 銀靑光祿大
夫 尙書左僕射 太子詹事]’였다는 기록33)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고려사에
직접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며, 각 기술 사이에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점도 있다. 그가 명종 시대에 생존하였다고 했으나, 고려 명종은 서기 1170
년에서 1197년까지 재위했는데 홍건적은 1359년에 침공하여 1363년에 퇴
각하였으니 시간적인 차이가 크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 상호 전거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연대추정으로는 첨사공의 5대손 金洊의 호구단자34)를
31) 我始祖 太子詹事府君 積德累仁 慶流苗裔(金璡, 「五土山立石發文」), 我始祖 高麗太子
詹事府君(金宇顒, 「詹事府君墓碑銘」)
32) 高麗金紫光祿大夫 太子詹事 義城君 夫人令同正姜后柱女 墓義城五土山震向 邑人以
有大功德於民 立祠以祀之 廟號鎭民祠 外孫李潚譜序 討紅巾有功云 槐山譜 官至遼陽
省參知政事 扶餘金兌孫家所藏文書 府君明宗朝入官至政丞 以推誠保節功臣 封義城
君(1958년판 義城金氏 靑溪公 宗派譜)
33) 高麗 贈 銀靑光祿大夫 尙書左僕射 太子詹事 龍庇公 其始祖也(金誠一, (靑溪先生) 行
狀, 聯芳世稿 靑溪先生逸稿)
34) 학봉종가에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는 호구단자이다. 1390년에 29세인 가구주 金洊의
호적문서인 이 단자에는 당시의 가족으로 28세인 그의 부인 홍주 이씨가 수록되어
제62호(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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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으로 소급한 추정이 있다. 1390년대에 생존하였던 김천의 5대조를 세대
간격에 따라 소급하여 대체로 1200년대 중반 정도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렇
게 보면 첨사공의 공덕은 1231년부터 30여 년간 계속되었던 몽고 침략에서
의성 지역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여 읍민의 생존을 지켰던 것으로 볼 수 있
다.35)
이처럼 시대가 고증되는 후손으로부터 역산하는 방법으로 시기를 추정하
는 경우로 다른 관찬문서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첨사공의 증손자 金台權
에 대한 기록이 東史綱目 1363년에 나타나고, 첨사공의 손자 金瑞芝에 대
한 기록이 高麗史節要 1303년36)과 1311년37)에 각각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로부터 첨사공의 아들 金宜를 거쳐 첨사공까지 소급한다면 이 역시 1200
년대 초중반 정도가 타당한 생존연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정확한
연대를 설명할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다. 그 외에 실증적인 연대고찰의 방법으로 高麗史節要의 기록을 참고하여
연구한 경우도 있다. 이 연구에서는 첨사공의 공적이 1199년 명주의 반란군
이 의성을 함락했을 때 도적을 초유하고 백성을 보호한 공덕이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38) 이 연구에서는 고려 신종 2년(1199)에 강릉에서 도적이 일어
나 경주의 도적과 합세하여 경상도의 여러 주군을 침략하였다39)고 했으니, 이때 의성도 함락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 시기에 의성의 수령을 縣
있다. 그 밖의 생존 가족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가구주의 친외계 조상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金洊의 부 金居斗, 조부 金台權, 증조부 金瑞芝, 金瑞芝의 부 金宜, 조부 金龍庇, 증조부 金公祐까지 서술되어 있다. 35) 李樹健, “義城金氏 川前派 문호의 성장과정”, 의성김씨천상문화보전회, 내앞500년
, 2011. 26면
36) 罷興安都護府副使金瑞芝 王之幸姬鳳池蓮者 本府妓也 邑吏裴度 嘗有憾於瑞芝 託鳳
池蓮訴王 王遂罷瑞芝 籍其家(高麗史節要 卷之二十二, 충렬왕 29년)
37) 祭紺嶽山 時俗尙鬼 公卿士庶 皆親祭紺嶽山 知中門事閔儒 前少尹金瑞芝 將祭紺嶽 過
長湍津溺死 司憲掌令方于楨 上疏請禁 從之(高麗史節要 卷之二十三, 충선왕 3년)
38) 金甲周, “詹事府君 金龍庇”, 義城金氏 五土山 略誌 7~12면
39) 盜起溟州 陷三陟蔚珍二縣 盜又起東京 與溟州賊合 侵掠州郡 遣郞將吳應夫 借閣門祗
候宋公綽于溟州道 將作少監趙通 郞將韓祗于東京 招撫之 ○三月 宋公綽招諭東京賊
魁金順 蔚珍賊魁今草等來降 王賜酒食衣服遣還(高麗史節要 卷之十四, 신종 2년)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33
令에서 監務로 강등하였는데 이것도 당시에 의성이 적도에게 지배되고 있었
기 때문일 것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적도들이 항복하여 왕이 음식과 의복을
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첨사공이 의성지역의 적도들을 효유하여 의
성 읍민을 보전한 공로가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이때 그가 입힌 혜택이 지
역민에게 두터웠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진민사 상향 축문에서 “德尊當世 澤在
斯民 鄕邦景慕 曠百維新”이라고 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추론은 객관적
인 사료로 첨사공의 시대에 대해 추론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가능성은 있
지만, 여전히 확증은 없는 추론 상태이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첨사공의 시대를 지나면 대부분의 후손들은 의성김씨의 계보로 설명되지
만, 일부 分貫된 후손들은 첨사공의 계보에서 분리되기도 한다. 이들 대부분
은 자신들이 의성김씨에서 분관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경우에 따
라서는 조정에 요청하여 환본하기도 했고, 일부는 분관된 상태를 유지하기도
했다. 의성김씨를 母貫으로 하는 他貫은 다음과 같다. 廣州金氏 : 첨사공보다 上代에 분관된 경우로는 廣州金氏가 있다. 첨사공
의 조부 金襲光의 아우 金祿光은 몽고 침략을 방어한 공으로 廣州君에 봉해
지면서 廣州로 분관하였다. 광주김씨에는 고려시대에 시인 金克己가 있었고
독립운동가 金相潤(1897~1927) 등의 인물이 있다. 현재 통계상으로 광주김
씨는 전국에 28,156명이 있다. 綾城金氏 : 金洪術의 아우 金仁述의 후손 金奎焄이 綾州에 거주하면서 본
거지와 분리되어 형성된 듯하다.40) 그의 후손 金敏國이 조선 선조 대에 제주
도로 이거하고 그 후손들이 다시 전라도 和順과 경상도 三嘉로 옮겨 사는 동
40) 綾州派 以內史令諱逸第二子諱仁術之後世 居綾州 因兵禍入耽羅島 零星數家 移住陜
川焉(金柄洛, 義城金氏大同譜序, 義城金氏 大同譜 제1권 38면)
제62호(2017)
134
안 능성김씨로 분관되어 계승하였다. 그 자손들 중에는 조선 숙종 때에 문과
에 급제한 金鳴夏 金鳴殷 등이 있다. 이들은 기록상으로 자신들이 의성김씨
에서 분관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41) 현재 통계상으로 능성김씨 458명, 능주김씨 216명, 릉성김씨 27명, 릉주김씨 15명으로 합계 716명이 있다. 開城金氏 : 첨사공과 같은 代에 분관된 경우로, 첨사공의 아우 判開城府事
로 개성군에 봉해진 金龍珠의 후손들42)은 開城金氏로 분관하여43) 兢齋 金
得臣(1754~1822) 등의 예술가와 학자를 낳았다. 雪城金氏는 김용주의 증손
자 金之宣을 시조로 하고 있으나 그가 김용주의 맏증손자라는 점과 雪城이
開城의 별호라는 점에서 개성김씨의 일파로 파악된다. 金應煥(1742~1789)
등의 예술가와 金是最(1684~1766) 등의 학자가 많았다. 개성김씨는 조선
고종 시대인 1865년에 환본의 칙명을 받았다고 한다.44) 현재 통계상으로
개성김씨는 22,793명이 있고, 설성김씨는 2,162명이 있다. 高靈金氏 : 첨사공보다 下代에 분관된 경우로, 첨사공의 장자 金宜의 아들
金南得은 초명이 麒芝였으며 공민왕 시대에 공을 세워 왕명으로 이름을 바
꾸고 高靈金氏로 분관하였다. 그 후손에서 임진왜란 때의 의병대장 松庵 金
沔(1541∼1593) 등 많은 인재가 나왔다. 현재 통계상으로 고령김씨는
15,611명이 있다.
41) 義城君 諱錫之八世孫 諱龍弼 仍爲義城金族之派祖也 噫我綾城之金 昔爲義城之同派
今爲綾城之異貫者 …… 我中始祖則東公 自義城遷居綾城 …… 先祖主積德累仁之報
風氣日開 雲仍日衆 始籍于此 因以綾城爲貫云(金霖洙, 「綾城金氏族譜序」, 1916)
42) 開城氏 以開城府事諱龍珠之裔 因官襲貫 往在乙丑 龥于天陛 至蒙還本之聖裁(金柄洛, 義城金氏大同譜序, 義城金氏 大同譜 제1권 38면)
43) 金晙 祖考 忠毅公 龍珠 高麗 知開城府事 後孫因居開城 受籍開城云(金時晃, “義城金
氏 族譜硏究”,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7권, 1991. 103면 재인용)
44) 景泗流芳編纂委員會, 景泗流芳, 1974. 39면. 이하 분관과 환본에 대한 기록은 이
책에서 참고하였다.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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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安金氏 : 역시 金宜의 아들 金椿의 후손이 禮安金氏로 분관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나,45) 현재 예안김씨는 金尙을 시조로 하고 있고 柏巖 金玏
(1540~1616)등의 인물이 있으며 이들은 선성김씨로 부르기도 한다. 의성김
씨의 일파로 파악되는 예안김씨들은 조선 말기 1802년에 환본하였다고 한
다.46) 현재 통계상의 예안김씨는 김상의 후손인 것으로 파악되며, 인구수는
예안김씨 15,600명, 례안김씨 189명, 선성김씨 3,261명을 합하여 19,050명
이 있다. 積城金氏 : 金龍弼의 후손 金夢立의 아들 金尙煥을 시조로 하는 본관으로
경기도 파주에 세거한다고 되어 있다.47) 현재 통계상으로 적성김씨는 630명
이 있다. 金山金氏 : 金龍珠의 6대손 金文富가 金山金氏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48) 김산김씨로 표기되는 그 자손은 현재 12명이 집계되어 있다. 金자
의 독음을 ‘금’으로 했을 경우 금산김씨가 되며, 이 경우에는 경주김씨의 일
파인 錦山金氏와 섞여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三和金氏 : 金龍弼의 7대손 金統을 시조로 하여 분관하여 그 제1자 金益
45) 禮安氏則 義城之分也 蓋自詹事公諱龍庇 始封義城 自始以後貫義城 而至二世 監門公
諱宜條下 末子及孫曰椿曰玉祖兄弟 又移禮安 遠離先鄕(김시황, 앞의 논문 99면 재인
용)
46) 按禮安譜 以侍中公椿爲始祖 … 本派諸孫上疏天陛 特承還本之命(金道和, 第七次譜
序, 義城金氏大同譜 1992. 1권 31~32면)
47) 시조 김상환(金尙煥)의 자는 문원(文遠)이다.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 김석(金錫)의
9세손인 김용필(金龍弼)의 후손이며 김몽립(金夢立)의 아들로 1636년(인조 14)에
태어났으며 평양(平壤)에서 세거(世居)하였다. 1669년(현종 10) 식년 문과(式年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다만 김상환의 급제 당시
기록에서 본관이 적성인 것으로 보아 선대에서 이미 의성김씨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을 적성으로 삼은 것 같다.(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
48) 義城金氏大同譜 世系 48면
제62호(2017)
136
齡계는 思齋慕齋파가 되고 그 제2자 金添齡계가 삼화김씨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의성김씨 대동보 13권에 수록된 듯하고 현재 통계상으로
삼화김씨는 8명이 기록되어 있다. 의성김씨에서 분관된 타관들은 대체로 독자적 관향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는 조선 후기에 還本하려는 경향49)을 보인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당
시 예조의 확인을 거쳐서 환본하였는데,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빠짐없는 환본
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부는 분관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
었다. 첨사공의 후손 의성김씨들은 전국에 분포하면서 많은 인재를 낳고 중요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의성에서 출발했을 것이며 가까운 경상
북도 북부지방의 안동, 봉화, 청송과 서쪽으로 군위, 성주, 고령 등지로 확산
되었고,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범위를 넓힌 후손들은 문의, 청양, 보령 등지
전국적 범위로 터전을 넓혀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부임이나 이주와
유배 등의 사정으로 북청, 신천, 해주 등에도 많은 후손이 있었고, 학문적 인
연과 친척의 거주지를 따라 대규모의 집거지가 나타나기도 했다. 1930년대 조사에 의하면 당시 義城金氏는 경기도 안성군 장단군 일원, 충
북 옥천군 이원면, 괴산군, 음성군, 충남 서산군 원북면, 전북 정읍군, 경북
군위군, 의성군 단촌면 사곡면, 안동군 임하면 일직면 서후면, 청송군 현서면
진보면, 영천군 북안면, 영풍군 장수면, 봉화군 봉화면, 예천군 예천읍, 성주
군, 경남 진양군, 합천군, 평남 용강군 오신면 용강면, 평북 태천군 서면, 함
남 이원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각지의 의성김씨들은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국내의 타 지역
과 외국의 독립투쟁 거점으로 이주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만주의 서간도 지
방에 많은 일족이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50) 그 중에서 안동 내앞
49) 본관으로부터 분관된 동성의 소수 분파들이 규모가 큰 본관으로 회복되는 흐름이
있었던 데 대해서는, 이수건, “족보와 양반의식”, 한국사 시민강좌 24, 일조각, 1999. 28면을 참조하였다.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37
일족의 이주가 두드러졌으며51) 이 과정에서 일부 지역은 의성김씨의 인구와
재산이 줄어들기도 했다.52) 해방 이후에 이들 중에서 일부가 귀국하기도 했
으나, 많은 수가 중국에 잔류하여 현재 많은 수가 在中 의성김씨로 중국의 국
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남북 분단으로 인해 在北 의성김씨들은 연락이 끊어
졌고 통계에 잡힐 수도 없게 되었다. 在南 의성김씨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그
뒤에 국가발전에 따라 외국으로 진출하여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2년 대동보에는 전국에 분포한 의성김씨 집성지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의성, 군위, 청하, 안동, 영천, 진보, 성주, 영천, 칠곡, 선산, 대구 등
경상북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부여, 廣州, 은진, 창원, 논산, 청주, 공주, 청양, 예산, 부안, 고부, 태인, 고창, 전주, 정읍, 장성, 해남 등 호서 호남 지
방에도 집거하고 있는 것이 정리되었다. 또한 일부 집거지는 북청, 이원, 곡
산, 송화, 신천, 봉산, 재령 등 북한 지역으로 잡혀 있기도 하여 연락이 끊어
진 의성김씨들도 다수인 것이 나타나기도 했다. 현재는 사회의 빠른 변화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세거지에 집거하는
문화는 희박해졌다. 그러나 수백 년간 이루어 온 문중동거의 역사와 문화는
각지의 종택과 서원과 정자 등 많은 유형 유적과 아름다운 무형 문화로 지
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50) 趙東杰, “川前 金門의 獨立運動”, 義城金氏 川上文化保存會, 내앞 500년, 302~36
1면
51) 김희곤, “안동 내앞마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생가터 조사 연구”, 독립기념관 한국독
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8, 2014. 224면
52) 신창균, “민족운동에 따른 傳統名家의 사회경제적 변화 - 安東 義城金氏 내앞[川前]
문중의 경우”,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연구 27, 2003. 42~7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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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오토산 진민사 사적
1. 오토산 묘소 사적
오토산 묘소는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토현리에 있는 고려 태자첨사 金
龍庇의 묘소를 일컫는 말이다. 이 묘소는 그의 사망 직후에 조성되었으며 현
재까지 후손들에 의해 수호되고 있다. 김용비의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묘소의 조성연대 역시 확실하지
는 않으나, 고려시대의 묘소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구전53)과 사후에 곧
이곳에 장사되었다는 기록54) 및 그 묘소가 실제로 의성현의 남쪽에 있다는
기록55)으로 보아, 주인공의 사망으로부터 현재까지 계속 유지되어 오는 고
려시대의 묘소로 보인다. 묘소가 있는 오토산에 대한 풍수지리적 평가 및 전
설과 묘소의 조성에 대한 설화들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것56)도 이 묘소가
일찍부터 지도자의 묘소로 중시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묘소에 비석이 없고 오래 수호해 오는 동
안에 묘소가 퇴락하기도 했기 때문에 靑溪 金璡(1500~1580)에 의해 비석을
세우자는 발의가 있었고, 이에 전 문중이 호응하고 그 아들 鶴峯 金誠一
53) 오토산 묘소는 현재 圓形으로 남아 있지만, 조선 중기에 修墓하기 전에는 方形이었다
는 구전이 있다. 54) 旣沒 葬於是 祠於是 今八百餘年矣(金應祖, 「鎭民祠移建記」) 오토산 재사와 진민사에
대한 기록들은 대부분 五土齋舍考迬錄에 수집되어 있다. 이하 이 책에 수록되어
인용하는 글들은 별도의 표시 없이 재인용한다. 55) 今其墓所 實在義城縣治之南 五土山之原 子孫世守 得保今日 是則幸矣(金璡, 「五土山
立石發文」)
56) 五土山이 다섯 명당을 가지고 있어서 五名山이라고도 불린다는 것이며, 그 중에서
첨사공 묘소가 掛燈穴이라고 불리며, 광중에서 다섯 색깔의 흙이 나와서 五土山이라
고 했다든지, 묘소 조성시에 소리개[鳶]를 날려서 그 앉는 자리를 잡았다든지, 하는
많은 전설들이 있다. 풍수도참류에 속하는 이 전설들의 성격으로 보아 구전된 시기
는 고려 후기 정도로 보이는데, 그들은 모두 이미 첨사공 묘소가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義城郡誌, 義城 등 참조)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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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1593)이 주관하여 東岡 金宇顒(1540~1603)이 지은 글로 묘비를 세
웠다. 비문에 의하면, 이 묘소는 고을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존중을 받아 나
무하고 짐승 먹이는 것을 함께 금했고57), 첨사공이 이 고을에 있을 때 읍민
들에게 존경받던 것이 누대 수백년동안 이어져서 조금도 소홀해지지 않았다
고 하였다.58) 또한 묘소가 있는데 묘갈이 없으니 자손들이 묘소를 찾아 추
모하기 어렵다고 한 청계공의 글59)에 호응하여, 동강공은 묘비문에서 이 조
상의 후손에 대한 기록을 최대한 상세하게 하여 후손들의 소속감을 확보하
였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사람은 첨사공의 아들로부터 시작하여 동강공 자
신까지 10대에 걸친 顯官名儒들이었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묘소 조성 당시에 석물은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석물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에는 아마 묘비를 조성했을 것이고, 이어서 다른
석물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60) 당시의 기록이 석물의 세목을 열거하지
는 않았지만, 대체로 당시의 관례에 따라 묘전비와 상석과 망주석 및 동자석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오토산 묘소에 대해서는 1772년 修墓를 한 분정표가 있다. 이 분정표에는
말미에 기록된 本孫 12인 이외에 他姓에서 분정된 집사만 해도 57인에 달하
는 대규모 집사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도 큰 수묘가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에 어떤 부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기록을 찾지
못해 알 수 없다. 묘소를 수호하는 재사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수선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묘소에도 필요한 보수가 자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1825년 墓前碑를 중수하여 金羲壽(1760~1848)의 글씨로 개
57) 我始祖高麗太子詹事府君 諱龍庇公之墓 在慶尙道召文縣治之南 五土山震向之原 縣人
以府君有功德於民 久而不敢忘 共爲禁其樵牧(金宇顒, 「始祖太子詹事府君墓碑」)
58) 我始祖之在召文 觀其邑民之崇敬慕嚮 至於綿歷異代 累數百年之久 而不敢忘忽焉 非
功德入人之深 而能如是乎(金宇顒, 「始祖太子詹事府君墓碑」)
59) 而經世久遠 尙無墓碣 數代之後 將與丘壟 同其纍纍 未知子孫 於何徵信 而展其追遠之
誠乎(金璡, 「五土山立石發文」)
60) 의성현령 安應昌이 석물을 갖추었을 것이라고 본 기록도 있다.(後幾年 安侯應昌 莅縣
事 爲之具像設置齋舍, 李象靖, 「五土山齋舍重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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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 기록이 있고 金崧鎭(1850~1919)에 의해 지어진 修墓告由文61)이 남아
있다. 묘소에 성묘한 후손 후학들을 기록한 省墓錄류가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다. 현재 이 성묘록에는 1772년 修墓할 때의 집사들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서
墓祀의 집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묘소제사를 맡은 집사분정에
本孫이라는 후손명단 이외에 타성의 많은 후학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 1773년 墓祀時執事 명단을 보면 本孫은 따로 표시를 하고 朴天鍵, 朴敦
欽, 柳元吉 등 타성의 인사들도 집사를 맡은 이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鎭民祠 제향에 유림 전체가 참여한 것만이 아니라, 의성김씨의 조상인 오토
산 墓祭에도 외손을 포함한 전체 유림이 집사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특별한
증거로 볼 수 있다. 현재 墓祭는 秋奠으로만 거행되고 있다. 원래 춘추로 거행되던 묘제를 추
전으로만 거행하는 것은, 같은 구역으로 옮겨 온 진민사 제향이 봄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春享 秋奠으로 명칭과 제향을 구분하여 거행하면서 묘
소 추전의 집사는 의성김씨 자손들이 모두 맡아서 시행하고 있다. 현재 묘소에 있는 석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묘전비 龜趺는 높이 53cm, 너비 94cm, 길이 122cm인데, 최초에 수립된
묘전비의 귀부였으며, 그 뒤 개갈된 비신을 세우느라고 거북의 등을 넓게 파
냈으므로 지금은 귀부에 비해 비신이 큰 느낌을 주고 있다. 대체로 묘전비에
서 조선시대 후기에는 귀부를 사용한 예가 드문데, 이 비석은 귀부를 쓴 것
으로 보아 시기적으로 앞서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묘전비 碑身은 중수비신이다. 최초의 비신은 東岡 당년인 1577년에 세웠
으나 세월이 흘러 마모가 심했으므로 1825년 같은 비문을 金羲壽의 글씨로
새로 새겨 세웠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82cm, 너비 60cm, 두께 26cm이다. 옥개는 너비 106cm, 폭 85cm, 높이 26cm으로 비신과 규모가 조화되어 있
다. 그러므로 비신을 중수할 때에 묘전비의 옥개도 새로 만든 듯하다. 그렇
61) 歷世旣綿 四尺頹圮 …… 迺整砌戺 迺崇遂埏(金崧鎭, 「修墓時告由文」)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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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최초의 비신과 옥개는 아마 묘소 인근에 묻었을 것으로 보인다.62)
童子石은 한 쌍인데 북쪽은 높이 110cm, 남쪽은 높이 105cm로 비슷하며
소박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시기적으로 최초로 석물을 갖춘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文官石도 한 쌍인데 북쪽은 높이 160cm, 남쪽은 높이 164cm으로 온전한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중후한 몸체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남쪽
문관석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마모된 부분이 있어서 이 역시 최초
석물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床石은 현재 묘전의 상석이 최초의 것은 아닌 듯하다. 묘소 정면에 있는
한 쌍의 상석은 후대에 새로 장만한 듯하며, 가로 121cm, 세로 93cm, 두께
20cm의 장방형 판석을 두 장 이어서 설치하였다. 최초의 상석으로 짐작되는
길이 173cm, 너비 106cm, 두께 20cm의 한 장의 석판은 묘소의 북쪽에 놓
여 있으며 진설 전의 제물을 놓는 보조 상석으로 쓰이고 있다. 상석의 앞에 높이 41cm의 香爐石과 높이 32cm의 盥洗臺와 높이 30cm의
팔각대가 있고 더 앞에 177cm과 173cm의 望柱石 두 기가 남북으로 마주보
고 서 있다. 첨사공 묘소의 뒤쪽에 첨사공부인 姜氏의 묘소가 있고 첨사공 묘소 앞에
는 첨사공의 6대 손자 호군공 金自中63)의 묘소가 있다. 2. 오토재 사적
五土齋는 오토산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한 재사의 이름이다. 재사 건
립에 대해 기록상으로는 1656년경에 의성현령 安應昌이 지었다는 기록이 가
장 오래된 것이다.64) 그러나 그 이전에도 어떤 형태로든 守直 시설이 있었
62) 현재 남아 있는 龜趺가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짝이 되는 최초의
옥개가 현재처럼 지붕 형태가 아닌 螭首 형태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정해득, “조
선시대 墓制 연구” 조선시대사학회, 조선시대사학보 69, 2014. 52~53면 참조)
63) 金自中은 첨사공의 3남 金英의 손자 南坡公 金光富의 증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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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 있고, 그것 역시 일종의 재사 시설이었겠지만 별도의 근거는 없다. 17세기에 지어진 재사는 보전 과정에서 퇴락을 겪었다. 그 중에는 자연스
런 퇴락 이외에 화재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1770년경에 재사
전체를 완전히 중수하게 되었다. 이때 지어진 재사는 追遠堂 4간, 思敬樓 2
간, 僧室 8간과 廚舍와 庫廐를 포함하여 25간이었으며 전체의 이름을 五土
齋라고 하였다. 이후에도 재사는 크고작은 변모를 겪었다. 자연스러운 퇴락으로 인한 수선
과, 화재와 자연재해로 인한 중수 등을 거쳤다. 그러면서 첨사공 묘하 재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던 오토재는 1868년 재사의 위상에 대한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해에 의성 읍내에 있던 鎭民祠가 서원 훼철 과정에서 헐리고
진민사 위판을 오토재로 옮겨 와 봉안하게 되었으므로, 재사와 사당의 기능
을 함께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오토재는 墓所를 수호하는 墓
下 재사의 기능과 祠宇를 보좌하는 典祀 재사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다. 당
시에 처음 오토재로 옮겨 온 진민사는 오토재에 감실을 추가했다가 초옥 한
간 또는 別廟라는 이름으로 한 간 정도로 작은 규모였으며, 차차 사당의 규
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915년 대화재를 만나 25간 전체가 소실되었다. 1916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오토재 전역에 대한 重建이 있었다. 이 중건을
위해 모든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전 건물을 복원하였다. 이 화재에서는 祭器
와 기물들도 많이 소실되었으므로 이를 복원하고 제수의 정식을 완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복원된 오토재 일곽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퇴락하게 되어 1984년
중건의 의논이 시작되었고 1988년 중건이 완료되었다. 이 중건에서는 鎭民
祠를 확장하고 神道 三門을 건설하였으며, 재사를 五土齋라 하고 진입 삼문
을 崇德門이라고 하였다. 思敬樓를 思敬堂으로 하여 典祀廳으로 삼고, 각 구
역에 필요한 출입문과 길을 장만하였다.
64) 李象靖, 앞의 「五土山齋舍重修記」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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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道碑는 이전 시대에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65) 1924년에 힘을 모아 세
운 것이다. 신도비명은 金商德이 지었고,66) 비음기는 金世東이 지었다. 이
신도비의 입석을 고유할 때의 爬錄에 의하면, 삼헌관을 金紹洛, 李忠鎬, 李心
求 등이 맡았고 각 집사들도 유림 전체가 맡아서 유림 행사로 수행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988년 중건시에 신도비각을 중수하고 단장하였다. 이 중수에서 부속시설로 思源池와 진입로에 尋眞橋 등을 갖추어 실제적인
필요와 전체적인 조화에 기여하게 하였다. 오토재는 설립 이후 문중의 대표적인 인사가 임원을 맡아서 관리하여 왔
다. 「五土齋舍任案」에 의하면 매년 都有司, 掌儀, 副有司 등의 임원이 선정되
고 그들이 필요한 행사와 운영을 맡아 하면서 남긴 문서들이 관리되고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1847년 도유사는 교리 金龍洛이었으며 1948년 도유사는
유학 金昌淑이었다. 이렇게 都有司 有司 제도는 지금까지 주로 春享 秋奠을
맡아 운영되어 오고 있다. 1988년 이후에는 五土山管理委員會라는 별도의 조직이 구성되어 초대 金
泓殖 회장 이후 부회장과 총무, 감사 등의 직제를 갖추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처리하면서 시설유지 보수와 재산관리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3. 진민사 사적
鎭民祠는 高麗太子詹事 義城君 金龍庇가 의성읍민에게 큰 공덕이 있었으
므로 읍민들이 그의 사후에 설립하여 제사를 지내온 사당이다. 의성에서 읍
민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에 대해 공적을 기념하여 자발적으로 향사하는 곳은
두 군데가 있었다. 하나는 金洪術을 제향하는 城隍祠였고 하나는 金龍庇를
제향하는 鎭民祠였다.
65) 已過半千年 恭桑梓而羹墻 相傳三十世 力綿事鉅 神道之役未遑 世變時移 子孫之誠或
淺(金天浩, 「神道碑閣上樑文」)
66) 秀山集에 의하면 金秉宗이 代作하였다고 한다.(五土山誌 1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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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隍祠에 제향되고 있는 김홍술은 고려가 건국하던 시기에 진보의 성주로
의성에 진출하여 왕건을 위해 견훤과 대적하다가 전사한 인물이다. 고려 초
기의 기록 중에는 약간의 사실이 출입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것처럼, 김홍술
에 대해서도 확정할 수 없는 기록들이 있다. 순서대로 보면, 진보의 호족이
던 洪述이 922년 왕건에게 사자를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다. 왕건은 王儒와
含弼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였다. 923년에 홍술이 아들을 입조시키자 元尹에
임명하였다. 929년에 홍술이 의성전투에서 전사하자 왕건이 매우 슬퍼하였
다. 이 세 기록이 고려시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후의 기록에 城隍
祠에 제향되는 그의 이름은 金洪術로 나온다. 조선시대 기록에 그는 의성 사람들에 의해 성황신으로 제향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에 대한 성황신 제향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대체로 그의 사망으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기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고,67) 俞好仁(1445~1494)이 1488년에 의성현령이 되었을 때 김홍술을
제향하는 城隍祠가 있다고 하였고, 1530년에 편찬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제향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가 성황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민속적
제사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 1706년에 성황사 제사의 형식
과 내용을 개탄하여 사당의 이름을 忠烈祠라고 개칭하여 유교적 제의로 전
환하려는 노력을 보였다.68) 그 후 성황사는 충렬사라는 이름으로 유교적 제
향을 계속하였으며, 현재는 의성김씨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金龍庇를 제향하는 鎭民祠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고려 중후기에 의
성지역의 백성을 위하여 큰 공덕을 세운 김용비에 대해 의성읍민들은 숭배
와 감사의 표현으로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있었다. 아마 이 시기의 제사
역시 민속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민사의 설립 연대는 특정할 수 없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그저 고려시
대부터 의성읍민이 향사한 곳이라고 하며, 조선 시대에 심지어 8백년이 되었
67) 邊東明, 앞의 논문 13~15면
68) 每年春秋 三班官屬 分三次亨祀 必用巫覡 擊鼓吹笙…鄕貢進士金錫兼…歎其淫祀無
禮…以忠烈祠三字揭扁額(邊東明, 앞의 논문 23면 재인용)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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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기록도 있고,69)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읍민이 향사한 것에 감동하는 기
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70) 김용비의 생시 또는 사망 직후 이미 설립이 완
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 건물과 제향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慕齋
金安國(1478~1545)의 사적부터이다. 그는 1517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
는데, 그때 지방을 순행하다가 의성에서 지방민들이 첨사공의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에 감동하여 부역을 면하게 해 주고 사당의 이름을 지어주고 제
수를 官給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었다.71) 이 기록에 따르면 그때까지는 廟號
가 확정적이지 않았는데, 鎭民祠라는 이름으로 확정된 것이 그 시기인 듯하
다. 이에 따라 관련 기록이 정리되었는데, 이 영향으로 燃藜室記述에서도
진민사가 1517년 설립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72)
그 뒤 1577년경에 靑溪 金璡(1500~1580)에 의해 묘전비를 세우자는 제
안이 있었는데, 이 제안에 호응하여 東岡 金宇顒(1540~1603)이 묘비명을
짓고 청계공의 아들 鶴峯 金誠一(1538~1593)이 주선하여 입석하였다. 이때
까지 읍민들에 의한 진민사 제사는 수해나 한재나 돌림병이 있으면 제사하
고 기도하는 형식이었다. 학봉은 이때 진민사 제향이 민간신앙의 성격을 가
지고 있어서 선현에 대한 바른 예법이 아니므로 사당을 세우고 鎭民祠라는
현판을 걸었다.73) 이 일은 묘전비 설립으로 시작하여 진민사 숙정까지 수행
된 사업이었다. 이 시기까지 진민사는 관청의 뒤쪽(현재의 의성군의회)에 있었던 것으로
69) 高麗太子詹事諱龍庇 系出新羅宗姓 而聞韶乃其食邑 旣沒葬於是祠於是 今八百餘年矣
(金應祖, 「鎭民祠移建記」)
70) 聞韶誌 有曰 有大功德於民 邑人立祠而祀之(鎭民祠事蹟, 五土齋舍攷迬錄)
71) 正德間 慕齋金安國 按是路 感其事嘉其俗 爲申蠲復之令 揭號鎭民祠 每於春秋仲月 官
給祭需以祀之(鎭民祠事蹟, 五土齋舍攷迬錄)
72) 鎭民詞 正德 丁丑建 金龍庇 高麗太子詹事(李肯翊, 燃藜室記述 별집 권4, 祀典典故
書院)
73) 諱龍庇 官至太子詹事 有功德於民 邑人設位牌于縣司 水旱疾疫 有禱焉 公以爲瀆也 議
于宗黨 立廟司東 揭號曰鎭民祠(鶴峯集 附錄 권2,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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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다. 그러나 그곳은 큰길과 면하고 있어서 소란하고 복잡하여 제사공간으
로 적합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1656년이었다. 이해에 의성현
령 安應昌74)이 첨사공의 묘소에 참배하고 진민사를 관청 동쪽(현재 鎭民祠
遺址碑가 있는 곳)으로 옮기고 이 祠宇에 따른 齋舍와 廚舍와 位田을 마련하
고 제수를 관급하며 定日에 제사를 드리도록 배려하였다. 이때 진민사의 배
치는, 사당 구역에 廟宇 3간, 神門 3간이 있었고, 그 앞에 강당이 있었는데
正堂 2간, 동쪽 夾室 1간, 서쪽 夾室 1간이 있었으며, 부속건물로 典守와 庖
廚가 왼쪽에 3간, 오른쪽에 3간이 있고, 전체를 담장으로 두르고 대문 1간을
지었으니, 합계 12간 건물이었다. 그 뒤 1749년에는 金宇謙이 묘우와 신문과 재실을 수리하고 위답을 마련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764년 3월 1일에는 묘우에 비가 새서 위패를 이안
하고 지붕을 수리한 뒤에 환안하기도 했다.75) 1807년에도 중수했는데 이때
典祀廳과 바깥문 양편에 1간씩은 전에 없던 것을 새로 지었다.76)
이에 따라 완성 상태의 진민사를 정리하면, 廟宇 3간과 神門 3간으로 사
당 구역이 분리되고, 강당 구역에 正堂 2간에 東夾室 1간과 西夾室 1간이
있었고, 좌우로 典守 3간과 庖廚 3간, 典祀廳이 있었다. 전체를 담장으로 둘
렀으며 大門 1간과 문 좌우에 1간씩 直舍가 있었다. 이 시기로부터 훼철까
지는 몇 번의 중수를 거치면서 대체로 이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대
원군이 1868년 서원을 훼철할 때까지 읍내에 있던 최종 형태의 진민사는 완
성된 서원에 가까운 구조였을 것으로 보인다. 1868년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진민사가 훼철되었다. 아마 이
74) 安應昌(1603~1680) : 본관은 순흥이며 자는 흥숙(興叔)이고 호는 백암(柏巖)이다. 安珦의 후손이며 張顯光의 문인이다. 병자호란에 대군사부로 임명되어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간 봉림대군을 모셨으며 귀국 후에 사헌부 감찰을 거쳐 1655년에 의성현
령에 임명되었다. 저서로 백암문집 5권이 있다. 75) (甲申三月一日 移安)廟宇滲漏 瓦椽摧落 玆擇吉辰 敢告新易 (同月十五日 還安)瓦椽更
葺 廟貌重新 卜吉還安 庶幾妥新(展省錄 甲申年 記錄)
76) 自廟宇及內砌外門 仍舊易新 典祀廳 與外門兩傍一間 又昔無有者(金㙆, 「鎭民祠重修
記」)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47
때 모든 건물이 다 훼철된 듯하며, 위판은 1882년 묘소 아래 五土齋에 임시
로 봉안하였다. 그 이후 진민사는 다시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지 못하고 훼철
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890년에 그 자리에 遺址碑를 세웠다. 이 유지비를
보호하기 위한 碑閣은 1904년 단청을 보수하고 1911년 비각 건물을 중수하
면서 보호되었지만, 진민사를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지는 못하였다. 1868년 진민사 훼철 때에 의성 읍내에 있던 진민사 건물은 모두 훼철되
었고, 묘우에 봉안되었던 위패는 오토산 묘소 앞의 五土齋에 임시로 봉안하
였다. 당시에 훼철된 진민사 건물의 재목은 오토산 재사로 옮겨 보관했다. 처음에 옮겨 온 오토산 진민사의 모습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거의 별도의 건물도 없는 감실 정도였거나 단칸 건물77) 정도로 초
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위패는 오토재에 작은 別廟를 지어 겨우 權安하였지만78) 제향과
보존에 적절한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별묘 시절의 자료가 없어서 모
습을 알 수는 없으나, 局內가 좁아서 제사를 지내기 위한 동작조차 불편하다
고 하는 기록79)이 있었으니, 아마 작은 사당에 구역을 구별한 정도의 형태
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지어진 진민사는 그 후 1915년 화재를 입는 등
세월과 재난을 겪으면서 훼손되었다. 진민사를 위엄에 맞게 복원하려는 노력은 해방 이후 문중의 중요한 의논
이 되었다. 이에 많은 후손들이 힘과 노력을 모아 1959년 오토산 묘소 아래
재사 경내에 진민사를 복원하였다. 새로 지은 진민사는 廟宇 3간에 神門 3
간을 갖추고 垣墻을 두른 비교적 위엄있는 건물이었다. 이 중건 역사는
1962년에 완료되었는데, 진민사와 오토재가 한 경내에 우뚝하게 중건되어
엄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했다.80) 이어서 1965년에 廟庭碑81)를 세움으
77) 倉猝經始 別構一小間架於齋之東偏 以竢後人(金元大, 「鎭民祠廟庭碑銘」)
78) 移神栖於奧區 千古松杉之密邇 閉枯木於齋閣 十載日月之滋荒(金道和, 「五土山別廟
上樑文」)
79) 間經葺理 頹圮則尙未甚也 其制不叶折旋(金正模, 「鎭民祠重修記」)
80) 廟宇齋堂 各得鋪排 墍塗飾以丹靑 榱題藻梲 咸呈鮮妙(金佑林, 「鎭民祠重建上樑文」)
81) 1965년에 설립된 이 廟庭碑는 「鎭民祠重建事蹟碑」라는 이름으로 현재 진민사 앞에
제62호(2017)
148
로써 진민사의 전모를 일부 복원하였다. 의성 읍내에 있던 시절과 비교하면, 진민사에만 소속된 강당 기능의 별도 건물이 없었고 典守와 庖廚도 오토재
와 공유하는 상태로 있었으므로, 이 중건에서는 담장을 갖춘 廟宇 일곽이 복
원된 것이었다. 이렇게 복원된 이후에도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퇴락되는 현상이 있
어서 1986년에는 진민사와 오토재 모두 전면적인 중수가 필요하다는 의논이
있었다. 이에 따라 1987년부터 2년간 전 구역을 재건축하는 대공사를 수행
하였다. 이때 진민사는 원래의 모습을 확장하여 廟宇 정면 3간, 측면 1.5간
에 神門과 垣墻을 갖춘 장대한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이때 중건하면서 鎭民
祠 아래에 五土齋를 중건하고 그 아래에 思敬堂을 중건하여 一廓을 이루었
으므로, 묘하 재사와 제향 사당이 일관된 숭조 공간으로 조화를 이루게 되었
다. 현재 중건된 오토재는 묘소에 대한 재사 기능과 鎭民祠에 대한 재사 기
능을 겸하고 있고, 사경당은 鎭民祠를 포함한 오토산 일원의 典祀廳으로 활
용되고 있다. 진민사는 조선 중기에 중수하고 정비한 이후 모든 의성김씨와 지역 사림
이 展謁하는 장소로 자리잡아 왔다. 현재 보관되어 있는 「謁廟錄」에는 1663
년 생원 金邦烈과 金泰基가 알묘한 데서 기록이 시작되고 있다. 이어서 의성
안동만이 아니라 각 시대별로 전국에서 수많은 후손과 선비들이 사당에 참
배하고 존경을 표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진민사 문서에는 첨사공의 자손 이
외에도 申塼, 柳增輝, 申應錫, 李炡, 黃昌建, 李祉煜 등 많은 사림 인사들의
서명이 보관되어 있다. 진민사 祭享은 조선시대 전 시기 동안 의성의 관청과 유림에서 맡아 왔다. 현재 보관되어 있는 展省錄에 1754년부터 매년 기록되어 있는 집사분정기에
서 예를 들면, 정축년 都有司가 蔣啓邦이고 有司가 李龍運 金弘溥이며 戶長
은 金道錫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매년 유림의 타성이 제향에 참여하고 반드
세워져 있다. 현재 그 옆에는 「義城金氏五土山追遠事蹟碑」가 1988년에 추가로 세워
져 있다.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49
시 말미에 호장의 이름을 기록해두는 등으로 진민사 제향이 지역 官民 전체
에 의해 행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진민사가 오토산으로 옮겨진 것은 외형적으로 축소되고 변화한 것만이 아
니라 위상상의 문제도 발생시켰다. 진민사는 의성읍내에서 의성읍민 모두의
존숭을 받고 유림 전체가 집사를 맡아 향사를 지내는 온 지역의 사당이었는
데, 오토산 구역으로 옮겨오면서 이 제향이 의성김씨 문중에 의해 영위되는
모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8년에 작성된 「建議文」에 이런 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의성김씨종친회 경상남도 본부의 명의로 작성된 이 문서에는 5
개 항의 건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제1항인 “鎭民祠 士林享 復元의 件” 에서 의성군민이 존봉하던 진민사가 오토재로 이건된 뒤부터 郡民이 尊奉할
길이 막혔으니 이를 사림향으로 복원할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하였다.82)
현재는 실질적으로 士林이 해체되고 춘추 제향이 春享으로 통합되면서 사
실상 의성김씨에 의해 향사가 주도되고 있지만, 진민사 제향은 최대한 의성
지역 官民의 일치된 존경을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관민의 논
의를 거쳐 지방자치단체장이 초헌관을 맡아 향사를 지내는 관례가 확립되었
다. 그 결과 지금까지 丁海杰, 金福圭 등의 의성군수들이 관례적으로 초헌관
을 맡고 있으며 사정에 따라서는 南東華, 朴常泰 등의 지역 유림 인사들이
초헌을 맡기도 하고 있다. Ⅳ. 오토산 진민사 사적의 문화적 가치
오토산 진민사 사적지구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역사문화구역으로 간주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안에는 의성에서 가장 큰 성씨이며 전국적
82) 一. 鎭民祠 士林享 復元의 件 : 元來 鎭民祠는 義城郡民이 詹事公大祖의 偉德을 百世에
相傳키 爲하야 建祠崇奉하든 바인대 五土齋로 移建한 事實과 郡民尊奉의 길을 막은
理由는 果安在며 有眼者의 痛嘆을 禁치 못하는 事實이오니 舊基移建과 士林享 復元을
圖謀할 某種措置를 講求할 것(義城金氏宗親會 慶尙南道 本部, 「建議文」,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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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산 진민사
문중문화
존경과 화목
선비문화
인격과 광복
민속문화
삶과 민속
의성문화
유적과 이야기
으로도 대성의 하나인 의성김씨의 최상위 조상 묘소가 있고, 수백년간 묘소
를 수호해 온 유서 깊은 사적이 있고, 현재도 행해지고 있는 전통적 의례의
현장이 있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된 일괄문서가 현재도 생산되고 있으며 진
민사가 이전되어 옴으로 인해 의성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사우의 보존과 존
경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토산 진민사 사적지구의 이런 성격은, 이 지역 일대를 ‘五土山歷史文化
遺蹟地區’ 정도의 명칭으로 하나의 문화유적지구로 지정하고 관리할 필요성
을 제기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군민과 문중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전국
적인 문화교육지구로 육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우선, 오토산 진민사 일원은 民俗文化區域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이 논문
에서는 논의하지 않겠지만, 오토산은 원래 풍수적으로 중시되는 명산이다.83)
83) 오토산 : 오토산을 중심으로 다섯 갈래의 큰 지맥이 뻗어져 나와 있으며, 그 지맥마다
명산이라고 하여 오토산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설이 있다. 또한 과거 대홍수가 일어
나 물이 세상을 다 덮었을 때 산 정상부가 오리 머리 만큼 걸렸다고 하여 오토산이라
고 불렸다고 하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은 오토산 동쪽 산록에 의성 김씨 첨사공(詹
事公) 김용비(金龍庇)의 묘를 쓸 때 땅속에서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의 오색토
가 나왔다고 하여 이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도 한다.(디지털 의성문화대전, http://u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51
많은 풍수가들이 이 산의 풍수적 특징을 공부하였고, 현재도 이 산을 명산으
로 여겨서 답사하고 탐구하는 이들이 매우 많다.84) 풍수적 관심은 관점이
다를 수 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문의 따뜻함이 조화될 수 있는 배경이
라는 점에서는 눈여겨 볼 바가 있다. 오토산은 화려한 명산이 아니라 사람을
품은 따뜻한 산이라는 점에서 많은 민속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다. 이 산에
얽힌 민속과 풍수설화를 이야기구조로 재현하여 제공한다면, 현대인들에게
자연 속에서 휴식을 겸한 스토리텔링의 평안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토산 지역은, 우리 역사의 모든 과정에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담긴 遺蹟
地이다. 오토산은 해발 475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산이 아기자
기하고 곳곳에 오랫동안 살아온 마을들이 있어서 문화적 가치가 높은 지역
이다. 오토산은 의성군의 중심 지역에 있으면서 동남쪽의 면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의성의 역사 문화적 유적들과 연계되어 있다. 자세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오토산 사적지에서 반경 10km 이내에 의성읍과 금성 탑리가 남북으로 있
다. 의성읍은 고려 초기부터 이 지역의 중심 도성으로 많은 문화유적을 가지
고 있어서, 영남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의성읍의 九
峯山 聞韶樓의 문화적 가치와 함께, 곳곳에 많은 효자 열사들의 전설 및 五
老里 설화 등은 이 지역을 하나의 큰 이야기 꾸러미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탑리는 의성문화의 한 핵심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그 둘레에 금성면 제오
리와 학미리가 있고, 전 경덕왕릉과 조문국 역사지구가 있다. 제오리에는 천
연기념물 373호 공룡 발자국화석지가 있고, 탑리에 인접한 대리에는 문익점
의 목화시배지도 있고 조문국 역사지구에는 수많은 역사 유적이 있다. 탑리
iseong.grandculture.net/?local=uiseong, 2017.3.3)
84) 풍수 전설에 흔히 등장하는 성지(性智)도사가 그런 상지(相地)를 한 것으로 구전돼
오지만, 그들 혈처의 유형 이름과 대략적인 위치 방향은 너무나 구체적이다. 얘기인
즉 오토산의 정상 부분에는 제비집혈(연소혈.燕巢穴), 동쪽 산등에는 등잔혈(괘등혈. 掛燈穴), 서쪽 산등에는 곱자혈(곡척혈.曲尺穴), 남쪽 산등에는 벌허리혈(봉요혈.蜂
腰穴), 북쪽 산등에는 개구리발자국혈(와적혈.蛙跡穴)이 각각 있다는 것이다.(이몽
일,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40, 의성오토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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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화석유적 조문국유적 --------- 선비유적 광복유적
선사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
<오토산유적 위치>
에는 유명한 국보 77호 탑리 오층석탑이 있고 탑리 다음 마을인 산운리에는
조선시대 학자들과 애국선열들의 유적이 풍부히 남아 있다. 바로 그 다음에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빙계계곡이 있고 선현을 모신 빙계서원이 있다. 이들 사적지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각각 지질시대, 원삼국시대, 신라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와 현대의 유적을 시기적 연계성을 가지고
일관되게 보여준다. 다만 일련의 시기 중에 고려시대의 유적과 이야기가 결
여된 것이 아쉬웠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오토산 사적지가 그 시기를 채울
수 있으므로 문화적 가치가 더 두드러질 수 있다. 고려시대의 지역 지도자의
영도와 그에 감사하는 지역민의 존경이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고, 그것이 현
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행해져오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전 역사시대에
걸친 지역문화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오토산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수천년을 살아온 이 지역에는 마을마다 따뜻
하고 다정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어서, 이를 정리하고 소개하면 이야기가 있
는 역사지구로 시민에게 제공할 수 있다. 현재 오토산은 산의 다섯 방향을
따라 형성된 5개 리에 둘러싸여 있다. 만천리는 공룡로를 따라 탑리로 향하는 국도변 마을이다. 여기에는 고려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53
말기에 의성에 입향한 함양박씨의 기념물과 정자들이 있고, 이 마을 막닥골
에 있는 고려시대 분묘가 함양박씨 입향조의 무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흔치 않은 고려시대의 유적지로 많은 이야기와 함께 조명될 것이다. 오로리에는 다섯 현인의 이야기와 선녀들이 베짜던 바위 이야기, 아홉 용
이 못에서 노는 이야기 등이 구체적인 지형지물로 남아 있다. 치선리에는 베
틀바위의 아름답고 서러운 이야기와 선암유적이 남아 있으며, 신라시대에 조
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치선리 석탑도 있다. 오상리에는 의병장 이필곤 선생
의 순국 기념비가 있고, 진성이씨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이룬 품위있는 선비
마을의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토현리에는 오토산 오토재 진민사가 있고, 오
상리와의 사이에 비교적 넓은 들과 맑은 물을 가지고 있어서 넉넉한 인심과
정다운 이야기가 많은 마을이다. 오토산과 직접 접하지 않은 인근 마을에는 빙계의 氷穴과 서원, 금성 山雲
리의 선비들과 산수유꽃 등이 금성산을 들러싸고 있어서 오토산 역사문화지
구의 배경이 되어줄 수 있다. 또한, 오토산 사적지를 문화유적지구로 지정하고 관리하는 것은 전국적인
성씨인 30만 의성김씨 일족들에게 의성이 本鄕의 기능을 회복하게 하는 효
과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현재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성씨와 조상의 고향인 貫鄕의 관계는 이미 희미해져가고 있어서, 그
저 행정적인 분류로만 기능을 가지거나 아무 이유도 없이 번거로운 표시로
만 이해되기도 하고 있다. 그러나 의성김씨들은 비교적 본향의식이 강한 편
이며, 더욱이 자신의 조상 묘소가 이곳에 소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진 경우
가 많기 때문에, 오토산 사적지를 홍보하여 경험하게 하면 전국적으로 의성
에 우호적인 외지인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의성김씨들
은 매년 봄과 가을에 수백명에서 천여 명이 모여서 첨사공에 대한 제향의식
을 행하고, 전국적으로 또는 전세계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의성에
대해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심리적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활용
하여 의성 발전에 기여하게 하는 것도 문화산업의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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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향후 오토산 지역은 “역사문화유적지구”로 지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지역의 지질시대 유적은 이미 전국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고, 삼국시대 전후
의 국가발생 유적도 보기 드문 특징을 가지고 발견되고 연구되었으며, 신라
후기 최고의 유적 중 하나인 탑리 오층석탑은 국보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있
다. 조선시대에는 명문가의 학자들이 근처에서 생장했으며 조선의 위기와 일
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의병들과 우국지사의 활동이 있었던 지역이다. 일련의
역사시기 중에 흠결이 되었던 고려시대의 유적으로 오토산 묘소와 진민사
사적이 조명됨으로써 모든 시기가 일관된 역사유적으로 설명될 수 있도록
완성되었다. 이제 필요한 노력은, 산재한 이야기들과 유적들을 서로 연계된 이야기의
틀로 연결하는 일이다. 선대의 삶과 노력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
는지를 설명하고 공감하게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는, 아직 대중적으로 읽히지 않고 있는 한문 자료를 번역하여 보급하고, 이
를 좀 더 대중적으로 전환하는 노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각 마을과 유적마다 이야기를 되살리는
노력을 한다면 이 지역은 화려하지는 않으나 정답고 여유로운 문화유적지구
의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 이 논문은 2017년 7월 27일에 투고 완료되어
2017년 8월 11일부터 9월 12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7년 9월 13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55
성씨 본관 인구 성씨 본관 인구 郭 의성 9 楊 의성 13 具 의성 31 芮 의성 87 權 의성 15 吳 의성 59 金
문소 8,324 玉 의성 12
비안 16
魏 의성 30
의성 287,469
劉 의성 24
羅
비안 37 尹 의성 6
안정 8,934
李 의성 990
의성 17
林
안사 5 盧 의성 146 의성 307 馬 의성 534 張
단산 195 閔 의성 6 의성 8 朴
다인 6 蔣 의성 31
병산 338
全 의성 37
비안 3,311 田 의성 23
의성 261
鄭
단산 31
潘 의성 15 의성 39 方 의성 13 丁 의성 3,498 裵 의성 20 程 의성 42 白 의성 14 諸 의성 6 卞 비안 57 朱 의성 20 夫 의성 8 池 의성 12 賓 의성 90 陳 의성 23 史 의성 42 車 의성 5 徐 의성 52 千 의성 43 成 의성 10 崔 의성 43 孫
병산 185
太 의성 22
비안 247 許 의성 5
의성 21 玄 의성 10
宋 의성 13
洪 의성 17 申 의성 82 黃 의성 11 沈 의성 8 <별표 1. 의성을 본관으로 하는 전국의 인구(5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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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전체인구 김씨인구 문소김씨 의성김씨
전국 49,705,663 10,689,959 8,324 287,469
서울특별시 9,567,196 2,025,779 1,154 49,381
부산광역시 3,404,667 757,159 623 19,321
대구광역시 2,436,770 521,160 2,037 41,784
인천광역시 2,822,601 598,187 211 13,315
광주광역시 1,481,289 338,304 27 3,274
대전광역시 1,519,314 309,274 111 7,446
울산광역시 1,136,755 262,050 325 7,841
세종특별자치시 199,617 39,432 13 904
경기도 12,026,429 2,523,923 1,279 57,321
강원도 1,499,734 338,077 251 6,598
충청북도 1,548,589 315,919 141 9,459
충청남도 2,036,720 423,510 107 8,546
전라북도 1,804,184 382,281 22 6,950
전라남도 1,764,433 413,805 34 2,445
경상북도 2,622,729 603,188 1,673 37,057
경상남도 3,244,163 697,357 288 14,864
제주특별자치도 590,473 140,554 28 963
전체 術자 분파 景자 분파 龍자 분파 대동보 면수 비율
錫 총계 17,198 100.00
弘術系 17,176 99.87
景珍系 16,547 96.21
龍庇系 15,019 87.33
龍弼系 1,301 7.56
龍珠系 227 1.32
景琰系 629 3.66
仁術系 22 0.13
<별표 2. 문소김씨와 의성김씨의 인구수와 분포>
<별표 3. 의성김씨 계파별 비중(1992년 대동보 면수 기준)>
의성김씨의 유래와 五土山 鎭民祠 사적(김윤규)
157
참고문헌
五土齋舍攷迬錄
鎭民祠事蹟
義城金氏 五土山誌 및 진민사 문서
義城金氏大同譜 및 의성김씨 각 派譜
聯芳世稿 및 의성김씨 각 文集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輿地勝覽
慶尙道地理志
燃藜室記述
義城郡誌
경상북도보 제6070호, 2016. 10. 6
金甲周, “詹事府君 金龍庇”, 義城金氏 五土山 略誌 7~12면
金時晃, “義城金氏 族譜硏究”,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7권, 1991. 1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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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熙勉, “新羅 下代의 城主 將軍 – 眞寶城主 洪述과 載巖城將軍 善弼을 中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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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조문국박물관 한국고대사탐구학회, 조문국의 지배세력과 친족집단,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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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호(2017)
158
이몽일, “이몽일의 영남신풍수기행 40, 의성 오토산(상)”, 영남일보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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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국가통계포털 http://kosis.kr/wnsearch/totalSearch.jsp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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