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이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일찍이 시메온은 성모님의 고통을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이 기념일을 정하였다. 1908년 성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이 기념일을 옮기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결하여 기억하게 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부속가
<아래의 부속가는 자유로이 할 수 있다. 11절부터 시작하여 짧게 할 수도 있다.>
1. 아들예수 높이달린 십자곁에 성모서서 비통하게 우시네.
2. 섧고설운 슬픔고통 성모성심 칼에찔려 참혹하게 뚫렸네.
3. 독생성자 수난하니 여인중에 복된성모 애간장이 다녹네.
4. 아들수난 보는성모 맘저미는 아픔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5. 예수모친 이런고통 지켜보는 우리죄인 누가울지 않으리?
6. 십자가의 아들보며 함께받는 성모고통 누가슬퍼 않으리?
7. 우리죄로 채찍모욕 당하시는 아들예수 성모슬피 보시네.
8. 기진하여 버려진채 죽어가는 아들보고 애처로이 우시네.
9. 사랑의샘 동정성모 저희들도 슬퍼하며 함께울게 하소서.
10. 그리스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제마음에 불이타게 하소서.
11.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맘속에 주님상처 깊이새겨 주소서.
12. 저를위해 상처입고 수난하신 주님고통 제게나눠 주소서.
13. 사는동안 십자고통 성모님과 아파하며 같이울게 하소서.
14. 십자곁에 저도서서 성모님과 한맘으로 슬피울게 하소서.
15. 동정중의 동정이신 성모님의 크신슬픔 저도울게 하소서.
16. 주님상처 깊이새겨 그리스도 수난죽음 지고가게 하소서.
17. 저희들도 아들상처 십자가위 흘린피로 흠뻑젖게 하소서.
18. 동정성모 심판날에 영원형벌 불속에서 저를지켜 주소서.
19. 그리스도 수난공로 십자가의 은총으로 보호하여 주소서.
20. 이몸죽어 제영혼이 천국영광 주예수님 만나뵙게 하소서.
복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부속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25-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
오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예수님의 아픔과 그 결을 같이 합니다. 오늘은 두 복음이 나오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나중에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통 때문에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한 시메온의 예언이고 그다음은 골고타에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아드님을 보아야 하는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마치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는 있어도 교회는 예수님을 새 아담, 성모님을 새 하와라고 부르는 교부들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골고타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을 아들로 맡기시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맡기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함께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아내의 자격은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살리기 위해 밖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힘듦을 얼마나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만큼 구원자로 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분은 없으셨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누가 느껴보았을까요? 그만큼 성모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만약 배우자가 나에게 해주는 고통에 대해 잘 안다면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까요? 남편은 분명 자신이 번 모든 돈을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내어놓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믿으면 아내도 그 돈을 피같이 아껴 쓸 것입니다.
TV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 보면 아내의 과소비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편이 나옵니다.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 ‘금전적 신뢰 깨진 폭탄 부부’를 보니 남편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내도 귀걸이 사는데 300만 원 쓰고 피부 관리받는 데 900만 원을 쓰는 내용이 나옵니다. 남편은 월 400씩 꼬박꼬박 가져다주며 자신은 한 달에 10만 원 이상 써 본 적이 없다는데 아내가 그렇게 과소비하고 빚만 늘어나니 신뢰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도 비싸게 술을 마시고 다니고 한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은 남편이 아는 것들이었지만, 카드 지출 내역과 통장 지출 내역은 남편에게 보여주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신뢰가 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치미에서 배우 주우와 김선희 부부도 비슷한 이유로 출연하였습니다. 김선희 씨가 지나치게 과소비한다고 남편이 고발하듯이 아내를 데리고 나왔지만, 사실 그렇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며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남편은 자신이 매달 500씩 주는데 생활비는 700씩 들어가는 것에 신뢰를 잃어갔던 것입니다.
저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모든 돈을 다 주는데 아내가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혹은 아내가 돈을 얼마나 저축해 놓았는지의 재정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말은 남편이 돈 벌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느끼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돈 쓰는 것을 일일이 남편이 안다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둘은 서로 신뢰를 잃게 되고 결국 그 피해는 아이들이 보게 됩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해 부부싸움을 많이 하게 되면 자녀는 생존 욕구가 강해지고 그러면 나쁜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내는 돈에 대해 불투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신자들은 본당 사제를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제와 신자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가운데 좋은 자녀들이 탄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솔직하게 공개하고 혼날 게 있으면 혼이 나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본당에 내는 돈이 그들의 살과 피와 같은 아픔을 공감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레위기에도 신자들이 낸 봉헌은 거룩한 것이니 사제들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과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 잘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의 아픔보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더 중요하게 여겨 두렁이로 몸을 가린 것을 보면 연결이 쉬워집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그러면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관계에서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합니다. 남편이 모든 것을 다 가져다주었다면 아내도 모든 지출 내역과 통장 잔고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영화 ‘허삼관’에서 하정우는 아내가 이전 애인의 아이를 배어 자신에게 시집왔었다는 것을 10년 뒤에나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남의 아이를 키웠다는 생각에 분노하였지만, 키운 정이 작지 않아 아이를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팔며 자신은 죽어가다시피 합니다. 하지원은 남편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판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 신장을 아들에게 줍니다.
서로 상대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 때문에 나도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이 사랑일 것입니다. 신뢰를 잃으면 내어줄 수 없습니다. 상대가 나와 가정을 위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알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가 나를 위해 흘리는 피의 고통을 함께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으로 상징되는 교회를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은 당신의 피를 결코 헛되이 쓰지 않는 마음을 가지셨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은 아마도 먼저 재정의 투명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휴가 때, 경상도의 군위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여기가 너무 멋있다는 평을 인터넷에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위 지역 여행의 첫 번째 장소가 영화 촬영지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무런 감응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주변 경관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고, 촬영했던 집 역시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른 관광객들은 “너무 좋다”를 외쳤습니다. 여기가 주인공이 앉아 있던 곳이라면서 마루에 앉아 사진을 열심히 찍고, 마당에 놓인 자전거를 타면서 주인공이 타던 자전거라면서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찍부터(83년) 컴퓨터 모니터를 봐서 시력이 안 좋아진 후로 영상을 잘 보지 않습니다. 극장에 가 본 지도 거의 10년이 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영화 촬영지라고 해서 기억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자기가 너무 종교에만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외 성지순례를 가서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셨던 분은 계속해서 감탄사를 외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셨던 분은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십니다. “왜 이렇게 성당만 가는 것입니까?”라는 불평만 하십니다.
주님을 알아야 미사나 기도를 통해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큰 기쁨도 얻을 수 있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날에 맞게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남기신 유언을 들려줍니다. 그 자리에서 이 유언을 들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십자가 곁에 있었던 성모님과 몇 명의 여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특히 성모님께서 아들과 함께하면서 더욱 하느님의 뜻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시메온 예언자에게 들었던 “이 아기는 이스라엘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의 말이 다시금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할 것을 더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큰 희망을 발견하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조금도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미셸 몽테뉴).
사진설명: 고통의 성모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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