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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현충원, ‘현충일 노래’ 진화(進化)/ 신작 단편
이원우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이사 ‧ 부산북구 문인협회장 및 문화예술인 협회장 역임, 전 부산명덕초등학교장 ‧ 무료노인학교 21년 운영(매주 토요 오후), 전 26사단 안보 강사 및 홍보대사, 저서 ⁚ 소설집 『연적의 딸 살아 있다』 등 15권 · 수필집 『열아홉 살 과부의 스물아홉 살 딸 』 등 6권 ‧ 기타 3권,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 ‧ 부산교육상 ‧ 황조근정훈장 ‧ KNN문화대상 ‧ 화쟁포럼문화대상 ‧ 경기PEN문학대상 ‧ 부산 PEN 문학대상 ‧ 경기문학인 문학대상 · 『한국수필』 청향문학상 · 부산수필 대상 · 허균문학상 · 부산북구문학대상 · 『문예시대』 문학대상 등
예비역 부사관인 W는 늙은 가수다. 여든을 훌쩍 넘긴…. 머리카락은 온통 백발이라, 노병(老兵)을 상징한다. 그걸 감추어(?) 주는 건 밖으로만 나가면 쓰고 다니는 군모(베레모)뿐이다.
그는 대한가수협회에 914번째로 등록된 정회원이기도 하다. 그걸 가끔은 자랑삼는다. 그가 큰소리치면 칠수록 많은 사람은 이러기 예사이리라. 뭐 이름만 가수지 실력은 없어!
꾀죄한 그의 외관만으로는 누구든 그런 느낌에 빠지기 마련일지 모른다. 그런 수모(受侮)를 상쇄시켜 주는 건 문인(文人)이라는 자존심이다. 언제든 대중가요 노랫말 정도는 단번에 만들어낼 수 있는, 대중의 정서와 부합되는 삶을 살아왔으니 그건 그가 가요계에서 휘두를 수 있는 비장의 무기랄밖에. 방황 끝에 소설 창작에만 몰두하는, 그는 근래 이 명제를 항상 머리에 떠올리며 산다. 시는 소나기요, 소설은 흙탕물, 수필은 지하수에 비유할 수 있다!
수필을 멀리하고 근래 거의 소설 창작에 전념한다. 흙탕물 속에 살고 싶은 거다. 억지 논리라 할지 모르지만, 거기서 허우적대며 대중가요 가사 몇 곡을 창작하고 싶은 거다. 그는 작사가라는 이름을 하나 더 달겠다며 모진 결심을 하고 있다.
어쨌거나 서울에서도 상당 기간 여기저기서 나름 활약하는 그를 말린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에는 가수협회라는 단체가 두서너 개 있다. 그가 속한 데 외는 군소(群小)라 폄훼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인 걸 어쩐단 말인가? 장삼이사로서 가장 노래를 많이 부른 사람이라는 세평(世評)이 그를 대한가수협회 소속 가수로 만들었다. 남진이며 김흥국 등이 회장이었다.
못난 그도 박수를 달고 산다. 서울 근교의 어지간한 문화 행사에서, 그의 지휘를 겸한 ‘애국가 선창’을 직접 보거나 영상으로 시청한 사람은 수두룩하다. 어디 그뿐이랴. 그런 비슷한 공간에서 그는 하객이나 관중들로부터 가곡이나 대중가요, 나아가 민요 한두 곡을 불러 달라는 청을 받기 예사다. 특히 수원 등지에서는 대접을 받는다고 착각 아닌 착각을 한다.
그는 O Sole mio(이탈리아 가곡)나 Oh Danny Boy(아일랜드 민요)도 자주 목청에 싣는다. 가곡도 그는 비껴가지 않는다. 여든이 넘었지만, 그는 스마트폰에서 그것들을 MR로 찾을 줄 안다. 선각자? 아서라 우습다. 그랬다가는 지나가는 소가 웃겠다.
허풍을 보태 이야길 이어나가 보자. 사회자에게 부탁하면 반주 소리도 쾅쾅 실내를 채울 정도니, 열창한다는 소릴 들을 수밖에. 까짓 잘하고 못하고는 둘째 문제다. 얼마 전에도 큰 행사장의 단상에서 지휘봉을 든 채 ‘애국가’를 사장조로 음정 하나 박자 하나 안 틀리고 정확하게 ‘소화’해냈더니, 여기저기로부터 찬사의 소리가 들리더라. 거짓말이라고? 이번엔 그게 의심 많은 사람의 자유겠지만, 모른 척 차라리 함구하는 게 미덕 아니겠는가!
내친김에 얘기. 뭐니 뭐니해도 그의 저력은 야구장에서 활약에서 확연히 증명됐다.
오래전 일이다. 부산 출신인 그는 타관에 산 지 오래면서, 그때까지도 롯데를 홈구장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끈질긴 섭외 끝에 사직 야구장에서 ‘애국가 선창’을 선보였다. 텔레비전 방송에서 생중계를 했겠다. 근데 이게 어찌 된 셈인가? 평소에 인색하기로 이름난 해설 위원이며 캐스터가, 듣기에 거북할 정도로 칭찬을 하는 게 아닌가? 성악을 전공한 분 같다, 정말 잘 불렀다, 시원하다, 음정과 박자가 정확하다,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됐다!
그 ‘애국가’ 부분만 잘라서 딸이 유튜브 계정을 하나 만들었는데, 여태까지의 구독자는 10명도 안 되지만, 조회는 엄청나서 거의 7천 명에 육박하니 미스터리라 하자. 지금도 그야말로 꾸준한 증가세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생각해 보면 기분 좋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지금은 없어진 것 같은 X*M TV에서 중계했던 건데, 행여나 저작권 때문에 시비 걸지 않는가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하지만, 그 또한 전무(全無)한즉 알다가도 모른 일?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더니 그는 이번에 서둘렀다. 인터넷에 떠 있는 그의 수많은 영상 1백여 개 중에서 두서넛을 골랐다. 그때까지 쭉 생각해 왔던 유튜브 계정에 실을 준비를 해 달라고 딸에게 부탁한 거다. 애국가는 물론 현충원 묘역에서 군복 차림으로 ‘전선야곡’에 목메는 것, 또 다른 하나는 60년대 초반에는 남진이나 나훈아보다 더 인기를 누렸었던 쟈니리와 듀엣을 하는 것. 그리고 저 유명한 ‘비목’ 작사가 한명희 교수의 손을 잡고 그 가곡을 부른 것!
여담인데, 그와 쟈니리의 두 번째 공연(共演)은 그 자체가 파격이었다. 각계각층 남녀노소의 하객들, 특히 현역 장병들이 모인 가운데였으니 말이다. 노래는 ‘허무한 마음’. 탑 클래스였던 현역 가수와, 세 살 아래인 돌아온 하사(下士)가 주도하다시피 한 행사였다. 한때는 라이벌(?)이었던, 고(故) 정원의 그 히트곡을 같이 불러 준 쟈니리! 그래서 W의 존경을 받는 쟈니리다.
땅을 치며 울 정도의 얘기 하나. 그 두어 해 전의 ‘제대 50주년 기념 모부대(母部隊) 장병 초청 기념 콘서트’를 거론하자. 전무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창군 이래 처음이라는 그 행사를 치르고 났더니 어느 포털사이트에서 ‘오늘의 인물’로 그를 선정해 주는 게 아닌가? 그런데 영상이 안 남아 있어 마치 사람이 죽은 듯, 오호통재(嗚呼痛哉)를 외치는 그인 거다.
몇 번의 행사에 문인이며 가수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으므로, 문단이며 가요계에서 작은 파문은 일으켰다 하자. 하지만 부작용은 나게 마련, 그는 자신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고 착각할 정도가 되어 우쭐대다가 양쪽으로부터 밉보이는 신세로 전락하는 충격도 맛보았다.
어쨌든 그 영상을 그와 같이 일하는 인터넷 신문사 기자가 유튜브에 탑재하게 된 게 진화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는 기자의 그 영상을 줄곧 물끄러미 시청만 하고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 그걸 <돌아온 이 하사>라는 유튜브에 옮겨 송출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누가 그에게 글을 쓰라 했다 치자. 그럴 땐 잡문이라도 끼적거린다, 머릴 싸매고. 하지만 기기(器機)를 만지라면 두려움부터 앞선다. 늘 가까이 있으면서도 컴퓨터에 서투른 까닭이기도 하다. 컴맹? 맞다! 하니 유튜버로 데뷔하기까지 힘이 들었었고, 주눅부터 들었다고 할까?
하지만 궁여지책은 머리에서 나온다. 그는 우선 딸에게 부탁하여 그때까지 케이블 방송이며 서울 혹은 근교의 문화(문학) 행사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의 영상을 서너 개 슬쩍했다. 왜 ‘슬쩍’이라 하느냐 하면 행여 저작권 문제에 발목을 잡히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대상은 앞서 거론한 바 있다.
모두 다 조회 수가 수천 회에 달하니, 알 만한 사람은 아는 거라 이런저런 군소리를 덧붙일 필요는 없지만, 특별히 들먹이는 아래의 ‘현충일 노래’는 사정이 다르다. 해서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다.
딱 3년 전 현충일이었다. 어느 사단 포병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있었던 예비역 육군 중령이 현충원에서 촬영하여 계정도 확실하지 않은 데에 올려놓은 것이어서 찾기조차 힘들었던 자료였다. 거기에서 W 부사관 그가 군복 차림 그대로인 채 노래한 뒤 사자후(?)를 토한 것이다.
“국민 여러분! 55년 전에 제대한 일반 하사입니다. 지금 현충원에 와 있습니다. 바야흐로 ’현충일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국민 여러분. ‘현충일 노래’는 현충일에만 부르는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1년 365일, 날이면 날마다 우리 모두의 목청에 실음으로써 겨레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임들의 넋을 기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후회했다. 반주도 없어서 정확한 음정이며 박자도 맞출 수도 없는 ‘현충일 노래’였으니…. 게다가 말이다. 아뿔싸! 가사를 틀리게 소리 낸 거다. 언필칭 노병(老兵) 혹은 간부(하사는 간부 대접을 받는다, 어디서든 말이다.)인 그가 일생일대의 실수를 범한 터, 그야말로 유구무언이라 할 수밖에. 다시 들어봐도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리’에서 ‘정성’이 아니라 ‘충성’이다.
그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어 코웃음을 치는 자신을 보고 흠칫 놀란다. 그의 혼잣말.
“뭐, 국민 여러분? 네가 뭔데 그토록 거창하게 5천만 국민을 ‘호출’한다는 말인가! 그러나저러나 행여 시청자가 있다면, 그들은 너를 보고 도대체 뭐라 할까? 쯧쯧, 혀를 차겠지. 그러고 말이야. 그들은 중얼거릴 테고. 군복이며 군모에 버젓이 하사 계급장을 단 노병이 장난삼아 저러는 건 아닐진대…. 그들 중 상당수는 일종의 망발이라고 꾸짖을지도 모르지 않나?”
아무리 그가 잘못 불러 아무런 각광(脚光)을 받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그로 봐서는 계륵(鷄肋)으로까지 폄훼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사연이 있는 자료였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모순투성이겠지만 그 ‘난맥상(亂脈相)’을 한 번 풀어나 보자.
극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도 그가 찾아가는 아주 중요한 유택(현충원)이 있었다. 그 영상도 거짓말 같은 사연의 주인공 앞에서 녹화한 것이었다.
그 주인공은 아흔 살을 넘긴 예비역 장군. 장군과 하사라면 하늘과 땅 차이다. 문단에서도 존재감에서 엄청난 차이가 남은 물론이고말고. 현역 시절이라면 고개도 못 들 그분 아닌가.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군은 신임소위, 17세의 소대장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부상한다. 거의 시체와 다름없는 소위를 구해 준 적군 사단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남하해 부대로 복귀한다. 하지만 소대장은 이미 전사자로 처리되어 현충원에 유해 없는 유택이 마련되고 비석이 세워진 뒤였다. 그럼으로써 우리 전사에 남는 하나의 산 자료로 국민에게 회자(膾炙)되어 오는 터였다. 특히 돋보이는 게 적군 사단장의 휴머니티였다고 하자.
마침 그 시간에 이웃 유택을 참배하러 온 한 가족 다섯 명이며, 견학 삼아 온 듯한 나이 든 남자 셋도 이 현장을 목격하고 우르르 몰려들어 왔던 참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었지.
“오늘 대단하신 분들을 만나게 돼서 가슴이 벅찹니다. 이야기의 맥을 짚어보니 여기 묻히신(?) 소위님은 실제 살아 계신 것 같군요.”
“예, 대전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시지요. 월남 전의 영웅이십니다. 바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채명신 장군님이 누워 계시니, 두 분 장군님은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나누시겠지요.”
나머지 이야기를 다 옮길 수 없는 게 유감일 따름이다. 어느새 ‘일행’이 된 그들은 잔디 위에 둘러앉아 한 시간가량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헤어졌다. 그 모습까진 카메라에 다 담지 않았지만…. 아무튼 의미 있는 추억이었다. 그 ‘현충일, 현충원에서의 현충일 노래’는 그렇게 잉태된 것이었으니 결코 잊힐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아무튼 영상을 두고 선배와 나눈 대화.
“그런지 작품이 시원찮아요. 당신이 노래는 잘 불렀는데, 그게 제대로 잡히지도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선배님! 그 자리에서 현충일 노래를 부른 장면을 녹화한 자체가 역사에 길이 빛날 일이기도 합니다. 장군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럴까? 한데 유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편집을 했으니, 그게 오히려 그분께 누(累)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요. 차라리 모든 걸 밝히는 게 도리였는지 모르는데….”
“하회를 기다려 보십시다, 선배님!”
어쨌든 그는 그 영상을 마구 퍼 날랐다, 여기저기에다. 특히 이름 있는 유튜버를 더러 아는지라 그 인맥을 맘껏 활용한 거다. 구독자 수가 10만을 넘긴 데에도 몇 군데 보냈겠다?
대부분의 반응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몇 군데서의 질문과 그에 대한 그의 응답이다.
“이야기로는 들었습니다만, 아직 그 유택이 현충원에 있어요?”
“그럼요. 나는 거기 수시로 갑니다. 노래를 부르러….”
“그분도 자기의 유택을 찾는답디까?”
"예, 내외분이 같이 움직인답니다. 자신의 유택 참배? 그건 특별한 의미지요.”
물론 그 영상을 유택의 살아 있는 주인인 노(老) 장군에게도 보냈다. 문단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모르면 간첩으로 치부될 정도이고, 부인 또한 이름난 저명 화가인 내외분이다. 시원찮다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장군은
“잘했소. 이제 당신 덕분에 내 유택이 더욱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니….”
고 되레 칭찬하는 게 아닌가?
그의 ‘현충일 노래’ 영상 때문만은 아니지만, 장군의 유택을 둘러싼 반향이 긍정과 부정의 둘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전자(前者)는 양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으나, 어느 못된 한 유튜버가 이런 일견 그럴싸한 이론을 내세우는 게 아닌가!
“현충원은 너무 비좁다. 이승을 떠난 장병들이 묻힐 장소가 없다. 말하자면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딸리는 거다. 그자는 아직 살아 있는데, 수십 년째 버젓이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척하다니 언어도단이다. 파헤쳐야 한다.”
유튜버는 장군을 ’그(者)‘라 하였다. 장군의 오랜 팬들은 분노하였지만, 그 내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유튜버에 귀가 솔깃해져 어느덧 ‘파묘(破墓)론자’ 편에 서는 것이었다. 대세는 그렇게 기울었다.
이윽고 장군의 무덤은 평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윽고 거기에 다른 전우의 유해가 묻혔겠지. 사정을 모르는 많은 참배객은 무심결에 지나치기 예사지만, 그날 즉 ’현충일 노래‘의 녹화 관련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특히 노래를 부른 W는 이상할 정도로 접근 하기가 두려운 것이었다. 옛 사단장 두 분의 유택 참배를 위해 올라가면서도 그는 일부러 삥 둘러서 걸어갔다.
중언부언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로부터 영상이 인터넷에서 사라져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고의로 그걸 삭제할 수도 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샅샅이 뒤져 봐야 그 ‘전 국민에게 어쩌고저쩌고’한 뒤 노래를 부른 그 모습을 자신조차 볼 수 없으니 되레 답답할밖에. 그는 언젠가는 찾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끔 하면서 여태껏 지내왔다.
그러구러 세월이 흘러갔다. 몇 년이나…. 그동안 그는 부지런히 현충원에 걸음을 했으나, 여전히 그 장군의 유택 자리를 답사하지 못했다. 가시적으로 나타나 있을 변화가 두려워서다.
그러던 그가 한 달 전 일생일대의 독창을 한 거다. 이 나라에 많은 성악가가 있지만, 그 아무도 흉내조차 못 했던 하나의 ‘돌발 사건’이었다. 국민 가곡 ‘비목’. 작곡가는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라도 작사한 한명희 교수는 생존해 있다는 데서 전무후무한 기록이 비롯된다. 3년 전부터 전화로 인사가 오가는 둘의 사이였다. 언젠가 그가 그분께 이 말씀을 건넨다, 간절하게.
“‘비목’을 교수님 앞에서 한번 부르고 싶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허허, 여한이 없으시겠다? 좀 지나친 표현입니다. 하기야 전우가 부른 노래, 특히 가곡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만하면 ‘비목’을 한 번 그 목청에 실어도 괜찮다고 느끼긴 했습니다만….”
“…….”
“그러나저러나 전우가 열여덟 번 대중가요 콘서트를 연 기록이 있습디다. 가곡과의 관련은?”
“어느 시 교원예능경진대회에서 장려상 받은 기록이 인사기록카드에 올라와 있지요. 숭실대 K 교수와 부산 고신대 오충근 교수가 지휘하는 대형 오케스트라 협연을 했습니다. ‘도라지꽃’ ‧ ‘떠나가는 배’,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문인이기도 해서 둘의 의기투합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하지만 집을 나서려고 하면 코로나가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일부러 미용실에 가서 부사관만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기도 여남은 번이었으니, ‘절망’이 일상이었다 해도 과언 아니었다.
장애는 또 있었다. 자동차 운전을 할 줄 모르는 그였으니…. 아직 지하철 타는 데에도 익숙하지 못했고. 만약 택시를 이용한다면 그 요금이 만만찮을 터, 이래저래 걱정이었다. 그래 그는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혼자 도상(圖上) 훈련에 몰입하며 쓴웃음을 짓기 예사였고말고.
그런데 그에게 너무나 엉뚱한 하나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꿈에서나 그리고 있었던 유튜버로의 데뷔…. 같은 인터넷 신문사의 기자가 그에게 건넨 말이 시발이 됐고 쐐기를 박은 것!
“선배님, 인터넷에 선배님의 영상이 만만찮게 떠 있습니다. 어느 영상의 조회 수가 수천 번이던데, 그 정도면 서광이 보입니다. 그걸로 유튜브 즉 개인 방송을 한 번 개설해 보시지요.”
“어렵소. 알다시피 나는 기기에 문외한 아니오? 기자의 신분까지 간당간당하는 처진데….”
“그럴수록 권하고 싶습니다. 자유자재로 취재도 가능하고….”
“하기야 안 그래도 새파란 인생 후배 부장과 차장들이 거슬리긴 해요. 가끔 그들이 수필가나 소설가일 경우 문단 선배인 나에게 수모를 주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오. 하기야 유튜브 첫 영상만 확보할 수 있다면, 후속 조치는 가능할 것 같소만…”
그래서 급히 서두르게 된 게 ‘비목’ 작사가 한명희 교수와의 첫 대면이었던 거다. 오랫동안 다리를 놓느라고 애쓴 전쟁문학회의 H 회장과의 의기투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고. 같은 도시에 사는 H 회장이 이번에도 거중 조정했는데, 절묘하게 시간과 공간이 맞아떨어진 거다.
사나흘 전 오후였다. 서울역 가까운 데 위치한 A 녹음실 관계자 몇몇이 모여들었다. ‘비목’을 부를 W와 기자, 그리고 작곡가 한 사람과 신인 가수 등 네 명이었다. 그는 눈물겨울 정도로 신경 쓰면서 목청을 돋우었다. 시간당 1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비용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오직 ‘비목’! 거기에만 신경을 썼던 거다.
연습 중, 경상도 출신인 그가 ‘아’와 ‘어’의 발성이 서투르다는 걸 토박이 서울 사람 그 신인 여가수가 꼬집는 바람에 그는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군데 브레이크가 걸리다 보니 몸이 점점 움츠러드는 것이었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등 몸부림을 쳤다. 어느덧 한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스튜디오 안에 마이크를 내려놓고 응접실로 나와 땀을 식혔다. 곧 음원(音源)이 나왔길래 들어보니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녹화야말로 만만찮은 과제 아닌가 말이다. 거듭 말하건대 상대는 천하의 ‘비목’이라는 가곡의 가사를 창작한 분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지명도가 높다. 행여 누(累)가 되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그래도 약간 안심이 되었다. 이미 반주와 노래를 한꺼번에 녹음했으니-AR이라 한다- 카메라 앞에서 입만 벌리면 오케이!
그런데 말이다. 그 역사적인 사건의 주인공으로 나선다니, 주위에서들 엄청나게 관심을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이비인후과 원장이 무료로 목소리가 좋아지는 주사를 놓아주었다. 길가의 신기료장수는 군화의 안에 뭔가를 덧대어 외관상의 키를 5센티미터나 키웠고. 치과 원장이 치석 무료 제거. 해장국을 2인분씩 사흘이나 배달한 식당도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미용실 원장은 두 시간이나 걸려 머리를 매만졌다. 원장은 W의 코디네이터라 해도 과언 아니다. 아니 은인의 범주에 든다는 게 맞겠다.
어쨌거나 D-데이가 다가왔다. 가는 데 서너 시간이 소요되었다. 마침내 H 회장과 만나 그의 사무실에서 커피도 얻어 마셨고, 점심까지 대접받았다. 잊지 못할 인사가 합류했으니 앞서의 포병 부사령관 L 중령. 거기다 현지에 사는, 한명희 교수의 열혈 팬이라는 여성 시인이 둘 따로 온 바람에 분위기가 왁자지껄했다.
녹화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주위를 다 물리치고 둘만 나란히 서서 손을 잡은 채 섰다. 카메라 앵글은 돌아가고. 귀에 꽂은 이어폰 덕분에 자신이 부른 노래가 똑똑히 들려와 입만 벌리면 되었으니까. 20분쯤 그랬는데 NG도 없었다.
녹화 끝날 무렵의 기막힌 일화 하나. 그는 3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된 그 과정을 마치고 결실을 봤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북받쳤다. 그래 자기도 모르게 낸 소리가 이거였으니…. 선생님 한 번 안아 주이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분은 그를 포옹했다. 그 또한 ‘비목’ 역사의 한 장이리라.
며칠이 또 소요되었다. 영상을 편집하는 데에 말이다. 전주(前奏)에 앞서 그분의 인물 사진이며, 군부대 병사들의 모습(그와 어울린 사진)을 넣으라고 부탁했더니 기자는 매끄럽게 그 일을 해 주었다. 간주(間奏) 때도 마찬가지. 후주(後奏) 시간에도 이런저런 자료들로 채웠다. 다만 ‘선생님 한 번 안아 주이소’라는 절규 장면은, 사투리라 잘려 나갔다. 의견 상충도 있었다.
그 자신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튜브의 ‘유’자도 없었다.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이 우선 기자의 계정을 빌려야만 했다. 한데 삽시간에 조회 수가 올라가고 구독자도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게 아닌가.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기자와 의견 상충이 있을수록 자신의 <돌아온 이 하사>로 영상을 옮기는 데는 시일이 조금 걸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자신의 개인 방송(우리말)인 유튜브를 개국하는 날 그는 만세를 불렀다. 가슴이 벅찼음은 물론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노래 영상은 모두 합하면 10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국방 TV에서 군악대 반주에 맞춰 ‘사단가’를 부른 것까지 포함(包含)시킨다 치자. 15만에 육박했으리라. 물론 제일 많은 건 케이블 방송 여기저기서의 ‘부산 노래’며 ‘군가’ 등이 주종이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으니 분신과 다름없었다 할 것이다. 옛날 방송 때는 사전에 PD가 언제 나간다는 통보를 해 주어서, 솔직히 말하면 떨리지 않았었다.
이번엔 차이가 컸다. 밤에 잔을 설칠 정도로 기다려지기도 했고, 걱정도 됐다. 일각이 여삼추라 했던가? 체중이 약간 빠지는 듯했다. 빠져봐야 무슨 대수랴만, 수학 능력 시험 친 고 3년 학생이 성적 발표하는 날을 기다리는 심정? 뭐 그렇게까지야 했으랴만, 그는 그에 버금은 갔으리라. 국민 가곡 ‘비목’의 작사가 그분의 명성에 먹칠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 정도였다.
정작 영상이 떴을 때 그는 환호부터 터져 나왔다. 가족들은 작약(雀躍)으로 힘을 보탰고. 그제야 그들은 그 근심 걱정들이 한갓 ‘기우(杞憂)’로 끝날 일에 시달려왔다는 결론을 내렸으니 기쁠밖에!
그의 카톡 친구가 만만찮음은 앞서 밝힌 바 있다. 그는 그로부터 개인별로 새로 데뷔한 유튜브 <돌아온 이 하사>의 대표로서 자신의 영상을 그들에게 퍼 나른다. 나아가 소위 단톡방(團-房) 여기저기도 <돌아온 이 하사>의 명함을 내밀고. 그의 극성스러운 성격은 거기서도 그를 부추긴다. 까짓 전화 거는 것쯤이야 예사롭게 치부되지만, 마침내 육필 편지를 네임 카드 펜으로 써서 보내기 시작한 것. 어떤 단체 이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4백 자 원고지 두 장씩에 한 표 달라는 읍소(泣訴)를 적어 보내던 그가 아니던가? 이번에도 그는 전가의 보도처럼 필기구와 원고지를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씨름을 했다.
반응은 바로 나타났다. 첫날과 이튿날에 걸쳐 구독자 수가 20여 명에 이른 것! 그가 쾌재를 어찌 아니 부를 수 있으랴. ‘좋아요’도 비례해서 증가! 놀랍게도 두 경우의 수가 엇비슷하기까지 한 게 아닌가? 댓글도 예상외로 많이 달리더라. 무엇보다 조회 수는 엄청났다. 그 총화(總和)를 단순히 숫자로만 나타내는 건 되레 무의미하지만, 하여튼 백 점 만점에 90점은 되는 것 같았다. 다만 구독을 하는 데는 무료지만 절차가 까다로워 상대를 믿을 수 없었다.
과부가 과부 사정 안다더니 가요계에서의 반응이 심상찮았다. 역시 가수들이 그의 편이었다. 가수협회 임원으로 있었던-이사(理事) 말이다-며, 중진과 원로 몇몇이 그의 <돌아온 이 하사>를 뜨겁게 달구어 주었다. 그래 열흘쯤 지나자 구독자 수가 90명을 넘어섰다.
재미있는 건 역시 댓글이었다. 물론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온 게 대부분이다. 근래 카톡 등으로 사귄 가수들 몇몇도 더러 그에게 알은체했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사람을 안다는 게 크나큰 자산임을 거듭 깨달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그가 자주 가는 데가 우체국이다. 책을 엄청나게 많이 보내기 때문이다. 창구의 젊은 남자 주무관은 무언가 그와 통하는 사람이다. 주무관이 몇 년 사이에 엄청나게 체중 감량을 했다고 해서 감탄을 하는 사이에 둘은 정말 친밀하게 지낸다. 주무관으로부터의 댓글 내용을 공개해 보자. 음의 강약 조절이 예술입니다/ 애국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뭐 그 정도로 그러느냐고? 아니다. 거기에 모든 조화가 깃들어 있으니, 주무관의 댓글이야말로 정곡을 찌른 표현이고도 남으니까. 상술(詳述)해 보자. 대신 다른 구구한 내용은 생략한다.
영상에서 그가 오른손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든다. 다른 사람이 그 까닭을 알 리가 없다. 한데 좀 더 관심 깊게 그걸 파헤쳐 보자. 아, 그건 4/4박자를 지휘(指揮)하는 흉내다. 아니 흉내가 아니라 실제, 손동작은 작지만, 정확하게 실제 ‘지휘’를 하는 거다.
‘비목’은 4/4박자다. 그 느낌은 강 ‧ 약 ‧ 중강 ‧ 약으로 나타난다. 그걸 염두에 두지 않고 연주한다 치자. 듣는 이는 그저 밋밋함에 빠진다. 2/4박자와 다른 점은 거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한 가지 예. 교육청이 주관하는 큰 행사에 중학교 관현악단이 동원된 적이 있었다.
한참이나 실력이 부족한 음악 교사가 좌중의 모든 학부모며 학생, 교사가 반주에 맞춰 ‘새마을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나 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 노래는 처음에 2/4박자로 시작되긴 한다. 하지만 도중에 변박(變拍)이 된다. 다시 말해 박자가 4/4박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날 음악 교사는 자기도취에 빠졌는지 그걸 무시하고, 신나게 2/4박자로 시종일관하는 게 아닌가? 보다 못한 초등학교 교사가 항의를 대놓고 하는 바람에, 마침내 멱살잡이까지 벌어진 전대미문의 사건의 시종을 참고삼아 적어 보았다.
그 현장에 있었던 W도 초등교사였다. 그러다가 수십 년 만에 ‘비목’을 제대로 연주(악기로만 하는 게 아니다. 노래도 연주다)하려 하니 그 정도의 신경을 써야만 했다. ‘비목’의 시작은 반 박자를 쉬어야 한다. 해서 ‘초연이’의 ‘초’는 약한 소리다. 그 절묘한 정답은 그의 모든 노래에 적용된다. 오른손의 4/4박자 지휘 또한 마찬가지. 약박(弱拍)에 신경 쓸 데가 한둘 아니다.
그는 ‘비목’ 앞에서 처연 혹은 처절한 각오로 오른손에 매달리는 연습을 몇 년째 계속해오던 참이었다. 그 결과가 음악을 모르는 한 젊은이의 날카로운 감각 앞에 여실히 증명된 거다. 그는 댓글에다 덧붙였다. ‘오늘의 인물’로 귀하를 뽑습니다!
그러구러 보름 가까이 지났고 구독자 수가 100명이 넘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답보…. 타 가수들의 유튜브는 자기보다 훨씬 더 실적이 우수하다. 그의 본래 결심은 이랬었다.
“좋다. 하루 한 분씩만 확보하자. 3년이면 1천 분을 돌파하겠지. 그분들을 상전(上典)처럼 모시고 계속 정진해 나가는 거다. 그걸 영상으로 녹화하면? 벌충하고도 남겠지.”
밤낮없이 노래를 부르고, 밤낮없이 지휘하고, 밤낮없이 영상을 들여다보는 등 극성에 극성을 더하는 그를 보고 아내가 하는 말이었다. 그에게 아내가 탄복하더니 다음 날 녹음실에 다녀오라는 거였다. 아내의 결론 요약.
현충일에는 일절 가무(歌舞)를 금한다. 이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도 달걀을 세울 수 있다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묘책 중의 묘책! 달걀을 책상에 약간 내리쳐 한쪽을 찌그러뜨리자! 그럼으로써 그 결과를 도출한 거다.
이번 현충일에도 그가 취재하러 동작동 현충원 추념식에 참석한다. 아내는 주문을 덧붙였다. 여느 해처럼 두어 시간 머물다 올 것이니 그 120분 동안에 오히려 노래를 부르고 오라는 거다. 그것도 당당히 군복을 입고 서서 말이다. 물론 기자도 동행하고 현수막을 들고 있을 전우도 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일 그 광경을 보면 역시 항의와 제지가 뒤따르기 마련 아닌가? 해서 입만 벌려 노래를 열창하는 척하며 흉내만 내는 방법이 있다 한다.
아내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녹음실에서의 결과물 일고여덟 곡으로 ‘현충일 현충원에서의 콘서트’를 멋지게(?) 치를 수 있다는 게 아닌가! 듣고만 있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아내를 껴안고 볼에다 입맞춤 세례까지 퍼부었다.
이제 사전 준비에 철저해야 한다. 먼저 현충일에 불러도 괜찮을, 아니 오히려 불러야 할 노래들을 찾는 것이다. 예서 오해를 없애기 위해 한 번 더 강조하자. 현수막을 앞에서 보는 이가 ‘열창(熱唱)’을 한다고 탄복(?)할 곡들이어야 한다. 조금 더 부연하자. 이미 녹음실에서 녹음해 온 음원에 따라-‘비목’처럼-그는 입 모양만 내면 된다. 그걸 기자가 카메라에 영상으로 담는 가운데…. 이윽고 <돌아온 이 하사>를 통해 방영하면, 구독인들은 감쪽같이 속는(?) 거고. 마침내 완벽한 ‘현충일, 현충원에서의 콘서트’가 사후에 구독인들을 찾아간다!
그 곡목들은 적어 본다. 단 아내의 진단대로 두서와 경중은 없다.
‘애국가, 육군가 ‧ 해군가 ‧ 공군가 ‧ 해병대가(1절만 메들리로)’/ ‘현충일 노래’, ‘6 ‧ 25노래’ , ‘행군의 아침’, ‘전우야 잘 자라’. ‘가고파’(녹음 당일 컨디션에 따라 뒤로 미룰 수 있다.)
이번에 임명된 어느 장관의 아버지 유택을 콘서트 장소 0순위로 꼽고 있는데, 사전 조율은 필요가 없다. 유택의 주인공은 월남전에서 목숨을 잃은 B 중령이다. 나머지 대상은 56년 전에 헤어졌던 사단장, 원(願)에 의해 사후(死後) 사병 곁에 누운 채명신 장군 등의 유택도 대상이다. 다만 ‘4대 군가 및’ ‘애국가’와 ‘6‧ 25 노래’ 등 셋은, 정문이나 충혼탑 앞에서다. 다만 ‘현충일 노래’는 지금은 없어진 P 장군의 옛 묘역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참에 두려움을 떨치고도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사족이랄 수 없는 요소 하나. ‘해군가’는 6/8박자다. ‘과수원길’과 같은…. 하지만 실제 연주는 2/4 박자로 해야 한다. ‘강약’이다. 그걸 해군들도 모르니 그냥 부른다. 개선은 군 수뇌부가 결심해야 한다? 답을 도출하기는 요원하다는 아쉬움만 토로하자.
소요 시간? 40분 정도면 될 게다. 첨언(添言)할 것 하나. 내외가 이구동성으로….
“<돌아온 이 하사>의 영상이 몇 개 더 탑재될지 모르지만 대부분 현충원에서 생산(?)된다. ‘부창부수’가 제자리를 잡게 될 테고…. 앞으로는 노래하는 현장에 부부가 등장해야지 않겠는가? 그리고 말이다. ‘전우야 잘 자라’의 2절은 영어로 불러야 한다.”
외람되지만 이 영상들을 보면서 더러 충격을 받는 국민도 있으리라. 어찌 된 셈인지, ‘육군가’를 제외한 3대 군가 1절은 ‘죽음’이 아니 들어가는 데가 없으니까. 왜 죽는가? 싸워 이겨야 하는데…. 그런 걸 곱씹어 씹어보면 가족들은 경악한다. 통탄할 그 가사를 바꾸는 계기를 그 내외가 기대한다. 군복을 손질하면서 아내가 던지는 말에 온갖 무게가 실렸다.
“창군 이래 예가 없었던 당신의 콘서트! ‘제대 50주년 기념 모부대 장병 초청 기념 콘서트’에 이은…. 그날 거기서의 콘서트는 200명 관중이 아닌 17만 영령들이 지켜보는 데서 열리니 몇 차원 뛰어오른 거예요. 바야흐로 그 영상은 당신 강요(?)에서 구독인이 확보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결과를 낳을 거예요. 두고 봐요. 1천 분을 곧 돌파할 테니까요.”
하기야 1천 분 아닌 최악의 경우 1백 분이면 어떤가? ‘17만 영령이 뽑은 현충원 전속 가수’라는 닉네임 하나만 얻는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을 바에야!. 언젠가 그가 거기서 산화(散華)하는 것마저, 둘 사이에 이뤄진 묵계(默契) 아니던가!
끝으로 그가 뽑는 비장한 각오 하나.
“‘돌아온 이 하사’라는 가요를 하나 작사하고 작곡하고 노래하는 날이 있으리라. 싱어송라이터! 머지않은 장래에 그걸 들고 현충원을 찾아 선보인다.”
- 끝- 200자 원고지 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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