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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전설」을 보면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고통이 아닌 쾌락으로 여긴다.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느낀다. 고통을 가하려던 자들이 그들이 가하려고 했던 것보다 더 죽음과 고통을 열망하는 순교자들의 모습에 오히려 충격을 받는 내용들은 황금전설의 흔한 레퍼토리다. 이러한 성인들의 순교를 모범으로 삼았던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순교할 각오를 하고 있었고, 이런 태도 때문에 고대 로마의 사법 당국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태도가 괴상하고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왜 순교 전설을 만들고 퍼트리며 순교를 성스럽고 본받아야 할 행위로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것일까?
예수가 살던 시대, 십자가형보다 더 수치스럽고 경멸을 받는 처형은 없었다. 알몸인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상처가 난 채로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고, 새들이 맨살을 쪼아 먹어도 무기력하게 일방적으로 당해야만 하는 형벌이었다.<자료6> 범죄자의 최후를 적나라하게 경고하여 범죄 억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형벌은 공개적으로 집행되었고, 범죄자들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불명예스럽게 처형된 자들의 썩은 살에서 나오는 악취는 너무나 역겨워서 사람들은 그 광경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오염되었다고 느꼈고, 십자가형에 관련된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으며, 그 말 자체도 역겨워했다.
이러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볼 때 불쾌하고 혐오스럽고 기괴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예수의 죽음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려 하면 움츠러들었으며, 신앙심이 깊은 자라도 예수의 죽음을 재현한 그림이나 형상을 보면 위축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십자가형을 폐지하고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신도들은 예수의 수치스러웠던 형벌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성스러운 희생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그들이 본받아야 할 ‘순교의 원형’으로 삼았고, 박해로 죽임당하는 것을 ‘예수를 본받아 죽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널리 알리고 성취한 순교’로 해석했다.<자료7> 그들은 결국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의 죽음을 성스럽고 본받아야 할 순교로 둔갑시키는데 성공했다.
신도들은 예수를 본받아 순교를 원했다. 순교 성인 동정녀
율랄리아의 성인 전기에도 그러한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다시안(박해자)은 결국 상처투성이가 된 율랄리아로 하여금 알몸으로 도시를 돌게 해 조롱거리로 만들고는 십자가에 묶어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율랄리아가 십자가에 묶였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섬기는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한없이 기뻤다. 그리고 십자가에 묶인 채 몇 번이고 믿음을 고백하며 신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처럼 나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피를 흘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온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을 내놓고 싶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보다 더 심하고 모진 고통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독일의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에머리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은총이라 표현하기까지 했다.
“나는 나를 죽여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느님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처럼 나 역시 절벽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는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천한 장소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든 심리 상태지만 교육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교육을 통해 순교를 영웅시하고 죽음을 마다않는 마음가짐을 갖추게 했다.
구약에서는 율법과 계명의 준수를 위해 순교의 개념이 사용되었다. 독일의 신학자 빌헬름 부세는 “유대 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임을 역설하며 마카베오 시대의 신앙인들의 열정에서 순교가 태동했다고 말했다. 마카베오기는 유대교에서 정경에 포함하진 않았지만 구약의 마지막 역사서로서, 마카베오라 불렸던 유다와 그 형제들이 신의 도움으로 이교도를 물리치고 유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되찾는 내용이다.<자료8> 유다 마카베오와 부하들이 신이 도와줄 것을 믿고 용기를 내어 율법과 조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 죽을 각오를 하는 등(마카베오 하기 8장 21절) 전체적으로 순교를 장려하고 영웅시하는 순교 신학이 담겨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역사를 실제 역사로 교육받아, 자신들이 ‘2천 년 유랑 속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학살에서도 끝내 살아남아 독립을 쟁취한 뛰어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믿음과 교육 덕분에 유대인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민족간 결속력을 다질 수 있었다.
이슬람교는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는 무장단체들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슬람 자살폭탄테러범의 심리적 범행동기에 관한 한 논문을 보면 자살폭탄테러 사건을 ‘순교적 자살 사건’이라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살테러공격의 역사를 보아도 이에 부합한다. 인류 최초의 자살테러공격은 성경에 기록된 유대인 영웅 삼손이 유대인과 적대적 관계이던 필리스타인의 재판관들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으며, 역사적 기록으로는 13세기, 이슬람을 침공한 십자군의 군함 자폭 공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자군은 이교도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음으로써, 최후의 심판날에 구원을 얻으리라 믿었다.
논문은 종교적 이념의 세뇌화와 순교적 생사관이 자살 공격의 본질적인 범죄심리로서 행동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자살폭탄테러공격자로 선정되면 수개월간 정보를 차단하고 외부와 격리하여 종교적 이념을 교육시켰는데, 이스라엘의 테러리즘 심리학자 아리엘 메라리는 이런 과정을 출구가 나올 때까지 중도에 이탈할 수 없는 터널에 비유하였고, 터널이라고 칭하는 이 심리적 조작과정을 통과하면 종교적 집단주의에 동화되고 자발적인 영웅주의적 테러심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순교 교육 덕분에 이슬람 무장단체는 수월하게 자살폭탄 대원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일본에서도 천황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는 교육이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제국 시대 전쟁에 참전했다 생존한 일본군의 인터뷰를 실은 책『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을 보면 일본이 군인들을 어떻게 목숨을 걸고 참전하게 했는지 알 수 있다. 생존자는 인터뷰 내내 거듭 ‘교육의 무서움’을 강조했다. “너희는 천황 폐하의 자식이니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식의 교육을 받는데, 이렇게 훈련되다 보면 나라를 위해 죽는 것만이 정말 소망이 되어버리고, 그 믿음을 머리 속에 담아두게 되니까 전혀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자살 특공대였던 가미카제 대원들에게는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는 말로 독려했다.<자료9> 야스쿠니에 간다는 말은 죽으면 신이 될 수 있으니 안심하고 죽으러 가라는 것이었고 그런 교육을 받았던 대원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과 같이 종교의 지배자들은 신도들을 순교할 각오로 무장하게 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수준의 최고의 충성심과 지배력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런던의 핀스베리파크 모스크 밖에서는 이슬람 프로파간다의 비디오를 팔았다. 가장 잘 팔리는 내용은 자살폭탄 테러범의 생애 마지막 순간들을 담아놓은 필름이다. 이 비디오 영상에 의하면 자살폭탄테러범의 마지막 순간의 모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천국의 문에 들어서는 환희에 찬 얼굴이었다. 이슬람에선 율법에 따라 순교시 천국을 보장받았고, 환희에 찬 얼굴은 종교적 순교 순간의 심리를 나타내는 것이며, 무슬림들이 이교도와의 전쟁에 서슴없이 목숨을 바치는 동기가 되는 것이었다.
가톨릭의「황금전설」에서도 순교의 순간, 환희를 느끼는
성인을 묘사하는 장면이 흔하게 등장한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가톨릭은 순교로 점철된 역사를 지녔다. 마르텡 모네스티에의「자살백과」에서는 “스스로 희생하는 것만이 자살이 아니다.” 라며 순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순교는 구원의 확신을 주고 천국을 보장해주는 행위였다. (…) 이미 어찌 될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죽음의 상황을 피하지 않는 것도 자살에 해당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 중 일부는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거나 죽음을 찾아서 일종의 자살을 실천했다. 그리스도교는 순교를 가장한 자살 위에 교회를 세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앙을 이유로 엄청난 고통과 학대를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받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성인의 반열에 놓고 숭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도교가 창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개념에 놀랐다. 삶의 목표를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닌 내세에 제시했다는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삶을 장애물로 여기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흥미를 거의 느끼지 못하게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 중 상당수가 쉽게 자살을 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 하에서 삶의 의미를 거의 느끼지 못했던 이 사람들이 천국이라는 낙원에 가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생을 마감해야겠다는 유혹에 빠져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초기 가톨릭교회는 진정한 행복, 영원한 영광은 이 세상의 삶 너머에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자살로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에 부응하고 있다. 영국 작가 알바레즈는 논문에서 순교는 로마인들의 박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창조라고 말했다.”
– 마르텡 모네스티에의「자살백과」中
자살의 동기가 된 그들의 교리가 진리가 아니라면, 그들의 가르침은 ‘자살 유도’이며 ‘살인 중의 살인’일 것이다.
지난달 25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가 “전쟁에서 죽으면 모든 죄를 씻어준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고 있다.<자료10> 그는 지난달 21일에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광과 영생을 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21세기의 대중들은 1095년, 가톨릭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을 모집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신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했을 때 열렬히 환호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종교 지도자가 천국을 미끼 삼아 전쟁 지지 발언을 이어가자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 줄을 잇고 있으며, “키릴 총대주교를 최전방으로 보내 그의 죄를 씻게 해주자”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희대의 종교 사기극으로 평가받는 면죄부도 최소한 목숨을 요구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이 있을 때 더욱더 철저하게 기쁨에 넘쳐 악을 행한다.”고 얘기한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주장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사실임이 증명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독일의 철학자 프레드리히 니체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가장 무섭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진실을 알 생각이 없다.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라고 했다. 이성을 잃고 무비판적으로 믿는 것은 광신(狂信)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은 맹신(盲信)이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가히 숭고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증거 없는 그릇된 신념’이 아니라 ‘진실에 기반한 올바른 신념’이라야 그 가치가 있을 것이다.
https://theweekly.co.kr/?p=74841
첫댓글 생각해보게 되네요
잘보고갑니다
잘보고가요
저게 과연 순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