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16~18절
말씀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째닫는 일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안개같이 사라지는 미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울지 않습니다.
울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입양된 아이가 다시 우는 건 그날이 가족이 생긴 위대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땅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다시 확인하는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라는 질문에 시몬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절)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나는 요한의 아들, 은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너의 대답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읽어 봅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유전을 차단하기 위해 동정녀의 몸을 빌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의 신부가 될 교회의 시작은 순전한 말씀의 반석 위에 서야 했습니다.
물론 시몬의 입에서 나온 언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혈과 육에선 배울 수 없었던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게 하신 천국의 언어였습니다.
우리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조아려 엎드렸을 때 를 기억합니다.
내 입을 통해 나온 말이지만 내가 한 말이 아니었을 때의 그 경외감은 우리의 평생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체험이 됩니다.
그 체험은 어떤 위험도 무너뜨릴 수 없는 든든한 반석이 됩니다.
전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된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
반석은 전기처럼 시몬을 통과해 버린 하나님늬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시몬의 이름은 베드로로 바뀝니다.
풀 위의 이슬이 해가 뜨면 말라버리듯, 돌잔치하는가 하면 장례식 하는 것이 인간의 인생입니다.
그에 비해 우주의 크기는 우리를 전율케 합니다.
압도적인 크기 앞에 인간은 먼지마도 못합니다.
하지만 허무와 비참한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건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걸 전제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들어와 마음껏 우는 입양자들의 모임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용기는 하나님 은혜입니다.
우리가 단지 입양된 자들이라는 출생 기록은 우리를 오만하게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 앞에 와서 우는 것은 우리의 융리한 기쁨입니다.
평생 이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맨 김태웅 목사 (충주 은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