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를 품은 달
해정시(밤 10시경)이 되자 상소문들이 희에게 전달되었다. 희는 여느때와같이 상소문들을 하나씩 읽어보았다. 상소문은 신료들이 쓰는것이 있는가하면 백성들이 써서 직접 상소하는 상소문들도 있었다. 희는 그런 상소문들을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신료들이 쓰는 상소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써올리는것이 대부분이였기때문이였고, 백성들이 직접 올리는 상소문은 백성들의 의견을 고스란히 담고있어 희에게는 더없이 좋은 글이였다.
“군역을 피하기위해 양반계층의 신분을 사드리고, 돈이 있는 평민들은 늙고 병든자를 대리로 보낸다?”
“…….”
“군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양반계층들도 부담하는 것이 아니였던가.”
“그러하옵니다.”
“헌데 양반계층들 또한 늙고 병든자들을 돈으로 사들여 대리로 군역을 보낸다?”
“…….”
“이 상소문은 백성이 과인에게 쓴 상소문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과인에게 이런 상소문을 써 올린단말인가.”
“…….”
“참으로 딱하구나.”
희가 상소문을 진지하게 읽고 있을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전하. 숙의 들었사옵니다.”
숙의라는 말에 희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내 ‘안으로 뫼시거라.’라고 명했다. 방 문이 열리고 숙의가 다소곳하게 들어와 예를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희는 계속해서 읽던 상소문을 읽어내려갔고, 숙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않았다.
“소첩, 문후 여쭙겠사옵니다.”
“보다시피 강령하다.”
“윤허해주신다면 소첩 전하께오서 침수에 드실때까지 곁을 지키고싶사옵니다.”
“불가하다.”
“소첩 전하의 뒤에 있는 병풍만도 못하옵니까.”
“…….”
“병풍처럼 전하의 곁을 지키면 아니되옵니까.”
“…마음대로 하거라.”
희는 계속해서 상소문을 읽었다. 물론, 숙의에게는 일초의 눈길도 주지않았다. 그런데도 하정은 희가 좋았다. 상소문을 읽어내려가는 눈도 좋았고 상소문을 읽을때마다 찡그리는 표정까지도 좋았다. 그저 이렇게라도 바라만보고있어도 좋았다.
“무례하구나.”
“송구하옵니다.”
“감히 나를 훔쳐보는것이냐.”
“…….”
희가 하정을 노려보자 하정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문득,
“전하, 기억하시옵니까.”
“어허!”
“소첩, 무례를 무릅쓰고 강녕전에 들어왔을때를 말이옵니다. 소첩은 교태전에서 전하를 뵌 뒤로 한시도 전하의 생각을 하지않은 적이 없사옵니다. 해서 무례를 무릅쓰고 강녕전에 왔던 것이옵니다.”
“분명 내게는 비단 주머니를 주러 오지않았느냐.”
“그것은 핑계였사옵니다. 전하를 뵈러 오는 그 날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도 먹는둥마는둥 하다 가마를 타고 궐 앞까지 오는 길이 어찌나 멀었던지….”
“…….”
“중전마마께는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내가 너에게 정을 주었다고해서 내 모든것을 준것은 아니니라. 이곳에 들어오라해서 너의 모든것을 허해준것도 아니니라.”
“…….”
“어찌 그리 바보같은것이냐.”
“소첩을 너무 미워하지마시옵소서.”
“…….”
하정의 간절한 한 마디는 희의 마음을 움직이기 쉬웠다. 하지만 대나무같이 곧은 성격을 가진 희에게는 통하지않았다.
“전하,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하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 물러나 앉았고 연이 들어와 하정이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뒤에는 보모상궁이 은효공주를 안고 있었다. 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셨소?”
“밤공기가 좋아 산책을 하던 중이였사옵니다. 하온데 전하께오서는 어이하여 침수에 들지아니하셨습니까.”
“상소문을 마저 읽고 침수에 드려던 참이였소. 공주는 깨어있소?”
“예, 전하. 산책을 하던 중에 마침 은효공주가 깨어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태전으로 돌아가 보모상궁과 함께 이곳, 강녕전에 들었사옵니다.”
“깨어있을때는 과인의 모습이라고 하지않았소?”
“그러하옵니다.”
“어서 보여주시오.”
연이 은효공주를 안고 몇번 토닥이다가 희의 품 안으로 은효공주를 넘겨주었다. 해맑게 웃어보이는 은효공주를 보자 희는 웃음이 떠나질않았다.
“이리와서 너도 한번 보거라.”
“소첩이 어찌 공주아기씨를 뵐 수 있단말이옵니까.”
“은효공주가 나와 닮았는지 네가 확인을 해보거라.”
“…….”
“어서 와서 보거라.”
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정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은효공주의 얼굴을 보고 희의 얼굴을 보며, 아뢰었다. 영락없는 희의 모습이였다.
“공주아기씨께서 전하를 닮으시어 어여쁘시옵니다.”
“그렇고말고.”
“또한 중전마마를 닮으시어 지혜로워보이시옵니다.”
“그렇다면 과인은 지혜롭지못하다는 뜻인것이냐.”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농이다, 농. 중전이나 숙의나 내 농 하나 이해하지못하니 이것 참 큰일이오.”
“신첩은 이제 전하의 농에 속지않을것이옵니다.”
“어디 한번 두고보겠소.”
희가 하정과 연을 번갈아보며 웃었다.
“이제 밤이 늦었으니 물러가거라. 중전도 물러가시오.”
“예, 전하. 그리하겠사옵니다.”
“그럼 소첩, 이만 경선당으로 물러가겠사옵니다.”
보모상궁이 다시 은효공주를 데리고 가 토닥였다. 금방 울음이 쏟아질 듯한 표정인 은효공주를 보자 연은 ‘어서 교태전으로 먼저 가 공주를 재우거라.’라며 먼저 보모상궁을 보내었고, 숙의가 강녕전에서 나가자 연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숙의는 어쩐 일로 강녕전에 들었다하옵니까.”
“문후를 여쭈러 왔다고 하더이다.”
“신첩, 속상하옵니다.”
“무엇이 그리 중전을 속상하게 만드는것이오.”
“정녕 모르시겠사옵니까. 신첩은 대비마마께 혼이 났사옵니다. 헌데 숙의는 제 집 드나들듯 강녕전에 드나드니 신첩이 어찌 속상하지않을수가 있겠사옵니까.”
“내가 숙의에게 당부를 할테니 마음쓰지마시오.”
“…….”
“해서 내가 교태전에 자주 드는것이 아니겠소? 그대가 강녕전에 발걸음을 할 수 없으니 과인이 찾아가는수밖에.”
“…….”
연이 그제야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고 나가려했다. 하지만 연의 손목은 희의 손에 잡혀져 다시 자리에 앉았고, 앉은 자리는 아까의 그 자리가 아닌 희의 무릎이였다.
“투기를 하는것이오?”
“신첩은 그냥 속이 상해 했던 말이옵니다. 너무 심려치마시옵소서.”
“마치 저잣거리에서 본 그대의 모습 같았소. 퉁명스럽게 톡톡 쏘아대니말이요.”
“신첩이 그리하였사옵니까? 신첩의 무례를 헤아려주시옵소서.”
“아니오. 참으로 어여뻤소.”
“…….”
“그대가 아직 어리다는것을 깨닫게 해주었소.”
“신첩은….”
“어리광을 부리는것인지 아니면 투기를부리는것인지 참으로 어여쁘오.”
“…….”
“상소문은 미루고 침수에 들어야겠소. 그대가 과인의 곁만 지켜준다면.”
연이 싱긋 웃었다. 쪽. 연의 입술에 희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내 손을 놓으면 아니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