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軍)은 정치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 할 수도 없다.
4.19 학생혁명이 역도(逆徒)의 총격으로 사실상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도, 군은 인내하며 단지 그 귀추만 주시하였을 뿐, 끝내는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국민 제위가 실제 본 바 그대로다.
그러나 감내와 방관은, 결국 동일한 개념하에 집약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도가 있는 법이요, 결코 무능한 채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민족경제가 파탄 농락되고, 구정객들의 망거와 죄악이 극에 달하여 사회가 혼란될 대로 혼란됨으로 하여, 불원(不遠)한 장래에 망국의 비운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감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만 말인가.
항시,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감내나 방관이란 허명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할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5.16 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군의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였다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같이, 본인은 40평생의 전생애를 걸고, 뜻있는 동지들과 촌시를 아껴가며 구국의 방법을 숙의하였다. 자유당 정권의 말기 무렵이었다.
마침내, 2.28 대구학생시위가 단초가 되어, 거센 4.19학생혁명이 폭발되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군의 출동없이도 민권혁명은 벅찬 감격으로 일단 성공된 것이다.
그러나, 수백 학생의 희생과 수십만 민중의 시위로 쟁취된, 이 민족의 희망은, 민주당 정권의 등장과 동시에 이미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민주당 집권 시절의 무능과 위급(危急)을 고하던 당시의 제 사태는, 전술한 바와 같거니와, 본인은 마침내 혁명동지들과 더불어 궐기하기로 결심했다. 본인은 냉정히 혁명군의 진격을 명령하였다. 조금도 흥분하지 아니하였다.
어떤 사상적 지도자로 자처하려는 위인은, 4.19혁명을 대낮의 공사에 비하고, 5.16혁명을 밤의 거사에 비유하여, 이 혁명에 흠을 잡으려 하였지만, 여기서 명백히 지적하려는 것은, 그 시각이 밤이 아니고, 바로 '새벽'이었다는 사실이다.
새벽! 그것은 바로 이 혁명의 목적을 상징하는 시각이다.
'민족의 여명! 국가의 새 아침!'
김포의 혁명가도를 밟으며 본인은, 밝아 오는 오늘의 아침을, 그리고 그 태양을 마음속으로 가득히 그리고 있었다.
그때, 앞서가고 뒤따르던 혁명동지들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30대의 청춘을 민족에 걸고, 오직 한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던 저들 모습뒤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 그리고 노모와 노부가 계시지 않는가. 아니, 인생의 꽃으로 아직 열매조차 맺지 않은 청춘이었다.
눈물겹도록 성스러운 인간상이었다.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본인은 그 강물이 어제 흐르지 않던, 새 물결이었음을 깨닫기도 하였다.
묵은 것은 있을 수 없고,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역사는 저렇듯 흐르는 것이다. 그것은 어길 수 없는 대자연의 섭리요 교훈이 아닌가.
(국가와 혁명과 나 에서)
첫댓글 03 정부에서 매도했죠 ,혁명을 구태타라고,그런 정부가 어째서 IMF를 초래했데 ? 지애비지휘하에서 현철부통 국립호텔신세진걸 김대중대통령이 인간사 새옹지마라며 사면해줬지뭐야 ? 아무튼 정치인은 요상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