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_d3q9C0Mcfg?si=_PuO9DM8N-t06Qn-
하이든 첼로 협주곡 2번
하이든은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정 부악장에 취임한후 약 30년간 6~8곡의 첼로 협주곡을 작곡했다고 하지만, 현재 직접 작곡했다고 확인된 것은 1번과 2번 협주곡이다. 하이든은 아이젠 슈타트의 궁전에 거주하며 그의 주위에는 많은 연주자들이 있었는데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 안톤 크라프트의 조언을 받아 이 협주곡을 1783년에 작곡했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교라든가 첼로의 완벽한 서정적 성격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806년에 '작곡가의 원본에 의거' 라는 주석을 달아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에 대한 논란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1953년 하이든의 친필 악보를 찾아냄으로서 의심이 풀렸고 현재 원본은 빈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이든의 대표적인 첼로 협주곡인 이곡은 원래 작은 실내합주를 위해 썼는데 19세기말 지휘자이며 음악학자인 제베르가 관현악 편성으로 확대시키고 솔로부분과 카덴자를 보안했다. 1960년대에는 장드롱이 좀더 원작에 가깝게 수정하여 출판했는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야노스 슈타커,Janos Starker(1924- ) 헝가리 태생의 미국 첼리스트
야노스 슈타커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로 굴곡진 20세기를 살면서 자의로 고국을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했고, 서구 현대 문명의 특징인 냉철한 이성주의와 관념주의적 접근에 의한 절대미를 추구한 냉철하고 지적인 연주자이다. 그는 무대 위에서도 필요 이상의 몸짓이 없고 오직 음악을 위한 종사자이고자 했던 20세기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중 한 사람이며, 현역 독주자 중 최원로급에 속한다.
야노스 슈타커는 1924년 7월 5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원래 러시아 태생으로 헝가리로 이주했는데, 당시 국적도 얻지 못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이 감지하고 7세부터 첼로를 가르쳤다. 그는 부다페스트에 있는 리스트 음악원(Franz Liszt Academy of Music)에 입학해 다비드 포퍼(David Popper)의 제자였던 아돌프 쉬퍼( Adolf Schiffer)문하에 들어가 15세에 졸업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연주대에 오른 슈타커는 1939년 음악원을 졸업할 즈음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 학생 시절, 자신의 스승 캐러비에게 코다이(Zoltán Kodály)가 헌정한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초연하였다. 이를 계기로 슈타커와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는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졸업 후,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로 취임하면서 연주가로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연주는 물론 거의 2년 동안 첼로를 만져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다시 활동을 시작했는데, 1945년에는 부다페스트 오페라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첼로 수석을 겸임하게 되었고, 비로소 헝가리 국적을 획득했다. 또한 피아니스트인 조지 쉐박(Gyorgy Sebok)등과 트리오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헝가리에서의 활동을 멈추고 1948년 루마니아,오스트리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댈러스 교향악단의 수석주자가 되었다. 그 후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의 요청으로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
1951년,피아노의 율리우스 카첸(Julius Katchen),바이올린의 요제프 수크(Josef Suk)와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나,1969년 카첸의 죽음으로 그만두었다. 다시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시카고 교향악단에서 수석주자를 맡은 다음 솔리스트가 되었다. 1958년부터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교육 활동도 하면서 뛰어난 첼리스트를 차례로 배출하였다.
슈타커는 1950년 무렵 레코딩한 코다이 무반주 첼로의 생생하고 생명감 넘치는 녹음으로 유명하며, 이후 금세기를 대표하는 첼리스트로 꼽히고 있다. 그는 초인적인 기교의 소유자이지만 쇼맨십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기교가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연주에서 차갑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하지만 그는 깊이 성찰하는 첼리스트이며,작품이 지닌 묘미와 뉘앙스를 섬세하게 살려낸,그리고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따스함을 훈훈하게 풍겨낸 첼리스트이다.
1972년 뉴욕 필과 하이든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쇤베르크는 이런 평을 했다.
..."슈타커는 귀족적인 엄격함을 갖고 연주했고,고도의 논리로 음악적 소재를 구도화했다.
그의 완벽한 아티큘레이션은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으며,첼로 소리는 크고 아름답게 울렸다. 그의 하이든 협주곡은 분명함과 균형감에 있어 극치였다."...
이처럼 슈타커는 어떤 음악을 연주할 때에도 감정에 휩쓸리는 법이 없다. 항상 냉정하게 작품의 양식을 정확히 파악해 고도의 테크닉과 함께 그것을 축으로 감정을 담아낸다. 따라서 그의 연주 매력은 불과 얼음이 환상적으로 매치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과장된 제스처나 쇼맨십에 반대하며,또 하나는 헐리우드 영화 속에 멜랑콜릭한 장면에 단골 악기로 등장하는 첼로의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지나친 비브라토나 불필요한 포르타멘토를 피한다.
슈타커의 또 하나의 업적으로는 첼로 교육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무척 즐기는데,스스로가 성격상 연주가보다는 교육자에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는 특히 다음 세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스승의 역할에 대해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현재에도 이미 파리 고등 음악원의 마크 코페,독일 프라이부르크 음대의 헨켈처럼 인디애너 대학에서 배출한 제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연주자·교육자로 활약하면서 슈타커 사단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 비브라토를 비롯해 많은 테크닉들을 바이올린 주법에서 착안해 냈다고 하는데,그의 테크닉 교칙본과 또 그가 편집한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은 첼로를 배우는 학도들에게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또한 왼손의 독립성과 강화를 꾀하는 <첼로 메소드>의 저자로도 이름이 높다.
https://youtu.be/5goikJsYUso?si=3UI7a20-kYdiZTxN
*.슈타커가 말하는 내 인생을 바꾼 음악
<이글은 영국잡지 [BBC MUSIC]의 연재기사인 'Music that changed me'의 첼리스트 야노스 슈타커(Janos Starker)편을 옮긴 것이다>
야노스 슈타커는 1924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고,1948년에 지휘자 Antil Dorati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달라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주자가 되었다. 그는 이어서 지휘자 프릿츠 라이너 아래에서 메트로폴리탄과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을 지냈다. 그는 1958년에 독주자가 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떠났으며 인디아나 대학에서 첼로과 교수가 되기도 했다.
...내 나이 여섯살하고 육개월때,나는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를 만났다.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내게 키스해 주었는데,나는 일주일간이나 세수를 안했다. 우리는 모두 카잘스의 창조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그가 비록 첼리스트들을 위하여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고 하더라도,그의 연주는 우리 세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런것은 아니었다 :
첼로연주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년뒤,나는 에마뉴엘 포이어만(Emanuel Feuermann,오스트리아태생의 미국 첼리스트)을 만났는데 나는 곧 그의 소리를 모방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 바르톡(Bartok) 자신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서 바르톡의 랩소디 1번과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주했는데,그 연주는 카잘스와는 완전히 다른것이었다. 나는 그의 연주가 항상 첼로소리처럼 들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곧 이에 대해서 어떤 강박 관념을 갖게 되었는데,그당시 일반 대중의 마음속에서 첼로라는 것은 언제나 영화나 라디오에서 사랑에 빠져있거나 죽어가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그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생상(Saint-Saens)의 '백조'가 바로 첼로였다. 나는 이것이 지겨웠다. 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지,'첼로 소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했던 리스트 음악원(Franz Liszt Academy)에서 레오 바이너(Leo Weiner,헝가리의 유명한 음악 교육자)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헝가리 학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음악을 듣는법을 가르쳤다.그는 실내악을 지도했다.
1학년때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3학년이 되자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제한이나 조절,그리고 자기억제 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음악은 자기억제와 함께 시작되어져야만 하는 것이고 자기억제는 결코 나중에 덧붙여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음악을 연주할 때 우리는 모두 먼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한 다음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이 학교에서 코다이(Zoltán Kodály)의 교실은 우리 선생님의 교실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무반주 첼로소나타를 공부할때 나는 작곡자 앞에서 연주할 수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나는 이 곡을 자주 연주해서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 역시 많은 로얄티를 받게 해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내 연주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 집의 수영장에는 '이 수영장은 Kodaly가 세워준 것임'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한번은 내가 그의 무반주 소나타 연주를 끝낸 후 코다이가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 와서 말했다.
"16페이지,네가 거기서 리타르단도로 연주하지 않는다면 네 연주는 최고가 될거야"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G이나 G샵인가요?"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그래"라고 말했다.
따라서 지금 나는 그 부분이 G인지 G샵인지에 대해서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지휘자 프릿츠 라이너(Fritz Reiner)는 내 음악인생에 큰 영향력을 남긴 또 다른 사람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에서 4년,그리고 시카고에서 5년,이렇게 9년간 그의 밑에서 수석 첼로주자로 일했다. 그 기간동안 나는 거의 모든 오페라와 관현악곡을 연주했다. 나는 그에게서 과연 음악이란 진정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웠다. 그것은 내가 레오 바이너에게서 배운것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 두사람이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프릿츠 라이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였다. 내 경험상으로,그의 음악에 대한 지각,이해력과 음악적 요구는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내 음악적 견해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보다는,그는 내가 옳다고 믿고 있었던 것 - (즉 순수성,단순성 그리고 균형성,이것들이 나의 3대 신조이다) - 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우리사이는 상당히 좋았지만 내가 솔로활동과 교직생활을 위해서 시카고를 떠났을 때는 한동안 상당히 소원해지기도 했다. 그는 많이 화를 냈는데,나는 내가 그에게서 쫓겨나지 않고 자발적으로 사임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일할때 위대한 명가수들의 연주를 들었던 것은 내 음악적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특별히 그랬다 - 단지 그녀의 드라마틱한 부분이 아니라 그녀의 음악연주 전체가 그랬다. 칼라스나 유시 비욜링(Jussi Bjorling)은 내가 내 연주에서 성악적인 질을 추구하도록 해주었을뿐만 아니라 거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성역(聲域)안에서 칼라스가 음색을 바꾸는 것은 정말 주목할만한 것이었고 나 역시 베이스에서 바리톤으로,테너에서 메조로,소프라노에서 콜로라투라로 부드럽게 음색을 바꾸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하이페츠(Jascha Heifetz) 역시 내게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가 프릿츠 라이너와 함께 브람스의 협주곡을 녹음하러 시카고에 왔을때 시카고 심포니의 첼로수석이었다. 우리는 목요일 저녁에 이 곡을 공연장에서 연주했고 금요일에 레코딩을 시작했다.
아침 9시에 엔지니어가 물었다.
"준비되셨나요?"
그러자 하리페츠가 말했다.
"준비되지 않았소,하지만 이것보다 더 나아질것 같진 않군"
우리는 멈춤없이 협주곡 전체를 연주했다.
그것은 우리들중 그 누구도 다시 들을 수 없는 정말 아찔한 브람스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 녹음을 다시 들은 다음에 보완을 하기 시작했는데,17 시간 후에 그들은 드디어 만족하게 되었다. 그것은 뛰어난 연주였다. 그렇지만 맨 처음에 단숨에 해치웠던 그 연주에는 어느 면에서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레코딩과 콘서트는 그렇게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와 연극같다고나 할까?....
자료출처: 고 클래식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