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 나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내 생전에 가장 가 보고싶은 곳이다. 그리고 흰눈에 덮인 산정상에 올라, "나는 표범이다"라고 크게 외치고 싶다.
미국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서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킬리만자로의 눈덮인 정상부근에는 말라서 얼어죽은 한마리 표범의 시체가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내가 늘 궁금해 하는 것은, 킬리만자로는 해발 5,895미터의 높은 산이긴 하지만 사시사철 태양이 작열하는 적도 바로아래 열대지방에 위치해 있는데 어떻게 만년설로 뒤덮여 있으며, 전설속의 표범의 시체는 과연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또 표범은 왜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까? 먹이를 찾아서인가, 아니면 스스로 죽기 위해서 였을까? 난 오늘도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 서문을 기억하면서 많은 상념에 잡혀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대해 작가 신영복님은 "더불어 숲"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는 표범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하여 킬리만자로 산기슭에 사는 마사이족 여러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표범이 만년설이 있는 꼭대기까지도 올라가기도 합니까?" "올라가지 않습니다. 눈이 있는 곳은 적어도 5천미터 이상이니까요" "만년설 부근에서 혹시 한번쯤 표범의 시체가 발견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가장 높이 올라가는 동물은 원숭이지만, 원숭이도 4천미터 이상은 올라가는 법이 없습니다" "혹시 정신병에 걸린 표범이 올라갔다고 볼 수 없을까요?" "천만예요. 동물은 정신병에 걸리는 법이 없을걸요? 정신병은 사람만이 걸리는 병일걸요" 사람만이 정신병에 걸린다는 말에 나는 더 이상 물어 볼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만이 정신병에 걸리는 것이지, 동물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그 원주민의 대답은 현대문명속에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꼭 킬리만자로를 여행하리라. 그리고 헤밍웨이가 머물며 소설을 썻던 "암보셀리 국립공원"과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가서 자유롭게 뛰놀고 있는 사자, 표범, 기린, 얼룩말 등도 보고, 매년 5월이면 200만 마리가 넘는 누우떼가 푸른녹지를 찾아 케냐쪽으로 이동하는 대 장관을 보고싶다.
그리고 산정상에 올라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에서 동이 트는 것도 바라보고, 산밑에 펼쳐진 드넢은 암보셀리 평원과 얼어죽은 표범의 시체를 조용히 음미하며 내 삶을 다시 정립하고 싶다.
사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은 1952년 헨리킹 감독이 당대의 명배우인 그레고리 펙, 수잔 헤이워드, 에봐 가드너 등을 캐스팅하여 영화로 제작, 더 유명해졌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가수 조용필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불러 더 알려졌고, 그 영향으로 해마다 수많은 한국관광객이 이곳을 찾게되자 탄자니아정부는 수년전 조용필을 초청하여 문화훈장을 수여하고 명예홍보대사로 위촉까지 하였다.
나는 학창시절 헤밍웨이의 작품들을 좋아해서 "무기여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 거의 다 읽다시피 했다. 나는 "킬리만자로의 눈"을 소설로 읽고 영화도 보았지만, 그동안 먹고 살기에 바빠 까맣게 잊고 살다가 20여년전 조용필이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 노랫말에 매료되어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노래라기보다는 오히려 한편의 감동시로 여겨졌다. 그 이후 지치고 힘들 때 조용히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틀어놓고 듣고 또 듣고...그러다보면 어느새 내 마음이 평온해지고, 일할 용기를 얻곤 하였다.
처음에는 가사를 몰라 코로만 흥얼거리기도 하였고, 밤새도록 카세트를 틀어놓고 테이프를 몇번씩 반복하면서 가사를 적어 배울정도로 한동안 이 노래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나는 헤밍웨이가 소설속에서 표범의 시체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먹을 것이 없는 산정상까지 올라가 얼어죽은 표범이 상징하는 것은 도시문명속에서 살고있는 우리들 자화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일상화된 초원이 주는 권태로부터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만년설을 올라갔던 그 표범처럼, 우리 역시 도시에 찌든 지친 생활을 벗어나고자 저 멀리 아프리카를 찾는 것은 아닐런지...
도시는 자연을 거부하며 자연과 끊임없이 싸우는 공간이다. 우리의 도시는 누우, 얼룩말, 영양같은 초식동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이러한 초식동물을 먹이로 삼는 육식동물, 곧 사자, 하이에나, 표범으로 살아온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오늘도, 또 앞으로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도시문명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만년설을 찾아가는 지친 표범같이......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들고 지치셨습니까? 그리고 고독하십니까? 조용필이 부른『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조용히 음미하며 마음의 평온을 찾아보세요.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화가도 있었다는데 위안을 삼고 용기를 내세요. 아자! 아자! 화이팅!
(대사)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 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가사)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이 없으면 또 어떠리
(대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때 그것을 위안해 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것 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건 사랑 때문이라구?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 진다는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