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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 1,18ㄴ-26>
형제 여러분,
18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이 일이 나에게는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25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 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26 그리하여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가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거리가 나 때문에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4,1.7-11>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질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리' 혹은 '위치'를 차지하고, 그 '자리'에 따른 역할과 사명을 부여받아 살아갑니다.
‘자리’는 때로는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를 만들고 빈부귀천을 형성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 대한 열망은 출세와 입신양명의 성공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을 넘지 않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은 교양이요 미덕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든지 타인을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고 우러르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겸손과 인격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루카 14,8-10)
이 비유 속에서 초대받은 사람의 관심은 온통 '자리'와 '대우'에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잔치에 초대받은 이에게 중요한 것은 ‘자리’가 아니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요, 자신에 대한 ‘대우’가 아니라 초대해주신 분의 호의에 감사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를 초대한 혼인잔치에는 말씀과 성찬의 밥상이 너끈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몸으로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이 밥상은 윗자리에나 맨 끝자리에나 그 어느 자리에나, 모두 풍성합니다.
그러니 자리 밑에서 부스러기만 주어먹을 수 있어도 행복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것만으로 이미 행복입니다.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하신 분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것이야말로 축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질 것입니다.”
(루카 14,11)
이는 사람의 ‘높고 낮음’이 자신의 욕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신 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높낮이는 자신이 정하거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배정되는 것이며, 주어지는 것이요 부여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종결어미는 ‘낮아지고’ 혹은 ‘높아질 것이다’는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오히려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이가 높아질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지고' 상대를 낮추는 이는 자신도 함께 낮추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려가 상대를 높이는 일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떨어져 땅에 뒹구는 이 가을의 낙엽처럼 돌아가 썩어 거름이 될 자리로 가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는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두 가지 부러움>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하며, 자기의 진정한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바오로 사도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럽다는 것은 나는 그러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저 자신을 성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의 바람이 아닌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저의 바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럽고 무엇이 부러운 것입니까?
부러워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바오로 사도가 부럽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차원일 것이고, 제가 미련 없이 또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지 지금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는지 그 차원일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과 사랑의 차이이고, 바오로 사도의 믿음과 사랑이 부러운 것입니다.
저도 지금 생각에는 주님께서 부르시면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지만 그 상황이 되면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랄까 확신이 부족한 반면, 오늘 바오로 사도는 확신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사랑의 차이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면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께 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일 것이고 그래서 그 길에 두려움이나 미련은 없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면에서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데 비해 저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만큼 주님을 덜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주님 사랑에 대한 부러움이라면 또 하나의 부러움은 이웃 사랑에 대한 부러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른 데서도 이웃 사랑의 높은 경지를 토로한 적이 있지요.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불행, 곧 지옥에 가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말입니다.
저도 이웃 사랑을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사랑과 결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의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저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차원,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사랑에 많이 머물면서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려고 하는 애를 쓰는 차원이고, 그래서 이웃을 위해 고통을 좀 감수할지는 몰라도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바오로 사도로부터 자극도 받고 도전도 받는 오늘 저이고, 아마 여러분도 같은 자극과 도전을 받는 오늘일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대접 받길 원하는 사람>
저는 이런 저런 모임에 가면 제 자리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와서 그 자리까지 안내해 주기를 바랍니다.
더더욱 낯선 곳에 가면 저를 소개해 주기를 기대하며 한 말씀 해달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본당신부 할 때입니다.
구역 모임에 가면 음식을 나누게 되는데 설거지의 어려움 때문에 일회용 접시를 많이 쓰게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일반 접시를 사용하도록 해줍니다.
제일 먼저 음식을 챙기고 저만 특별대우 받는 것 같아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어쩌다 똑같이 일회용 그릇을 쓰게 되면 속으로는 누군가가 바꿔주기를 바랍니다.
삶은 따르지 못하면서도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원하며, 누군가가 바른 소리를 하면 서운해 하고 오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대접 받기에 익숙해져 있고 또 특별한 예우를 원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루카 14,11)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우리가 겸손하다면 그 무엇에도 우리는 초연할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 토마스 아 켐피스는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잘 있으니, 그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접 받고 싶은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했으니 겸손의 길은 멀고도 멀게 느껴집니다.
혹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를 청하는 이가 있다면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진대 언제 겸손이 몸에 익을 수 있을까?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지체 높은 이들 자리에 서지 마라.
“이리 올라오게!” 하는 말을 듣는 것이 귀족들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낫다.”
(잠언 25,6-7)
기회가 되면 더 낮은 자리를 잘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교만은 돼지비계처럼>
새를 파는 가게에 잘 생긴 카나리아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카나리아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마을의 부자가 그 카나리아를 샀습니다.
카나리아는 고운 소리로 노래를 불러 집안사람과 손님들, 이웃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새 주인이 된 부자도 그 카나리아를 자랑하고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자 카나리아는 우쭐해졌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어도 노래를 그칠 줄 몰랐습니다.
카나리아의 노랫소리를 칭찬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시끄럽다고 항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도 카나리아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부자는 카나리아를 헐값으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 카나리아를 사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가장 큰 적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자아라고 하고 교만이라고도 합니다.
잘 나가다 교만해져 망해버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공할수록 조심해야하는 것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출신 본당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서품 받을 때도 앞장서 저를 도와주신 분입니다.
사제가 된 지 몇 년 후, 그 자매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저에게 따끔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그러고 보니 전화를 받는 투가 퉁명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투로 신자들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치켜세워주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만은 교만하고 싶어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교만해지는 것을 방치했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교만은 마치 잡초처럼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나 나를 망쳐버립니다.
나이 많은 한 수도자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조금은 교만한 젊은 수도자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경험 많은 수도자는 후배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자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옆으로 다 흘러가고 맙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자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자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얘기한다네.”
소련의 반체제 인사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교만은 돼지의 비계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자란다.”고 했습니다.
비계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저절로 생기게 돼 있습니다.
끊임없이 낮아지는 연습이 없으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교만 때문에 망가집니다.
깨어짐의 영성은 수도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자신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끊임없이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야합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절로 교만해지기는 하지만 저절로 살이 빠지지 않듯 저절로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겸손은 마치 흐르는 물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겸손하기 위해 맨 마지막 자리를 의식적으로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더 교만해져 있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생애 안에서 주님의 성령께서 하신 일은 정말이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데 최일선에 서서 달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강풍이 불어오자 박해자 사울은 애제자 중의 애제자 바오로 사도로 환골탈태했습니다.
남은 생애 내내 바오로 사도는 한때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존재였음을 크게 가슴 치며,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장이라도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고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유일한 의미요 희망이었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의 완벽한 변화의 흔적이 오늘 우리가 첫 번째 독서로 봉독한 필리피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은 것이 이득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회심한 바오로 사도는 조금이라도 빨리 그리스도를 만나뵙고자 하는 마음에 최대한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갈구했고, 그리스도를 사랑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을 묵상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으며 ‘이 나이에 무슨 변화?’하지만,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좀 더 마음을 활짝 연다면,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좀 더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다면,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활동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겸손의 여정 - 겸손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무지한 자가 교만한 사람이요, 지혜로운 자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겸손한 자들은 저절로 호감이 가고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참 아름다움과 매력도 겸손에 있습니다.
참 사랑도 겸손한 사랑입니다.
겸손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만추의 아름다움이 흡사 겸손한 노년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초연한 아름다움, 겸손한 아름다움입니다.
어제 70대 사촌 형제들을 만나면서 지닌 느낌입니다.
예전과는 다른 만추의 겸손을 느끼게 하는 편안하고 넉넉한 분위기였습니다.
인생은 날로 겸손해지는 ‘겸손의 여정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 갈수록 주님을 닮아 날로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고, 넉넉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어른일 것입니다.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진정 좋은 삶은 날로 깊어지는 겸손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낮은 자리에 앉으라’, ‘끝자리에 앉으라’, 결국은 ‘겸손하라’는 주님의 권고입니다.
우선 겸손을 좋아해야 합니다.
겸손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때 겸손의 은총을 입습니다.
겸손 역시 은총이요 선택이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의식적으로 겸손을 선택하고 부단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겸손의 훈련과 더불어 무지로부터의 해방되어 지혜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겸손이 바로 지혜와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부단히 겸손의 선택과 훈련에 충실하다보면 겸손도 습관화되고 제2천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앉아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겸손을 사랑하는 이들은, 애당초 윗자리를 피하고 끝자리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자들은 저절로 높아질 것이니 이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막 교부들의 언행록에서 겸손에 대한 일화가 유익하다 싶어 몇 편을 나눕니다.
1. 안토니오 압바는 말했다.
“나는 적이 세상 곳곳에 설치한 덫들을 보았고, 속으로 탄식했다.
‘무엇으로 이들을 통과할 수 있겠는가?'
그때 한소리가 들려왔다, 겸손!”
2. 테오도라 암마는 말했다.
“금욕도, 밤샘기도도, 어떤 종류의 고행도 아닌 오직 겸손만이 나를 구원한다.”
악령들을 물리친 은수자가 악령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너희를 달아나게 했느냐? 단식?”
“아니다, 우리도 먹거나 마시지 않는다.”
“밤샘기도?”, “아니다, 우리도 잠을 자지 않는다.”
“세상으로부터 떠남?”,
“아니다, 우리도 사막에서 산다.”
악령들은 말했다.
“오직 겸손을 제외한 어떤 것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너는 겸손이 어떻게 악령을 퇴치할 수 있는지 보지 않았는가?”
3. 테오바이드의 요한 압바는 말했다.
“무엇보다 수도승은 겸손을 획득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이다.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이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4. 카리온 압바가 말했다.
“나는 내 아들 자카리아스보다 더 많이 노고를 다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겸손과 침묵의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5. 언젠가 악마가 칼을 들고 마카리우스 압바 발을 베려했다.
그러나 그의 겸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자 말했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나도 가졌다.
네가 우리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다만 겸손뿐이다.
겸손으로 너는 우리보다 더 좋은 것을 얻은 것이다.”
6. 한 형제가 티테오스 압바에게 말했다.
“어느 길이 겸손으로 이끄는가?”
장로는 대답했다.
“겸손의 길은 이것이다. 자기 절제, 기도, 자신을 모든 피조물보다 못하게 생각하는 것”
7. 오르 압바는 말했다.
“수도승의 금관은 겸손이다.”
사막 수도승들이 궁극으로 목표한 바도 겸손이요 참된 수도승은 물론 모든 성인들이 겸손했습니다.
참으로 겸손과 함께 가는 진실, 지혜,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제1독서 필립비서에서 겸손의 절정에 있는 바오로 사도를 만납니다.
공동번역을 인용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필립1,20-21)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주님 중심의 삶에 날로 깊어질수록 저절로 주님을 닮아 겸손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겸손의 여정입니다.
날로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주님을 닮아갈수록 겸손과 지혜, 사랑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만추의 아름다움이 바로 만추의 겸손한 노년을 맞이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겸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 물으십니다.
"윗자리에 앉지 마라."
(루카 14,8)
안식일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게 된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자리'는 참 민감한 요소지요.
집주인들은 손님을 맞이할 때 자리 배치에 고심을 하고, 손님들도 자기에게 적합한 자리를 찾느라 나름 신경을 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좀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것이 육의 본능인가 봅니다.
자기가 배운 것보다 더 아는 것처럼, 가진 것보다 더 가진 것처럼, 본래 생긴 것보다 더 잘난 것처럼 보이려는 욕망이지요.
그저 잠시 좀 더 낫게 보이는 것으로 끝나면 허영과 위선 정도로 그치지만, 이를 고수하다 보면 결국 허세와 거짓으로 발전합니다.
'윗자리'는 인간의 이런 욕망들을 대변하는 단어 같습니다.
초대해 준 데 대한 감사와 주인공에게 전하는 축하로 충분한 자리에서 자기 위상과 영광을 고심하는 모습이 예수님께 참 안타깝게 비친 것 같지요.
사실 재산을 표시하는 숫자와 누리는 권력의 양으로 스스로 높다고 여겨도 진심으로 그를 높게 보아주는 시선이 없다면, 그 '윗자리'는 그저 자기 만족의 외딴 섬일 뿐인데 말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1)
자기가 스스로 분투하여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쟁취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실상 사람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그 자리 역시 어떠한 이유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일 뿐이지요.
주어진 만큼 하느님과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을 지게 되는 것이 이치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끝자리 신세여도 스스로 자존감이 충만하고 타인의 마음 한켠에서 선한 영향력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위아래 상관없이 귀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공간적 자리 개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겉꾸밈도 가면도 허세도 필요 없지요.
이런 이는 이미 하느님께서 들어높이신 존재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거취에 대한 바람을 진솔하게 드러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필리 1,23-24)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때문에 당장이라도 죽음으로 건너가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이득인 셈이지요.
하지만 신생 교회들이 겪고 있는 성장통을 생각하면 아직은 지상 여정을 지속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 또한 그에게 부여된, 보람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해 자유로운 그에게는 윗자리, 끝자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상이든 천국이든, 상석이든 말석이든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그는 어디에 있든 초연합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가장 끝자리의 두려움을 넘어선 이에게서 우러나는 진정한 자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영원한 천상 혼인잔치를 희구하는 이는 세상이 규정해 놓은 윗자리, 끝자리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보이는 자리에 거짓으로라도 발끝을 걸치고 싶어 기웃거리지도 않지요.
육신은 여전히 지상에 묶여 있지만, 이미 그의 영혼이 주님에 가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허영과 자리 다툼이 그의 영혼을 흔들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자신을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더 이상 외적 자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성생활의 관건은 '우리 영혼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지요.
우리가 주님 곁으로 가까이 갈수록 더,더,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거기 계시니까요.
우리는 가장 초라하고 가난한 바로 거기서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가 천상의 주인이신 분의 옥좌가 아닐 수 없겠지요.
거기서 그분과 하나된 우리는 자연히 높아집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서 계신 자리를 찾아 나아갑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오랜 만에 신부님들 4명이 함께 캠핑을 가기로 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의 단풍을 보기로 했습니다.
캠핑에서 먹을 음식도 준비하고, 캠핑 장소도 예약하고, 준비물을 다 챙겼습니다.
떠나기 며칠 전에 신부님 한 분이 감기 몸살이 심하다고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습니다.
건강을 잘 챙기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출발 당일에도 신부님 한 분이 몸 상태가 안 좋다고 다음 날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해 주면 좋았을 텐데 약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캠핑장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모처럼 후배 신부님과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2차선 도로에 4대의 차가 들어오면 병목 현상이 있어서 교통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4차선의 도로에 2대의 차가 지나가면 막힘없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4명이 함께 하기로 했지만 2명이 캠핑을 하니 그것도 좋았습니다.
우리 옆에는 혼자 캠핑 온 젊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함께 하는 인원도 중요하지만 자연 속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것도 중요합니다.
문득 미국에 와서 제가 하는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일입니다.
신문을 만들고, 홍보를 통해 구독자 수를 늘리고, 직원들이 일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입니다.
2년 전부터 ‘부르클린한인성당’의 일도 하고 있습니다.
매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장례가 나면 연도를 함께 하고, 본당의 행사에도 참여합니다.
‘퀸즈성정하상바오로성당’의 미사도 도와주고 있습니다.
주로 목요일 아침미사를 하고 있습니다.
‘동북부엠이대표’의 일도 하고 있습니다.
매달 줌 미팅이 있고, 엠이 주말도 있고, 미주지역 엠이 총회도 있습니다.
바쁘기는 한데 어찌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4가지의 일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은 지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르클린한인성당은 미사와 강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퀸즈성정하상바오로성당은 사제들과의 친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동북부엠이대표를 하면서 부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확고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사느냐 죽느냐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의 양을 이야기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루는 업적을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다른 것들은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남과의 비교를 통해 지금 삶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비교하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비교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처음 수영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저보다 수영 잘하는 사람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제 수영 실력이 떨어지기에 수영 잘하는 사람의 모습을 계속 관찰하면서 저의 수영과 비교했습니다.
이 비교를 통해 저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할 수 있었고, 제 실력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비교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입니다.
지금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비교,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비교, 스스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라고 느껴지면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비교 등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가 아닌, 자기를 성장시키는 비교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를 더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보지 않고 부러워하는 대상만을 바라보면 ‘나’를 괴롭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의 성장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선 안에서만 부러움을 갖지 않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라고 하면서, 당시의 식탁 예절을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당시의 식탁 예절은 아주 엄격했습니다.
특히 식탁 앉는 순서가 분명했지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대체로 맨 나중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지위에 맞게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과시에 신경 썼기에 윗자리를 탐냈습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인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자기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 올라오십시오.”라는 말을 듣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의 겸손을 간직해야 가장 높으신 하느님께서 높여주신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품위는 하느님이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면서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지 말고, 남과의 비교로 성장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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