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에몬테의 니차(=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이탈리아'당에 입당하여 봉기를 벌이다 남미로 도피했었다. 남미에서 혁명가로 활동하던 중 모국의 소식을 듣고 '붉은 셔츠단(=우루과이 혁명단)' 의용군을 모아 귀국한다. 소규모 전투를 벌이던 중 교황이 로마에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로마로 향한다. 로마 시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교황의 세속권력을 배제한 '로마공화국'을 세운다.
나폴리에 피신한 비오 9세는 유럽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프랑스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의 조카이며 나폴레옹 3세 황제)이 화답을 한다. 교황에게 추방당했던 나쁜 기억은 있지만 오스트리아보다 먼저 교황을 구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다시 찾겠다는 생각을 한다. 약 9천 명의 프랑스군이 로마로 진군한다. 로마는 수천 명의 의용군이 지키고 있다. 막강한 프랑스군의 전력으로 결국 로마는 함락되고 가리발디의 의용군은 산으로 후퇴한다.
비오 9세는 로마로의 귀환을 서두르지 않는다. 프랑스군은 계속 로마에 주둔하겠지만 그들이 자신을 간섭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로마의 자유헌법은 다시 도입되겠지만 제한적인 사면, 국무원, 그리고 입법의회 그 이상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교황의 입장이다. 프랑스가 이 조건을 동의하자 교황이 귀환한다. 비오 9세는 비극이 많은 퀴리날레 궁 대신 바티칸으로 간다. 이후 교황들은 바티칸에서 지내게 된다.
'48년 혁명'은 수포로 돌아간 것일까. 처음에는 그렇게 보인다. 교황은 프랑스군이 호위하는 로마로 돌아왔고 오스트리아군은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로 돌아왔고 나폴리는 다시 왕정 체제로 되돌아간다. 오스트리아의 피렌체, 모데나, 파르마들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사르데냐-피에몬테(=토리노)만 독립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새로 즉위한다. 그는 재상 카부르 백작과 함께 이탈리아를 통일하겠다는 구상을 한다.
오스트리아가 큰 걸림돌이다. '크림전쟁'을 마무리하는 강화회담이 열린다. 카부르 백작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에게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쫓아내자고 제안한다. 나폴레옹 3세는 관심을 가진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 과격주의자들이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한다. 재판을 받던 암살미수범들이 옥중 편지를 쓴다. '이탈리아가 독립하지 않는 한 유럽과 폐하의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저의 조국을 해방시켜 주십시오. 우리 이탈리아 국민은 영원히 폐하를 축복할 것입니다'
이 편지는 나폴레옹 3세의 마음을 흔든다.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그는 이탈리아의 구원자가 된다는 기쁨도 있고 국내에서 그의 인기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는 정치적인 위기감도 느끼고 있다. 이럴 때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사르데냐-피에몬테의 카부르 백작의 비밀 회동을 받는다. 먼저 피에몬테가 모데나를 공격하면 오스트리아가 개입할 것이고 피에몬테가 프랑스에 지원 요청을 하면 샤르데냐-피에몬테와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베네치아-롬바르디아를 점령한다는 계획이다.
1859년 샤르데냐-피에몬테군은 프랑스군과 함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다. (=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라고도 한다.) 가리발디 의용군도 합세한 사르데냐-피에몬테-프랑스연합군이 롬바르디아의 밀라노에 입성한다. 3주 후 솔페리노에서 양측 모두 25만여 명이 참전하는 일전을 벌인다. 40여 년전 나폴레옹의 라이프치히전투 이후 최대 규모의 전투이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지만 프랑스와 피에몬테 연합군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앙리 뒤낭이라는 젊은 스위스 청년은 부상자를 응급처치하는 의무부대를 만들고 5년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적십자를 창립한다.
나폴레옹 3세는 솔페리노전투의 참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단합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프랑스군이 계속 희생을 치르면서 얻을 댓가에 대하여 깊은 의문을 가진다.
결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양국이 긴급하게 강화조약을 맺는다.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와 만토바를 유지하고, 프랑스는 롬바르디아, 피아몬테는 롬바르디아의 나머지 지역을 가지게 된다. 토스카나와 모데나는 군주들이 복위하고 교황을 명예군주로 내세운 중부이탈리아연합을 세운다. 피렌체, 볼로냐, 파르마 등은 피에몬테연합에 가세한다. 도시국가들이 이합집산을 계속한다.
1860년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시칠리아 북부지역으로 번져나간다. 이 소식을 들은 가리발디는 의용군을 이끌고 제노아에서 시칠리아로 출발한다. 두 달간의 전투 끝에 시칠리아를 접수하고 나폴리에 입성한다.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유럽에서는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나폴리를 접수한 가리발디는 에마누엘레 2세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린다. 그에게도 위험은 있다. 에마누엘레 2세가 그를 견제하고 나폴리를 빼앗겼던 프란체스코 2세는 군대를 다시 정비하는 것이다.
가리발디와 붉은 셔츠단은 프란체스코 2세의 나폴리 군대와 다시 싸워 힘겹게 이긴다. 에마누엘레 2세의 피에몬테 군대는 남쪽으로 진격한다. 가리발디는 깨닫는다. 그에게는 제대로 된 군대도 없고 북쪽에서는 피에몬테 군대가 내려오고 있다. 하는 수 없다. 왕에게 조건없이 나폴리를 넘겨준다. 나폴리를 접수한 에마누엘라 2세는 가리발디에게 큰 보상을 내린다. 행동이 자유로운 혁명가 신분을 원하는 가리발디는 정중히 사양한다.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왕국'을 선언한다. 재상 카부르는 이탈리아를 통일하더라도 교황이 존재하는 자유교회는 인정하여야 한다는 입장이고 가리발디는 반대한다. 에마누엘레 2세는 교황에게 합병을 제안한다. 비오 9세는 카톨릭을 위하여 교황령을 유지하고 이를 후임자에게 넘겨주기를 신에게 서약한 점을 강조하며 왕의 제안을 거부한다. 삼자협약(=9월협정)이 체결된다. 프랑스군은 로마에서 철수하고 이탈리아왕국은 수도를 피렌체로 옮기면서 로마를 보호하고 로마는 별도의 영토로 유지된다.
에마누엘레 2세의 다음 목표는 베네토(베네치아)의 회복이다. 신의 도움인지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은밀한 제안을 한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할 것이니 이탈리아도 서쪽에서 공격하라. 승리하면 오스트리아의 베네토를 이탈리아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이다. 프라하의 북쪽에서 양측 30만 명 이상이 참전한 큰 전투가 벌어진다. 프로이센이 승리한다. 약속대로 베네토를 넘겨받는다. 이제 로마만 남았다.
최근 카톨릭 회의에서 어떤 자유주의자 백작이 카톨릭의 오래된 정교유착을 비난하면서 교회의 개혁을 요구한 적이 있다. 비오 9세는 이를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고 지적하며 새로운 회칙을 발표한다. 특히 자유주의, 합리주의, 민족주의, 개인주의, 자연주의 등 80개의 근대 사상을 '오류'라고 명기한 것에 일부 주교들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실망한다. 전 유럽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오류목록'은 프랑스에서 금지되고 나폴리에서는 불태워진다. 그러나 교황은 완강하다.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다. 전 세계에서 700여 명의 주교들이 참석하는 역사상 가장 큰 의회이다. 유물론과 무신론 범신론을 배격한다는 신앙에 관한 의제는 일치를 본다. 반면에 교회에 관한 의제는 쉽지않다. 날카로운 토의가 거듭되다가 '교황무류성(=Papal Infallibility, 교황이 교회를 상대로 교리를 선언할 때 이에는 오류가 없다는 교리)'이 승인된다. 교황의 교리는 교회의 승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오류가 없다고 정의된 것이다.
새 헌장이 발표된 다음 날 보불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한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한 정보를 교묘하게 흘려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상대로 선전포고하도록 꾸민 것이다. 격렬한 전쟁이다. 로마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은 즉시 전장으로 이동한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다. 로마에 이탈리아왕국 군대가 들어온다. 프랑스를 믿던 교황의 희망은 사라지고 신변의 위험을 느낀다.
에마누엘레 2세는 선택을 하여야 한다. 9월협정을 무시하고 로마를 바로 점령할 것인가 아니면 민중 봉기를 기다릴 것인가. 그는 먼저 교황에게 '이탈리아왕국만이 로마와 교황 성하를 평화롭게 지킬 수 있으니 협조를 부탁합니다'는 서한을 보낸다. 비오 9세는 무력에 저항할 것이고 무력에만 굴복할 것이라고 그의 항복 제안를 거부한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
1871년 에마누엘레 2세의 이탈리아군이 로마에 진입한다. 이탈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저항을 하던 교황군은 곧 진압된다. 에마누엘레 2세는 일절의 화려함을 금지하고 매우 검소하고 조용한 행렬로 로마에 입성한다. 바티칸궁에 칩거한 교황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다.
이탈리아왕국이 로마를 합병하고 로마를 수도로 한다는 국민투표가 99%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된다. 바티칸만 독립주권국으로 남는다. 비오 9세는 바티칸 궁을 교황청으로 유지한다. 이탈리아의 237개의 주교직에 대한 임명권을 에마누엘레 2세로부터 양도받는다. 교회 내에서의 교황의 영향력이 높아진다.
카톨릭교인들의 정치행위 금지를 선언한 비오 9세는 그 이후 정치와 담을 쌓는다.
1878년 비오 9세는 선종한다.
비오 9세는 역대 교황 중 가장 오래 재위한 인물이었다. 교황의 세속통치권을 둘러싼 정치 상황은 끔찍했다. 그러나 그의 첫번째 관심은 교회의 안녕이었고 이를 위하여 그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전 세계에 200 개 이상의 교구를 세웠고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카톨릭을 회복시켰다. 카톨릭이 아니더라도 많은 국가들과 정교협약을 맺었다. 또한 성모마리아의 무염시태(=잉태하는 순간부터 원죄에 물듬이 없이 태어났다)를 선포하여 마리아를 공경하는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예수의 성심 신심(=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공경하고 실천하지는 교리)을 장려하였다. 그는 사랑과 미움, 존경과 모욕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유해가 옮겨지는 길에서도 소동이 많았다.
이제 세계는 이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엄청난 비극에 빠져든다.
#손바닥세계사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