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상제께서 어느 해 여름에 김형렬의 집에 계실 때 어느 날 밤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강감찬은 벼락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며 좌우 손으로 좌우 무릎을 번갈아 치시며 “좋다 좋다” 하시니 제비봉(帝妃峰)에서 번개가 일어나 수리개봉(水利開峰)에 떨어지고 또 수리개봉에서 번개가 일어나 제비봉에 떨어지니라.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 된 후에 “그만하면 쓰겠다” 하시고 좌우 손을 멈추시니 번개도 따라 그치는지라. 이튿날 종도들이 제비봉과 수리개봉에 올라가서 살펴보니 번개가 떨어진 곳곳에 수십 장 사이의 초목은 껍질이 벗겨지고 타죽어 있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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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의 <권지1장> 에 있는 글이다.
성사께서 번개를 일으키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것을 성사를 따르는 종도들은 이튿날 번개가 떨어진 곳곳을 살핀다. 이것은 성사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뭔가 증거를 봐야 믿을 수 있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 때문이다. 이건 예수님의 종도도 그랬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게 무슨 믿음일까 싶다.
제비봉과 수리개봉을 한자로 표기해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의도적인 냄새가 풍긴다. 반면 강감찬은 한자 표기를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던가 보다. 그래도 아쉽긴 하다. 강감찬은 姜邯贊 이라 쓴다. 강감찬이 벼락칼을 잇다니 이 또한 재밌지 않은가? 강감찬에 관하여 알아볼 필요를 느낀다.
(1) 姜邯贊
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귀주대첩(龜州大捷)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명장이자 문신이다. 시호(諡號)01는 인헌(仁憲)이고,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태어난 곳은 금주(衿州)로, 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奉天洞)에 있는 낙성대(落星垈)이다. 이곳은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밤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2) 龜州大捷
당시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성종 12년(993)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제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강동 6주)02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 6주는 거란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기에 현종 1년(1010) 거란의 성종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였다. 이때에 거란군은 개경(開京)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자 철수해 버렸다. 그러다가 현종 9년(1018)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거란의 침략 기도를 간파하고 있던 고려는 상원수(上元帥)03 강감찬을 지휘관으로 하는 20만 명의 방어군을 편성하여 주력부대를 영주(지금의 평남 안주)와 그 이북 지대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임무를 맡은 강감찬은 여기서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뛰어난 지휘력과 용병술(用兵術)을 발휘한다. 그것은 쇠가죽으로 물막이를 만들어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의주 위원면) 동쪽 강물을 막게 하고, 거란군이 접근할 때 이를 터뜨려 침략군에 물벼락을 가한 후 적의 혼란을 틈타 매복시킨 기병을 동원해 강력한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뜻밖의 기습에 당황한 거란은 처음 접전에서부터 막대한 손실을 당하자 산간 지대를 택해 고려군과 접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개경을 향해 밀고 내려갔다. 강감찬이 이끈 고려군은 추격전과 매복전을 전개하면서 적을 피로하게 하고 약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후 거란군은 계속되는 전투에 사기가 저하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자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추격하던 고려군은 귀주에서 전면포위 작전에 돌입하였다. 적군이 귀주에 이르자 이곳에 집결해 있던 고려군들은 일시에 공격을 가하였다.04 마침내 고려군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일찍이 없었던 대승리를 기록하였으니, 이 전투가 우리나라의 삼대대첩(三大大捷)의 하나인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3) 벼락칼 이야기
특히 강감찬의 설화 중, 『典經』 권지 1장 23절에 나오는 벼락 칼에 대한 것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람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와서 그 사람을 치고 벌을 주는 것인데 옛적에는 벼락 치는 일이 흔했단다. 부모한테 잘못해도 벼락 맞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어도 벼락 맞고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밥풀 하나가 모르고 시궁창에 들어간다든가 콩나물 깍대기나 호박씨 같은 것을 버린다든가 하는 하찮은 짓에도 벼락을 맞게 되니 사람들이 맘 놓고 살 수가 없었단다. 그런데 강감찬이란 옛날 훌륭한 분이 이렇게 사람들이 걸핏하면 벼락 맞아 죽게 되어서야 쓰겠냐고 염려해서 벼락 칼을 분질러 없애려고,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똥을 누었다. 그러니까 당장 하늘에서 벼락 칼이 내려와서 강감찬이란 분을 치려고 했다. 강감찬이란 분은 얼른 벼락 칼을 잡아서 분질러 버렸다. 그랬더니 그 후부터는 벼락 치는 횟수도 적어지고 벼락 칼도 도막 칼이 되어서 얼른 나왔다가 얼른 들어가게 되므로 사람들이 훨씬 덜 벼락 맞게 되었다고 한다.07
(참고)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wDArpOdys8k&t=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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