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억 년의 고독 / 허만하
무수한 은백색 화살표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돌고
있었다. 밀려오는 먼 물빛 바람을 예감한 나뭇잎같이
한 방향으로 쏠리는 그것은 저마다 몸을 흔드는 싱싱한
은빛 반짝임이었다. 소용돌이는 이따금 겹치기도 하고
원심력처럼 언저리로 퍼지기도 하면서 무리를 이루어 갔다.
몇 개의 작은 원둘레는 커다란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지기도
했다. 타원의 한 중심으로 수많은 화살표가 과녁처럼
빨려들고 있었고 다른 중심에는 너울거리는 미역이 붙어있는
시꺼먼 암초가 퍼질고 앉아 있었다. 바위 틈새에서 갑자기
한 마리 고기가 솟구쳐 올라 무리를 아득히 앞선 자리에서
몸을 틀며 물을 치기 시작했다. 수천 마리 은백색 목숨들은
하나의 속도가 되어 선두의 외로움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바다 밑바닥에서는 찢어진 시간의 그물 조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모래가 가라앉자 번식의 허망함 같은 목숨의
찌꺼기가 암반 껍질처럼 엷게 쌓이기 시작했다.
수천 마리 멸치 가운데서 익명의 한 목숨이 불을 뿜으며
일렁이던 지각에 묻혀 산 위에 떠올라 있었다.
일억 년의 캄캄한 고독 끝에 눈부신 햇살을 맞이한 봄멸치의
주검은 섬세한 갈비뼈가 떠받치고 있는 비린내의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출처] 허만하 시인 1|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