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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피로 물든 요하강 (2) 만주 분쟁과 혼세마왕의 출현
청나라의 발흥지 ‘만주’
‘만주족’이 지배하던 청나라는, 만주에서 발흥한 왕조였습니다.
다수의 만주족이 고향을 떠나 중국 내륙으로 입성함에 따라,
만주는 무인지경이 되는 곳이 많았지만, 광활한 지역에는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들과 몽골계 민족들이 다수 거주하고도 있었습니다.
(※ 기타 상세한 내용은 「신불해」, 「팬더아빠전쟁사」..... 님의 글을 참고하시고, 본 자료는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과 관련자 진술을 참고하여 멋대로 작성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알려드리며, 성명 등등은 역사적 호적상 이름과 다를 수 있음을 또 알려드립니다.)
청나라때는 ‘흑룡강 장군’, ‘길림 장군’, ‘성경 장군(일명 '봉천장군' 혹은 '봉천사또')’이 오늘날 만주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청나라 시대 만주 일대의 민사 행정은 주로 ‘봉천부’라는 관청이 봉천(오늘날의 ‘심양’)에 설치되어 담당하였고,
몽골, 조선, 여러 민족들과의 문제에도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길림장군', '흑룡강장군', '봉천장군'의 청나라 말엽 관할지
몽골, 제정러시아, 청나라, 일본, 중화민국, 동북군벌의 각축지
조선에서 사신들이 중국을 가는 길에 ‘봉천(혹은 성경, 심양)’을 들렸고, 관련된 기록을 남겼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을 보기 전에는 조선시대에 작성된 한국 사신들의 ‘연행록’이라는 기록들을 참고하기도 하였습니다.
몽골의 쇠퇴와 러시아의 동진
징기즈칸 시대, 한 때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몽골족이 비록 쇠퇴의 길에 접어 들었지만
조선시대 조선 사신들이 기록했던 ‘연행록’들을 살펴보면 만주의 대도회 ‘봉천’ 위로는 ‘몽골’의 영역이었으며, 청왕실과 연계된 몽골의 왕공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며, 몽골족은 멀리 우랄산맥 너머 유럽, 흑해까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초원이라는 특성상, 말로 이동하기 쉬워 예로부터 문명이 교류하는 곳이었습니다.
고대시대 요하 문명의 ‘청동기’, ‘철기’가 바로 이 초원의 길을 통해서 전해진 것도 있는 모양입니다.
청왕조에 들어와
유럽에서 발흥한 백인들이 주류 민족을 이루는 러시아(아라사)가 동진해 와서 몽골계,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복속시키고
‘나선정벌(1654~1658)’, ‘알바진 전투(1685~1686)’, ‘네르친스크 조약(1689)’, ‘애혼조약(아이훈조약, 1858), ‘이리조약(1881)’ 등을 맺으며 중국과 흑수강(혹은 ‘흑룡강, 아무르강’, ‘몽고 까만강’) 일대와 시베리아에서 국경을 이루게 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들입니다.
청나라의 쇠락
1839년부터 시작된 아편전쟁 등은 기울어가는 청나라의 국력을 사실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무렵 조선에서도 각종 호란을 일으킨 만주족을 멸하자는 생각은 사라지고,
상국으로 섬기던 청나라를 배우자는 실학운동까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러시아 등의 중국 국경 침입으로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면서 홍콩섬 등이 영국에 넘어가고, 연해주 지방이 러시아로 할양되었습니다.
조선 역시 제정 러시아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양무운동
외세의 침입으로,
1861년경부터 청나라는 ‘중체서용’을 내걸고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이룩하고자 합니다.
양무 운동은 근대적인 군수 공장을 설립, 군제개편, 철도건설, 유학생 파견, 민간기업 설립 등 약 3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중국의 내우외환과 조선인들의 만주 진출
이 무렵 중국과 만주는 ‘내우외환’의 시기로,
태평천국(1851년~1864년경) 운동뿐만이 아니라,
조선에서도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과 세도정치의 폐단과 생활의 궁핍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경주의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이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그 세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1864년 혹세무민 등의 이유로 창도자 수운 최제우 처형후에도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조신원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과 1919년 동학교도의 3•1운동 주도 등은 과거의 악습을 폐지하고 자주 독립국가 건설과 새로운 시대로 가려는 의지의 결과였으며,
1894년 동학운동 때의 무자비한 토벌을 피해, 탈출해온 일부 동학교도들은 만주로도 이주하여 왔습니다.
만주에는 박해받던 조선인들, 가난에 시달린 사람들,
일제의 탄압받던 조선인들도 진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제의 중국과 만주 일대의 친일파 양성과 혼세마왕의 출현
일본은 서구와의 개항에 적극적이었고, 특히 군제개혁과 군비확충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였고, 서구 열강들처럼 입헌군주제적인 의회민주주주의 체제를 구성하는 척하면서도, 결국에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군국주의를 강조하며 주변 국가 침략에 나섭니다.
일본의 진출방향은 처음에는 현대적인 국경이 불분명한 태평양 일대의 도서, 홋카이도, 쿠릴열도, 사할린섬, 오끼나와 일대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대륙으로 가는 꿈을 다시 꾸고,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조선에서의 친일파 육성, 중국과 만주, 러시아에서 친일파 육성에 나서게 됩니다.
일본이 가장 노리던 곳은 조선과 만주였습니다.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파인 동북왕 ‘장작림’과 혼세마왕 ‘장종창’은 일본이 없었다면 ‘동북왕’이나 중국의 대표적인 ‘친일군벌’이 될 수도 없었고,
만주를 장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일본이 지원하고 양성한 가장 큰 친일파였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중국내륙에도 ‘왕정위’ 등의 유명 친일파들도 나타납니다.
중국의 말세 혹은 혼세가 되면 등장한다는 '혼세마왕' , 즉 친일군벌 장종창의 군대
혼세마왕 장종창(張宗昌, 1881~1932)
“狗肉将军”、“混世魔王”、“长腿将军”、“三不知将军”、“五毒大将军”、“张三多”等
물론 최근에도 일본의 지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매우 많습니다.
램지어, 존 J. 스테판 등등은 한국에서도 매우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일본의 지원으로 저술활동을 하신, 존 J. 스테판
만주로의 인구 유입
청나라 초기에는 만주족이 중국까지 장악하고 중국 본토로 이주하게 되자, 간도지방과 오늘날의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인구는 매우 적었습니다.
1658년경 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 등에 대한 봉금령을 내렸고,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억제하였으나, 러시아가 동시베리아로 진출할 무렵부터 순차적으로 해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 무렵의 만주
1895년경 만주 인구 대략 500만여명중 한족(漢族)은 이미 200만여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500여만명은 광활한 만주가 여전히 무인지경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운동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지속하고자 간섭하였으나, 서구화된 일본군의 전투를 이기지 못하고 조선에서 전패하고, 만주로 쫒겨나 만주 일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압록강을 넘은 일본군은 주로 당시 행정구역상 ‘봉천성’ 일대의 만주지역 인구밀집 지역을 손쉽게 점령하였고,
요동반도의 여순도 점령하였습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면서, 청나라에 대한 일제와 서구 열강의 침략은 더욱 가속화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만주와 중국에는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 ‘포르투갈’ 등등의 세력들이 자기땅인양 설쳐 대고 다투기 시작하였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통해서는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조선인들까지 이주가 있었으나,
조선인중 상당수는 예전 ‘고구려 혹은 하구려’라고 부르던 나라의 후손이었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곡창지대인 만주
만주는 ‘콩’의 원산지로 알려졌으며, 기름진 토양으로 오늘날 10억 이상의 인구를 가진 중화인민공화국의 최대 곡창지대중 하나입니다.
그 넓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땅에서도 농업생산력이 중국 만주를 당해내지 못한다고 하니, 만주가 얼마나 비옥한 땅인지 짐직할 수 있으며,
북한의 평야지역인 ‘평안도’와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동청철도(중동로 철도)의 건설과 러시아와 일본의 이권침탈
청나라의 1895년경 청일전쟁 패배 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협의에 따라 1897년 만주를 횡단하는 중동철도(동청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러시아가 러•일전쟁 패배후 1908년경부터 60만명 극동이주 계획 등을 추진하자, 청나라는 이에 대응해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고자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장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주의 도로망, 철도, 아무르강과 요하강, 압록강, 두만강 등을 통한 통행은 급격한 증가를 이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청왕조의 발상지 만주는 이권을 노리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그중 일본과 러시아, 영국, 미국이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청나라(만주족)의 만주 이민 정책
청나라 초기 만주지역에는 중국 내부와 같이 수십에서 수백여개의 현(縣) 단위 행정구역 위에 성 등의 행정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봉천부’라는 관청을 중심으로 행정조직이 운영되다가, 조선시대 후반부터는 길림성, 봉천성(오늘날의 요령성), 흑룡강성 등이 생겨나고 그 아래에 수십에서 ~ 수백여개의 현(縣) 단위 행정구역이 생겼습니다.
‘봉천장군과 봉천부윤’을 대체하여 만주를 총괄하는 ‘동북삼성 총독’도 나중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청나라 말엽에 벌써 만주 주민의 대다수는 한족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성량(李成梁. 1526년경 출생 ~ 1615년경 사망) 등은 명나라 시기 조선을 깔보던 자라고 예전 자료에 가끔 나오며,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공부상서 김간(金簡. ?~1794년경 사망) 등과 같이 조선과 관련된 인물은 조선이 중국을 섬기던 시기에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에도 1912년 청왕조 멸망할 때까지 만주족의 청왕조는 일제에 적극 협조하거나, 조선인들의 만주∙간도 이주를 강하게 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강, 평야, 산으로 이루어진 국경을 통제할 능력이 당시에는 없었고, 오늘날도 북한 탈북자들, 중국인 밀수꾼, 사냥꾼 등이 자주 들락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관련자료 출처
장종창 (혼세마왕, 중국의 대표적 친일파)
https://www.bilibili.com/video/BV15G411V7q6/?share_source=copy_web
첫댓글 땅도 넓고 기름지고 만주를 둘러싼 역사도 깊네요
예.. 예전부터 밭작물의 곡창지대였을 것입니다.
비료도 필요 없을 정도로 비옥하고, 심어 놓고 낫만 들고가면 되는 곳요..
글읽다가 궁금해서 그럽니다만
신불해님은 여기 명예의 전당에
글이 많은데 '욱이네' 이분 글은
어디에서 볼수가 있는지요
욱이님(팬더아빠 전쟁사)은 중일전쟁사 책을 쓰신 분이시죠.
카페 회원 '푸른장미'님도 가끔 인용하셨죠
욱이네-> '팬더아빠 전쟁사'로 변경합니다.
https://blog.naver.com/atena02
@신룡기2 감사합니다
좋은글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