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만병통치약 '금계랍'
"이틀에 한 번 앓는 학질을 속칭 당학(唐瘧)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병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것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 10명 중 4~5명이 사망할 뿐 아니라 힘이 강한 소·장년층도 수년 동안 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계랍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이후 1전어치의 양만 먹어도 학질이 즉시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우두법이 들어와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고 금계랍(金鷄蠟)이 들어와 노인들이 수(壽)를 누린다"는 유행가가 나왔다."('매천야록')
금계랍(1910년대·왼쪽 사진)은 퀴닌(quinine)의 다른 이름으로 말라리아의 특효약이었다. 말라리아는 열대 지방에서 온대 지방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풍토병이다. 한국에서도 여름이면 찾아오던 '학질'이 말라리아의 일종이었다. 한국 학질은 열대 지방의 말라리아에 비해 증상이 약해, 젊고 건강한 사람은 약을 먹지 않아도 낫곤 했다. 하지만 대증요법 외에는 별다른 치료약이 없어 노인·아동 등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왕실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계층에 관계없이 학질에 걸렸고, 임진왜란 동안에는 인구의 70~80%가 학질을 앓을 정도로 전염성이 강했다.('한국 전염병사')
개항 이후 수입되기 시작한 금계랍은 학질 치료제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금계랍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서도 단연 인기가 높았다. 국립의료기관으로 출범한 제중원은 설립 초기 불필요한 진료를 막기 위해 형식적으로 치료비(20~50푼)와 약값(100푼· 0.06달러)을 받았다. 하지만 시료(施療) 기관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몇 달 후부터는 그마저 받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약은 무료로 주기 시작했지만 금계랍만은 10알에 500푼이나 받고 팔았다. 금계랍의 효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상비약으로 쓰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얻어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제중원 환자 중 말라리아 환자가 가장 많았던 것도 금계랍의 탁월한 효험 덕이었다.
금계랍은 이후 학질 치료 외에도 해열제, 진통제, 강장제 등 만병통치약으로 통용되었고, 옥양목(玉洋木· 옥같이 고운 서양 면포), 석유와 함께 가장 인기 높은 서양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 진출한 서양 상인들은 한국의 금계랍 시장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독일인 마이어가 제물포에 설립한 세창양행(世昌洋行: E. Meyer & Co.)은 '독립신문'에 금계랍 광고를 600여 차례나 실었다.
"세창 양행 제물포. 세계에 제일 좋은 금계랍을 이 회사에서 또 새로 많이 가져 와서 파니 누구든지 금계랍 장사하고 싶은 이는 이 회사에 와서 사거드면 도매금으로 싸게 주리라."
금계랍이 인기를 끌자, 시장에 가짜가 넘쳐나고, 과다복용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독약을 금계랍으로 잘못 알고 먹어 목숨을 잃는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계랍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서민들의 '비상 약품'으로 1960년대까지 인기를 이어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