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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95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대림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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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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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E5XIz2Wt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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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버림의 미학>
병(病)중에 정말 특별한 병이 하나 있더군요. ‘모으는 병’. 지독하게 심한 환자를 본적이 있습니다.
버리는 것은 하나도 없고 뭐든지 다 모아놓기만 합니다. 방이고 거실이고 베란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현관문을 열면 쌓아놓은 물건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합니다.
걸어 다니려면 여기저기 쌓인 물건들을 피해 조심조심 발을 내딛어야 합니다. 그렇게 모아놓은 것들이 뭐 대단한 것들인가, 하면 절대로 아닙니다.
물건뿐만이 아니겠지요. 머릿속이 너무 많은 것들로 꽉 찬 분들도 계십니다. 살다보면 힘든 일도 생기고 가슴 아픈 일들도 내 눈앞에서 벌어집니다. 좋은 기억, 나쁜 체험, 아픈 추억, 가지각색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우리 기억 창고들을 드나듭니다.
컴퓨터에 너무 많은 것들을 저장해놓으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데, 빨리 돌아가게 만들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쓸모없는 아이템들은 빨리 삭제를 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 영혼, 기억의 세계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 뇌의 기억창고가 무한한 것이 아닙니다. 미래지향적 삶, 현재에 충만한 삶을 위해 더 이상 도움이 안 되는 기억들은 지워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버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버림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시작입니다.
오늘 축일은 맞는 안드레아 사도 역시 더 큰 가치관을 얻기 위해 지난 삶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밥벌이 도구였던 거금의 배를 버렸습니다. 손때 묻은 어망도 버렸습니다. 정들었던 가족들도 뒤로 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에게 있어 지금까지 투자해온 삶을 바꾸는 일, 크게 인생의 방향을 트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사람 낚는 어부’란 말씀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님을 따라나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앞뒤 계산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따라나섭니다. 지금 당장은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지만, 따라나선 후의 삶도 전혀 기약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어떤 큰 이끌림, 뭔가 큰 흐름을 느꼈습니다. 그 큰 끌림에 따랐습니다.
참으로 큰 버림이요, 큰 도전이요, 큰 투신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요즘 ‘버림',‘비움’이란 말이 재해석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들이 여기저기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비우면 채워지고 버리면 얻게 된다!”
기업 컨설팅 전문가들도 외칩니다.
“장래성이 없거나 본질에 맞지 않는 사업은 과감히 포기해야 합니다.”
의류 디자인 전문가들도 강조합니다. “옷을 디자인할 때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릴 때 좋은 디자인이 나옵니다. 단순화시킬 때 명품이 탄생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기본에 충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안드레아 사도께서 크게 버림으로 인해 크게 얻었음을 기억합니다. 오늘 내 삶에서 다시 한 번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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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음은 얼음을 녹이지 못한다>
(묵상 동명상)
https://youtu.be/IQIERWXml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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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사도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첫 두 제자 중 하나가 됩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무언가 배웠을 것이고 그 단계를 넘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마지막 변화된 모습은 순교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를 선교하던 안드레아는 엑스 모양의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보통 십자가에 못이 박혀도 며칠은 산다고 합니다. 만약 물을 주면 더 살 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안드레아 사도는 십자가에서 일주일 넘게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 증언에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총독은 창으로 찔러 더는 설교를 못 하게 했습니다. 안드레아 성인이 한 설교 중에 이 십자가에서 한 설교가 가장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감동적인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말이 있고 같은 말이라도 잔소리로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왜 어떤 힘이 있고 어떤 말엔 힘이 없을까요? 예수님은 안드레아 사도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시며 믿음을 주셨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나를 따라라”라는 한 마디로 그물을 버리고 따르게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한 마디는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요?
정신과 의사 ‘다카하시 가즈미’의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란 책이 있습니다. 다카하시 선생은 ‘사람의 생각은 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합니다. 많은 학자의 의견은 사람은 20세가 되면 생각의 변화가 멈춘다고 합니다. 생각의 변화란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부모와 형제, 학교, 사회로 확대되며 20세가 되면 성장을 멈춘다는 것입니다. 20세 이후의 삶은 사람의 변화라기보다는 20세 때 형성된 정체성이 성숙하는 과정이라 합니다. 그러나 공자와 같은 분들은 50세가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되어 더욱 성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옳을까요?
다카하시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우울증을 앓는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여러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스트레스는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이 평상시엔 괜찮은데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술만 마시면 가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남편을 바꿔보려 했지만 잘 안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카하시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켰습니다. 사람은 변한다는 책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접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그 여인에게 술을 마시다가 남편이 죽어도 간섭하지 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 사람은 어차피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결국 남편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뭉친 근육도 풀리고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여인의 남편도 술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사람은 물과 같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얼음이고, 어떤 사람은 물이고, 어떤 사람은 수증기입니다. 얼음이 얼음을 녹일 수 있을까요? 얼음은 얼음을 녹일 수 없고 자신 안에 품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자신이 얼음을 품을 수 있는 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물이 된다면 얼음을 녹여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경우는 나도 그 사람과 같은 수준이면서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냉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남편에 의해 병이 치유된 사례도 있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라 사랑을 받지 못한 여인은 온 세상이 겨울이었고 자신의 마음도 그랬습니다. 아마 그것이 냉병의 원인일 것입니다. 한여름에도 방에 난로를 켜 놓아야 했습니다. 남편은 땀띠가 나면서까지 아내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에 몸이 녹아내렸습니다. 한여름에도 치아를 부딪치는 추위를 느꼈던 그녀가 봄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는 이미 따뜻한 삶을 사는 남편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같은 수준이라면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나 먼저 변하고 상대를 받아들이면 내 안에서 그 사람은 변하게 됩니다.
얼음이 물이 되어도, 물이 수증기가 되어도 분자구조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성질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열이 가해져야 합니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과 열, 이것이 물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은총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만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모든 것은 얼음으로 변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과 진리를 입은 사람은 안드레아 사도처럼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는 말은 누군가의 마음을 녹여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시킵니다. 얼음은 얼음을 녹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진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따뜻함만이 누군가의 마음을 녹일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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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안드레아는 “남성적인” 이란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려진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벳사이다의 요나의 아들이며(마태 16,17), 베드로의 동생이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거기에서 사도 요한을 알았으며 그와 함께 처음으로 예수를 따랐고,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다(요한 1,35-42).
사도단에서 안드레아 사도의 역할을 그리 많지 않으나 매우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 굶주린 군중 앞에 안드레아는 예수께 어린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안드레아 사도는 사도들 중에 첫째 “선교사”였다. 처음 부름 받을 때 함께 있던 사도 요한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그를 예수께 데려 갔다(요한 1,41).
우리의 성체성사도 “우리는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지향으로 미사에서 출발하지 않고, 다른 형제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들이 우리와 함께 아버지의 식탁에 모이도록 서두르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복음: 마태 4,18-22 :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바라신다. 그러면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보다도 그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자기가 소유한 것과 그것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를 버리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른 그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 마음대로 탐낼 수 있었던, 그들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가진 것만큼 많이 버렸다. 그 버림을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었느냐 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고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림으로써 세상의 것을 소유한 채로는 누구나 거룩한 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렇게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믿음과 순종을 보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1열왕 19,20-21 참조), 그들은 ‘집에 가서 식구들하고 이야기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약한 신앙을 굳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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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공관 복음은 공통적으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하던 어부였습니다. 고기를 잡던 어부는 이제 사람을 낚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와 함께 복음서는 그들이 지체 없이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첫 제자들의 모습은 말씀에 대한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독서의 표현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의 응답은 믿음의 행위이고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행동으로 응답한 제자들도 아직 확고한 믿음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오해하기도 하고 가르침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에 한 번 응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자주 그 말씀을 듣고 되새기며 그에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들의 믿음이 깊어지는 것처럼 우리도 꾸준히 그 말씀을 듣고 말씀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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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18-22)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너희는 이제까지는 먹고살기 위해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만들겠다.’라는 말씀은,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또 사도가 된 일은 모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어부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이 말은 어부 출신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를 선택한 일도 우리가 한 일이고, 신앙인이 되기로 결정한 것도 우리가 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뽑으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5)
여기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씀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인생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고, 또 예수님을 인생의 목적과 목표로 삼고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말씀은 ‘부르심’이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는 말씀은, 부르시는 이유와 목적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직’을 맡기기 위해서 부르시는 말씀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은총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닌데, 응답한다면 받게 될 큰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응답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복음 선포도 부르심이고, ‘강제 명령’은 아니지만, 만일에 자기에게 전해진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그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멸망의 길로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고, 그래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여기서 ‘사람을 낚는다.’는 표현은 많이 이상한 표현입니다. 다른 좋은 표현들이 많이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사람을 낚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이 표현은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사용하셨을 뿐이고, 표현 자체에 특별한 뜻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 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꺼내는 것은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신앙인은) 예수님에 의해서 ‘낚인 사람’이 아니라 ‘구원된 사람’입니다.
‘그물을 버리고’ 라는 말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또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음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들을 실제로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버리다.’ 라는 말은, ‘초월, 이탈’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또는 방해만 되는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과 애착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신앙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일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선교활동은 ‘돈의 힘’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하는 활동입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활동비와 생활비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돈의 힘’에 의지하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선교활동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믿음’과 ‘열정’입니다.) ‘곧바로’ 라는 말은, 부르심에 응답할 때 제자들이 전혀 망설이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또 이 말은, 그들이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부들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요한 1,35-42).>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는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셨음을 나타냅니다. 선교활동은 ‘교회의 설립 목적’이기도 하고, ‘교회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말은,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들과 단절된 채로 혼자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생활, 그리고 밖에 있는 사람들도 초대해서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생활,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을 온 세상으로 확산시키는 생활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첫 번째 사랑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는(선교활동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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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안드레아는 요한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베드로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요한 1,42)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이 ‘반석’이라면 안드레아 사도의 이름은 ‘남자다움, 용기’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30년 동안 변함없이 바오로 사도의 말을 실천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복음화 학교’입니다. 저는 1991년에 복음화 학교와 인연을 맺었으니 29년이 되었습니다. 2002년에서 2005년 그리고 2011년에서 2018년까지 10년 동안 담당 신부로 함께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는 1단계부터 5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매월 기도회 미사와 후원회 미사가 있습니다. 단계를 마치면 피정과 미사가 있습니다. 저는 미사에 함께 하였고, 성지순례를 같이 다녀왔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각 단계는 모두 평신도 강사들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졸업생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사람은 강사로서의 교육을 다시 받습니다. 자신이 들었던 복음의 기쁨을 학생들에게 전하는 강사가 됩니다.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강사들은 세상을 향해 던졌던 그물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화 학교는 원하는 곳이 있으면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까지 가서 학교를 열었습니다. 봉고차 안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성당에 가서 복음화 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 새벽1시가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피곤하다며 힘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다면 못할 일입니다.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할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쁨이 크기에 먼 길을 기쁘게 다녀 올 수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의 열정과 헌신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복음화 학교와 함께한 시간은 제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평신도들의 열정과 헌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 학교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고마워하면 고마운 일이 생깁니다. 기뻐하면 기쁜 일이 생깁니다.” 20,000명이 넘는 사람이 복음화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분들은 기도하는 신앙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봉사하는 신앙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에파타(열려라)”라고 하셨을 때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탈리타쿰(일어나라)”이라고 하셨을 때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화 학교를 통해서 닫혔던 신앙의 문이 열렸습니다. 어둠과 절망에서 일어났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복음화 학교와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복음화 학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해 줄 것입니다.
지난 30년처럼 앞으로의 30년도 주님의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복음화 학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큰 바위 얼굴처럼, 동네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언제나 복음화 학교와 함께 하시는 정치우 안드레아 선생님께도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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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마태오 4,18-22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믿음 희망 사랑을
곱게 담아 건네는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스쳐 지나도
늘 머무는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겉만 핥지 않고
속 깊이 스미는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눈길 받는 이의
눈길이 간절한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모두를 온전히 품되
올곧이 하나에 깃든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하나하나에 깃들어
모두에게로 향하는
그분의 눈길 말이에요
그분의 눈길을
지니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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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날마다 생존을 바다에 맡겨야 하는, 어쩌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살아가기에는 힘든 여건 속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이 주저 없이 그물을 버리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 예수님의 복음에 응답하고자 했던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극적인 반전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지만 그를 이끈 평생의 신념은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라는 확신이었고,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쉬는 교우들의 냉담 이유의 첫째는 먹고 사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직업과 노동 여건상 성당에 나가기 힘든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어떤 이는 성당에 나가도 사제나 수도자, 신자들의 모습 속에 실망만 늘어나 차라리 혼자 믿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결코 나를 홀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는, 나와 함께 산 이들이 나로 말미암아 얼마나 행복했는지로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제자들과 같이 특별한 소명을 가진 이들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나를 위로하고 곁에 있어 줄 이웃을 찾기 전에, 내가 누구를 위로하며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내 곁에 누가 있습니까? 그들을 낚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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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백광현 마르첼로 신부님]
<부르심의 여정>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만나시기 위하여 길을 걸어다니시고,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머무르십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같은 여정을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여정은 자신을 위한 여정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어둠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빛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여정입니다. 제자들이 이 여정을 걸어 가는 이유는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사랑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사랑 때문에 온전히 자신을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라는 것은 단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 응답할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선배 신부님들은 가끔 ‘성소는 관 뚜껑을 닫을 때 완성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수도자로서 매일 합당하고 충실한 선택을 해야만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나약함에 넘어지는 순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약점은 저를 겸손하게 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게 합니다. 오늘도 제가 서원한 순명, 청빈, 정결의 삶을 보다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주님께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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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터넷에서 배우 차승원 씨와 배정남 씨의 패션쇼 런어웨이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두 분은 모델로 연예계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일까요? 이들의 런어웨이 장면은 정말로 멋졌습니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는 무대 뒤의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사람, 무대 설치를 담당하는 사람, 진행 담당을 하는 사람 등이 보였습니다.
또 이 패션쇼를 위한 옷을 만든 디자이너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이 패션쇼를 보고 있는 객석의 관객들도 있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이 이 패션쇼를 위해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 모든 사람이 있기에 빛나는 패션쇼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카리스마가 있고, 능력이 뛰어나도 해도 온전하게 이 패션쇼를 진행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 도중에 “도저히 못 하겠다.”라고 소리치며 도망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더 멋집니다. 그리고 의미도 생깁니다.
종종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혼자 다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혼자만 빛나는 때는 없습니다. ‘함께’의 중요성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데 혼자서 못하시겠습니까? 혼자서 충분하십니다. 오히려 인간 제자들로 인해서 더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 뜻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이럴 바에는 예수님 혼자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함께’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을 제자로 뽑으신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나약함이 가득한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배와 그물을 버리고 또 가족도 뒤로 하고 따라갑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제자단이라는 공동체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기 위해서는 속된 욕망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세속적인 행실, 물질적 재산, 육신의 부모라는 애착을 버린 제자들의 모습에서 ‘함께’ 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것만을 챙길 수 있을까요? 또 자기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내려놓아야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내려놓지 못해서 함께하지 못하고, 꽉 움켜쥐고 있어서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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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면 강합니다>
솜뭉치 1Kg과 쇳덩어리 1Kg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요? 솜뭉치라고 하니까 쇳덩어리가 더 무거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의 무게는 똑같이 1Kg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입으로 불면 날아가는 솜도 뭉치고 뭉치면 쇳덩어리와 같은 묵직한 무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다, 힘들다 등의 부정적인 말들이 가득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서 더 이런 말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이렇게 힘겨워하는 이웃들이 많은 지금,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항상 함께함으로 잘 극복했습니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개인의 힘만 발휘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함께한다면 우리의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 기도의 힘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뭉치면 분명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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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모범적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향은 어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로 따름으로써 끝까지 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순명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리재고, 저리재고 하지 말고 "곧바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주저한다면 그것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순명과 실행을 통해서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깨닫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나를 믿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오너라’하셨습니다. 믿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확고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선택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마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주님을 따름으로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우리의 믿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답니다.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모범과 표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과 줄다리기를 하지 말고 곧바로 따릅시다.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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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부르심, 버림, 따름-
11위령성월의 마지막날이자 또 대림 제1주간 월요일인 오늘 11월30일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베드로의 동생으로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안드레아 사도의 그리스어 이름 뜻은 ‘사내다움’, 또는 ‘용기’라 합니다. 형과는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로 러시아에 최초로 복음을 전했으며 러시아는 물론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 두 번째 아름다운 후렴이 안드레아의 인품을 잘 묘사합니다.
“안드레아는 꽃다운 향기와 같아, 주님이 사랑하셨도다.”
특기할 것은 동방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60년경 그리스의 파트라이에서 X자형 십자가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형장에 끌려갔을 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기도를 바쳤다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해 다오.”
바로 여기에 근거한 오늘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입니다. 사도의 십자가 X자형은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글자이고 자기는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를 택할 수 있는 자격이 없기에 X자형 십자가를 택했다 전해지며, 스코틀랜드의 국기나 영국 국기에 새겨진 X는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안드레아를 포함한 어부 넷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이들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참으로 운명적이요 결정적입니다. 이들을 보자 첫눈에 반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곧바로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믿음의 여정에 오릅니다. 부르심, 버림, 따름이 일거에 이루어집니다.
마침 지난 토요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8개국에 걸친 13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는데 강론은 마르코 복음중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일화였습니다. 즉 교황님은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르기를 원한다. 그러니 추기경들 역시 복음의 제자들처럼 내 길이 아닌 언제나 주님의 길위에서 머물러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스승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의 순종이 뒤 따랐고, 둘째 제자들은 주님의 협조자와 하늘나라의 증인으로, 또 그분의 수확의 일꾼으로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런 믿음의 여정을 통해 제자들은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짐으로 주님을 닮아 주님의 현존이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따름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나 이제나 예수님의 제자됨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 충실한가 묻게 됩니다. 한 두 번의 부르심이, 자기를 버림이,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살아 있는 그날까지 깨어 부르심, 버림,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여정을 통해 주님과 우리의 사랑의 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이며, 사실 주님과 깊어져 가는 우정의 사랑 관계보다 더 소중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도 제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따랐으며 이런 순교의 죽음은 늘 우리를 감격케 합니다. 추기경들의 붉은 옷이나 모자도 순교의 붉은 피를 상징합니다.
오늘 제1독서 바오로의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여정중에 매일 미사중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공부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말씀공부와 더불어 튼튼해지는 믿음이요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오로의 믿음에 대한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1.믿음은 설교자들이 선포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한 응답이다.
2.믿음의 본래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3.믿음은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다.
4.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런 믿음을 통하여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
5.믿음을 통한 의화에서 아브라함에게 내린 약속이 완수된다.
6.믿음을 통하여 받는 의로움은 동시에 죄의 용서이고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이다.
7.믿음은 참다운 깨달음이기는 하지만, 이 지상에서는 완전히 빛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야 분명히 볼 수 있게 된다.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 믿음은 희망과 연결되어 사랑으로써 움직이며, 믿음의 여정은 동시에 희망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 된다. 주님과 우정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이다.
믿음의 뜻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복음의 네 제자들이나 우리의 성소는 순전히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성소는 우연이 아니 필연적인 하느님의 섭리이기에 부질없는 가정이자 상상입니다만, 만일 복음의 네 제자들이나 우리가 부름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런지요. 새삼 주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이요 우리 구원의 유일한 출구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성소를 부단히 새롭게 하시고, 당신과의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하시며, 믿음의 여정에 우리 모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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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대림 제1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말씀께서는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는 우리에게 각자의 부르심을 되짚어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들은 어부였다."(마태 4,18)
예수님의 첫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어부입니다. 복음사가는 다른 부연 설명 없이 아주 간결하게 그들의 원래 직업을 드러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은 어부로 잔뼈가 굵은데다 한창 일할 왕성한 활동력을 지닌 이들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실 때 그들이 처했던 상황과 실존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본래 가졌던 직업과 성향, 기술 등을 존중하면서 그들을 익숙하나 새로운 소명에로 부르시지요.
"그물 배, 아버지"(마태 4,20.22)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버린 것들입니다. "그물"은 세속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도구이고, "배"는 물고기가 있는 장소로 그들을 실어나르는 수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육적 관계성을 대변하지요.
물고기를 낚던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뀌려면, 대상이 바뀐 만큼 도구와 수단과 관계도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면 그들은 "그물"이 아니라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또 "배"는 교회 공동체이고 제자단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버지"는 물론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성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는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구원이 되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제자가 된 이는 이제 그 말씀을 선포하는 사도가 됩니다. 제자가 선포한 말씀을 들은 이는 그 말씀을 믿어 또 다른 제자가 되고, 그 제자의 제자의 선포로 누군가 듣고 믿어 ... 이렇게 신앙의 계보가 이어지지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우리는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고, 또 그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구원됩니다. 말씀과 선포와 들음과 믿음의 사이클은 이천 년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각처에서 매순간 벌어지는 기적입니다.
모든 부르심은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한처음에 계셨던 말씀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말씀이신 분께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부르시어 재창조를 이루십니다. 부르심은 그동안 우리의 삶을 지배해온 도구와 수단, 관계를 내려놓고 부르심 받은 이에게 맞갖는 것들로 전환하라고 초대합니다. 성소나 소명 등 일생의 대전환이 될 부르심이든, 매일의 삶 안에서 다가오는 부르심이든 원리는 같습니다. 부르심과 응답을 중심으로 Before와 After는 달라지지요.
사랑하는 벗님! 교회 제도 안에서, 개인 소명 안에서, 매일의 도전과 헌신 안에서 우리 각자는 어떤 부르심에 응답해 살고 있는지 숙고하고 성찰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르심을 사이에 두고 Before와 After는 달라졌겠지만,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창조 때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새겨주신 모상성과 개별성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 중심축 위에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마련하셨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우리 모두가 듣고 응답한 그 부르심이 우리 모두를 의롭게 하고 구원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각자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충실히 걷고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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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주님의 제자의 신원(정체성)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3)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주님의 참 제자(신앙인)이며, 그렇지 못하면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서 6, 68) :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목숨을 거는 순교자는 주님을 떠날 수 없는 이유와 목적이다.
♣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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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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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파괴를 예언하셨을 때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0) 그리고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고,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으며(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한편,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요한복음> 1장 40절에 근거하여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프로포클레토스’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그는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지며, 그래서 안드레아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그렇다면,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이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입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던, 곧 전교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립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며,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며,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고 하신 예수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먼저 “사람 낚는 어부”로 양성 받아야 할 일입니다. 곧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르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 받았듯이, 우리도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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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입맛에 맞는 것만이 아니라, 주신 모두를 거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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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4,19)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에서 형 베드로와 함께 첫 번째 사도로 불림을 받은 '성 안드레아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 네 사람', 곧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시는 말씀과 그들을 고기가 아닌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들은 '곧바로'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끝까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삽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안드레아 사도는 형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기 위해 물질적인 투자는 물론이요 시간과 사랑을 아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사람을 낚는 것', 곧 '사람을 예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고, 이것이 또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너를 예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너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나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어야 하고, 내가 먼저 잘 믿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로마10,14.18)
성령을 받은 이후부터 죽기까지 복음을 선포한 열두 사도들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성령을 받기 위해서 온 마음으로 미사와 기도와 말씀 안에 머물고, 이 성령의 힘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그래서 우리도 사람을 낚는 '또 하나의 사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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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9-dDXTPm1A&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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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 22)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은
안드레아
사도처럼
변화의 삶을
새롭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
이 모두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다.
버리지 않고서는
가벼워질 수 없고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다.
버린다는 것은
가장 좋으신
주님을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이다.
잊지않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따른다는 것은
방해되는
이 모든 것들을
버린다는 것이다.
버려야
얻을 수 있는
복음의
참된 기쁨이다.
버린다는 것은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
곧바로 내려놓는
오늘의 기쁨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는 버리며
주님을 따라간다.
낡은 감정과
낡은 거짓을
버리고
새롭고 더 나은
삶을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부름심에
응답하는 삶이
버리는 삶이며
따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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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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