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아버지의 노제
석야 신웅순
1980년 대전으로 이사 온 지 1년도 채 안되었다.
추운 겨울이었다. 아버지가 감기에 걸리셨다. 감기쯤이라 생각했다. 점점 악화되더니 금세 폐렴으로 돌아섰다. 워낙 건장하셔서 큰 걱정은 안했는데 그만 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살기 바쁜 자식이었으니 아버지인들 어찌 아프다 말씀을 하셨을 것인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나의 큰 불효였다. 부모가 된 뒤에야 깨달았으니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날은 억수 같이 비가 쏟아졌다. 장의차량이 백제대교를 건너서야 비로소 비가 그쳤다. 고교시절 통통배로 건넜던 규암나루였다. 아버지는 대전에 유학해있던 아들에게 하숙비 쌀 몇 말을 메고 건넜던 강이었다.
마을 느티나무 아래 노제가 마련되었다. 소나기가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지난날 당신께서“모냐”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마을 어른들과 윷을 노시던 곳이었다. 정자나무 아래는 동네 어린애, 어른 할 것 없이 기쁠 때나 슬픈 때나 언제나 우리 마을의 축제터였다.
“이보게, 내가 먼저 가야지. 왜 먼저 가셨는가.”
이웃집 곰부리 영감께서 상여를 부여잡더니 털썩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저쪽 아래에선 아낙네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떼엥 떼엥, 에헤허오 어허이허오’
요령소리와 상여소리는 빗소리 때문에 더욱 차갑고 구슬펐다. 상여는 마을 산모롱길을 멀리 에돌아갔다.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평생을 오고 갔던 길이었다. 비가 내리는 산과 들은 적막했다. 마을 사람들이 상여 뒤를 따랐다. 이웃집 곰부리 영감도 마을 아낙네들도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가 가신지 이십년 후 어머니도 백마강을 건넜다. 얼마면 이제 우리들이 건너야할 강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인생 기록‘부모님 전 상서’시조 한편이다.
인생의 어디쯤선
천리 밖의 눈보라
하현달도 못 지운 그날 번진 낙묵 한 점
산 첩첩
쉼표, 마침표
차마
읽지 못하겠네
- 석야 신웅순의 「부모님전 상서」
인생이란 참 묘하다. 죽으란 법은 없다. 쌀이 떨어질 때면 빈 독을 용케도 채워주었다. 주경야독 하던 야간 대학에 다닐 때였다. 그 시절에 얻은 나의 미련한 여유였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마지막 노제 때의 내 눈물과 하늘의 소나기, 이웃집 곰부리 영감을 왜 나는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를 때때로“이 놈아”하며 지금도 큰 소리로 불러내고 있는 것인가.
-2025.3.4. 여여재, 석야 신웅순의 서재.
첫댓글 먹먹합니다.
늘 때묻지 않은 글 참 따뜻합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글 쓰고 싶으나 재주가 없나봅니다.고맙습니다.
숨길 수 없는 연룬의 시간이 온것 같습니다.
40여년 전의 상엿길이 새삼 떠 오른 걸 보면서
그 때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이 떠 오릅니다.
40년도 넘었네요. 장례문화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 땐 베옷 입고 지팡이 짚고 '아이고아이고' 하며 조문객을 받았는데
상여 메고 요령잡이도 있었고 참 슬펐는데
그 문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