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이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게 되었고,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축일이 9월 14일로 고정되었다.
본기도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21,4ㄴ-9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복음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이것이 빠진 희생은 오염된 피만 배출한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구약에서 십자가의 상징은 물론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매달기 위해 만든 장대입니다. 뱀에 물린 사람들은 구리뱀을 보면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리뱀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보면 낫게 된다는 뜻일까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도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낫게 하려고 나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닮을 수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맙니다.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누군가의 죄를 씻어주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노고가 누군가의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십자가가 되려면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디디 블랜차드와 집시 로즈 블랜차드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엄마 디디는 딸 집시를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백혈병, 근이영양증, 정신 장애 등 다양한 건강 문제와 장애가 있다고 믿도록 속였습니다. 디디는 딸의 질병과 장애를 홍보하여 기부, 여행 및 기타 혜택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에 버티다 못한 집시는 온라인에서 만난 남자친구 니콜라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살해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상황은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렀습니다. 집시는 어머니의 속임수와 자신이 겪었던 학대의 정도를 깨닫게 되었고, 어머니를 죽이는 것만이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디디는 집시를 키우기 위해 자신은 최선을 다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집시를 자신의 십자가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피 흘림은 깨끗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기의 의지로 피를 흘렸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에서는 리사 헤이든과 존슨의 사례가 있습니다. 리사도 존슨이 음식 알레르기, 뇌성마비, 낭포성 섬유증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헤이든은 자기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부터 수년에 걸쳐 약 325번의 불필요한 치료와 시술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의료 전문가들을 속여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믿게 했고, 이에 따라 영양 공급 튜브 장착을 포함한 일련의 불필요한 개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아들을 대신하여 수많은 상과 선물, 재정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왕족과 다른 고위 인사들을 만났고, 기부금으로 휠체어 이용 가능 차량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초콜릿 바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보건 방문자가 알아차리면서 이러한 속임수가 드러났습니다. 이 관찰에 따라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리사는 다른 많은 형태의 의학적 학대와 속임수 중에서도 알레르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음식 공급 튜브를 통해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그녀는 집에서 의료기기를 조작해 결과를 위조하고 의사들에게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설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와 의료인의 동정과 지원을 가장하여 아동에게 가할 수 있는 심각한 학대의 극명한 예입니다.
디디나 리사 모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 흘림은 오히려 아이들을 안 좋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씻어줄 수 없는 더러운 피였습니다. 그 이유는 엄마들 자신이 아이들을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지심의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버지 때문에 흘리는 피가 아니면 자녀를 위해 흘리는 어머니의 피는 오염됩니다. 자아가 죽어서 흘리는 피가 아니라 자아가 커지기 위해 나를 고생시켜 흘리는 피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창은 오로지 ‘순종’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잘 키워낸 부모는 분명 소명을 가지고 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피 만이 자녀를 깨끗이 씻어줄 수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해 봅시다. 많은 군인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라이언에게 가치 있게 살라며 죽어갑니다. 라이언은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평생 열심히 삽니다.
만약 그들이 나라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라이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뛰어들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의 피가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나의 피는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 순종하여 내어주는 피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스스로 흘리는 피가 됩니다. 사실 그것은 자아의 피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뱀이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가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흘리는 피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합니다.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 흘리는 피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피 흘림은 누군가의 죄를 사해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여 흘리는 피만이 깨끗하여 그 사람의 죄를 씻어줄 수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사제도 주님께서 파견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피조물의 한계상 온전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가장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로 손꼽히는 일본, 싱가포르, 한국, 독일, 영국도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콜롬비아 등을 비롯해서 국제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이 의외로 행복 지수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관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강력한 가족 유대감이나 지역 사회의 연대감 등 서로 지지하고 연결하는 관계가 사회 분위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얻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 덴마크인 중 93%는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친구들과 교류하고, 다른 사람을 지지하고,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 지수를 높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3년 동안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개인주의가 훨씬 더 커졌고, 동시에 행복도는 크게 내려갔습니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계속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관계를 끊는 데에만 노력을 쏟는다면 우리의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주님과의 관계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 어렵고 힘든 것을 모두 치워주는 주님,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미운 사람을 가뿐하게 치워주는 주님 등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워줄 주님과의 관계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이 십자가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편안함과 쉬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의 상징이고, 또 죽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과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사랑과 평화가 있었으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순간의 만족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면서 십자가의 주님과 관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가 들어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명언: 고난과 역경에 처할지라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미소 짓는 삶의 자세야말로 운명을 역전시키는 기적의 비밀이다(헤르만 헤세).
사진설명: 거룩한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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