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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이태진 교수께서는...
시중에 나돌던 아관파천때의 사진이...
일제의 기록사진 조사결과 덕수궁 돈덕전의 사진이지 아관파천때의 사진이 아니라 주장하셔서...
한동안 메스컴을 타신적이 있으셨네여...
허나, 전...
이태수 교수님의 주장도 뭔가 불완전 하심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게 밤새 검색결과 약간 포착되어 미진하나마 보고 드립니다.
기록사진 하나하나 마다 글을 첨가하려 했으나,,,자료가 너무많고 뒤죽박죽이라서...본글에 한꺼번에 정리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이태수 교수님게서 제기하신...
러시아 공사관 앞에서 대포를 드리대고 시위하는 일본군 사진은 잘못됀 해석이다...란 말씀은 얼추 맞는듯 합니다.
특히, 현재의 서울... 그 구 러시아대사관(???) 에선 절대 그런일이 없었을 겁니다.
밑의 기록사진엔...러시아공사관(?)이 전혀 다르게 생겼습니다.
현재의 덕수궁 돈덕전에서 대포 기증식 설명을 하는 사진이거나...시위대 진압후 고종퇴위를 압박하는 사진이랍니다.?
그러나,,,
이걸 근거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아관파천) 고종의 사진이 잘못됀 해석이란... 이어지는 여러분들의 해석들은 틀렸다 보입니다.
고종은 당시까지 황제였고...
퇴위당했을 시의 사진이라 하더라도...상왕이나 태상황이기에...평복을 입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보통의 백성들 두루마기와 갓을쓴 고종황제는...퇴위 전이든 후든...전혀 불필요한 복장였던 겁니다.
고종이 일반백성의 옷으로 갈아 입었어야 했을 경운...단 하나의 경우뿐일 겁니다.
아주 위급해...평복으로 위장했으나...이후, 얼마간 황제복은 못 입을 정도로 옷도 제대로 못 챙긴채로 어디론가 행차한 시기...
기록엔...고종이 아관파천할 당시...
궁녀의 가마를 순종과 나눠타고...러시아 공사관 문을 두두렸답니다.
러시아 경비병의 얘기론...당시 고종은 여인네의 장옷을 입었었답니다.
황제의 의관을 못 챙기고 러시아 공사관에 갔기에...평복차림의 고종이 찰영됐던 것이지...
그 이후...대한제국을 나름 당당히 선포하고 덕수궁(돈덕전?)에 있을 당시엔 그런 평민복은 상상도 못할 주책인 겁니다.
고종은...
환궁을 요구하던 친일파(개화파)애들의 대중선동 때문에...
차일 피일...덕수궁의 궁전이 보수돼면 가겠다 핑계를 대다 결국 그대로 환궁했다 하는데...
시기로 보면 그건 서울의 덕수궁 석조전 건축때입니다.
허나,
서울 덕수궁 석조전 건축당시엔...이미 돈덕전은 완성되어 있었던 사진들이 나옵니다.
그럼, 고종은 이미 완공되어 있던 돈덕전으로 가면 됐던 것이기에 핑계를 댈 게 없었던 겁니다.
서울 덕수궁의 돈덕전 사진을 보면...
덕수궁의 가장 뒷 모퉁이에 걸처 있는 구도입니다...과거의 기록사진에도 그렇고여...
아무리 다 망해가는 나라의 황제라지만...그래도 그때까진 공식적인 황제의 궁궐인데...
하필 미국 대사관 가는 길과 반이 씹힌 구텡이의 어정쩡한 건물을 택할 이유는 동양 풍수학상 없었을 겁니다.
밑의 돈덕전 사진을 보면...아예 미 대사관 가는 골목의 돈덕전이 반 씹혀있고,,,
그 골목으로 나있는 샛문도 틀림없이 존재했습니다.
이건 황제는커녕 일반 양반가의 저택도 택하지 않는 건물배치기에...
제 생각으론 저 돈덕전 건물은...미 대사관의 부속건물였었거나,,,그저 서울 덕수궁 원래 건물주인의 구탱이 별체 쯤의 건물였다 예상할 수 밖엔 없다 하겠습니다.
모든 상황은...
그 환궁을 하려던 궁전은 북경의 자금성일대란 추측을 낳게 하는 대목이며...
특히나...
현재의 정동 구 러시아공사관 기록사진 분석결관..
그 건물은...고종이 아관파천한 러시아를 대표하던 공사관이 아닌...
러시아 해군들의 본부로 예측이 됄 수 밖엔 없는 이유가...
기록사진에 나온 러시아 공사관(?) 건물 가장 높은 곳엔...1920년 전후 공산혁명 이후에나 러시아 깃발이 달리지...
그 전엔 러시아 해군기가 주 계양대에 계양되고...여러곳에 로시아깃발인 형태...
어떤 사진엔...오로지 러시아 해군기만 계양됀 사진...이 그를 유추하게 합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군기라면...삼군 통합기나...제정 러시아기를 달아야 하지...해군기만을 대표기를 내 걸순 없는 이치이니여...
고종을 대피시키려한 터널이란 것도...
일종의 군사적 이유로 만든 비밀통로로 보이는 건...
고종은 장옷을 뒤집어 쓰시고...궁녀의 가마로 탈출하셨지...
그 고생해서 파 놨단 터널이용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여...
이태수 교수님은...
고종의 아관파천 사진을 일본 기록을 조사한 결과...고종에게 대포를 기증하는 행사라 확신하신 듯한데...
아직 다 망한게 아닌 대한제국이요...그 황제의 거처에...대포의 포신방향을 정면으로 고정하고...
대포를 기증하려면 대포 주변에서 주절거려야 할 섬 원숭이들이 그 앞 정문에서 위협적 도열을 하고 있음은...
그 건물안의 사람들을 위협하잔 포진으로 보건데...
실제로 아관파천 당시에...러시아 공사관을 위협하던 사진이거나...
이후, 고종이 한반도 덕수궁에 왔을 당시에 고종을 협박하던 사진일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덕수궁 석조전은...영국의 하딩닌지 헤딩인지가 설계 건축했다는 설...
민황후 시해의 증인인...러시아 사바틴이란 설이 뒤죽박죽인데...
현재는 사바틴 설이 더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보건데...
사바틴은 러일전쟁 이후 하얼빈으로 대피했다가...이후 일본으로 북경으로 돌아 댕겼단 설을 가만하건데...
사바틴은 러일전쟁 이후로도...북경과 한반도의 주요 서양식 건물 건축때 맹 활약했을 확률이 많아지는 것이며...
자금성 근처에서 행했던 여러 서양(러시아식)건축물 설계도 그대로를...
조선을 한반도로만 축소시키려 합의한 러시아 일본의 거래에 입각한 서울을 경성(북경성)으로 위장하는 리모델링 공사의 설계자였을 확률이 많다 하겠습니다.
고로, 한반도 러시아 해군본부로 보이는...서울의 러시아 공사관 건물 말고...
북경의 러시아 공사관의 공사에도 가담했을 사바틴이...
서울에 리모델링 중이던 돈덕전 건축물에...자금성(?) 러시아 공사관 건물 설계도를 그대로 사용하는게 여러모로 가장 적절했을 상황이기에...
기록사진에서의 고종이 있던 러시아 공사관 건물과...
어정쩡한 위치에 낑겨 건축됐던 돈덕전 건물은...
원래는 북경(경성=킹성)과 서울(경도=킹기토)로...각기 다른 장소판박이일 가능성이 있을 수 있어 보입니다.
뻔이 프랑스의 기록삽화로도 나오는...
고종퇴위에 반발해 황제 즉위식을 거부한 순종황제 대신...섬 원숭이들이 환관을 대타로 앉히고 중화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치루던 사진...
서울 덕수궁 돈덕전 앞에서 즉위식을 했단 섬 원숭이들의 기록...
이 두 사진과 기록의 엄청난 모순을 참고하자면...
섬 원숭이들이 기록사진이라 드리미는 증거물들의 해석은...엄청난 왜곡이 지뢰같이 묻혀 있을 것이란 것이니...
열도 원숭이들의 아관파천 기록사진 설명을...곧이 곧대로 옮김은...본의아닌 역사왜곡에의 동참이 된다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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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밝혀진 역사현장] '아관파천' 사진은 덕수궁 돈덕전이었다 서울대 이진태 교수 발굴… 일군, 고종퇴위 강요 무력시위 모습 생생
1907년 日軍 덕수궁 난입, 환관 내세워 황제 양위식 ‘러시아 공사관 피신(1896년)모습’은 잘못 알려진것 입력 : 2005.03.21 18:27 39' / 수정 : 2005.03.22 10:04 33'
이 사진을 통해 그간 아관파천(1896년) 당시 고종이 평복에 갓을 쓰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을 때(사진 2) 일본군이 고종의 뒤를 쫓아 무력 시위하는 것(사진 3)으로 알려졌던 사진의 배경이 러시아공사관이 아니라 돈덕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시기도 1896년이 아니라 1907년 7월이며, 일제가 고종에게 황제 양위를 요구하며 궁궐 안마당까지 군사력을 동원, 무력 시위를 벌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 사진은 서울대 이태진(李泰鎭·근대사) 교수가 일본 가쿠쇼인(學習院)대학에 소장된 ‘한국사진첩’(1910년 통감부 발행)에서 발견, 21일 본지에 공개했다. 돈덕전은 1900년대 초반에 지은 서양식 건물로 덕수궁 석조전 뒤편 현 포덕문 북동쪽에 있었다.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1907년)했으며 1920년대 초반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사진에서 돈덕전이 확인됨에 따라 이 건물에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오얏꽃 무늬가 기둥과 난간에 새겨져 있는 것 등을 알 수 있게 됐다.
이태진 교수는 아관파천 때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 2, 3의 날짜를 1907년 7월 22일로 추정했다. 당시 일제는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1907년 6월)에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3인을 특사로 보내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을 호소하려 한 것을 빌미로 황제 퇴위를 강요했다. 7월 22일 새벽 덕수궁을 지키던 시위대 일부 병력이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이완용 등 친일 대신들이 이를 먼저 감지해 일본군 1개 대대가 시위대를 진압하고 돈덕전 앞에서 고종의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무력 시위를 벌였다.
당시 사건을 현장 취재했던 오사카 매일신문 나라사키(楢崎桂園)기자는 ‘한국정미정변사(韓國丁未政變史)’라는 책에서, 이날(7월 22일) 일제는 황제 양위에 응하지 않는 고종과 황태자(순종)를 대신해 환관 2명을 대역(代役)으로 내세워 황제 양위식을 치렀다고 기록했다. 대한제국 군대도 그해 8월 1일 해산됐다. 무장 해제된 대한제국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 무장 항쟁을 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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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과 인천> (1929)에 수록된 '러시아영사관'의 전경이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러시아공사관은 러시아영사관(나중에는 다시 쏘비에트연방 영사관)으로 바뀌었다. 사진 속에 깃빨이 펄럭이는 부분이 지금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러시아공사관' 3층탑이다. 나머지는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모두 파괴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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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의 준공에 관한 몇 가지 기록"
양제신건(洋製新建) <대한민보> 1910년 3월 9일자 덕수궁내(德壽宮內) 중화전(中和殿) 좌우행각(左右行閣)을 철훼(撤毁)하고 양제(洋製)로 신건축(新建築)하여 차(此)로 승녕부 관리(承寧府 官吏)의 사무실(事務室) 급(及) 지후관 유대소(祗候官 留待所)에 충용(充用)한다는 설(說)이 유(有)하다더라.
이사청 이접(理事廳 移接) <대한민보> 1910년 3월 9일자 평장문내(平章門內)에 재(在)한 승녕부 이사청(承寧府 理事廳)은 일간(日間) 포덕문내(布德門內) 전궁내부 관사(前宮內府 官舍)로 이접(移接)하기로 방금(方今) 수리중(修理中)이라더라.
석전준공기(石殿竣工期)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30일자 덕수궁내(德壽宮內)에 건축(建築)하는 석전(石殿)은 공역비(工役費)가 일백만원(一百萬圓)이오, 낙성기(落成期)가 내(內) 7월경(月頃)에 재(在)한다는데 차(此)는 황태자 전하(皇太子 殿下)의 어용실(御用室)로 경영(經營)함인데 현금간(現今間)은 덕수궁 폐현실(德壽宮 陛見室)로 인용(引用)한다더라.
석궁완공(石宮完工)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7일자 덕수궁내(德壽宮內) 양식석조궁전(洋式石造宮殿)은 근일(近日) 완료(完了)되었는데 해공비(該工費)는 구십삼만이천이백구십구 원(圓)이라더라.
건축필역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7일자 (국문판) 덕수궁안에 양제로 짓는 돌집은 근일에 필역되었는데 그 역비는 구십 삼만 이천 이백 구십 구 환이라더라.
석조궁전준공(石造宮殿竣工) <황성신문> 1910년 4월 7일자 향자(向者)에 아국(我國) 총세무사(總稅務司)로 재임(在任)한 백탁안씨(柏卓安氏)가 세관(稅關)에 비용(費用)으로 양식석조궁전(洋式石造宮殿)을 건축(建築)하기로 태황제폐하(太皇帝陛下)께 주청(奏請)하여 광무원년(光武元年, 즉 1897년)에 약 일백만원의 예산(豫算)으로 덕수궁내(德壽宮內)에 기공(起工)하였다가 씨(氏)가 해임 귀국(解任 歸國) 후에 탁지부(度支部)에서 인계 속공(引繼 續工)하여 13년만에 건축공사(建築工事) 급(及) 내수장식(內修裝飾)의 일절(一切)을 필료(畢了)하였는데 해공사비(該工事費)는 건축비(建築費) 오십육만 팔천 일백 육십오 원, 장식비(裝飾費) 십이만 오천원, 실내품(室內品) 십만 원, 기관부(機關部) 오만 오천 원, 잡비(雜費) 십삼만 오천 원, 합계(合計) 구십만 일천 이백 구십구 원이오 지적(地積)은 오백오십오 평(坪)이며 실수(室數)는 칠십인데 기내(其內)에 칠백 전등(電燈)을 점(點)하게 장치(裝置)하였다더라.
일관배관(日官拜觀) <황성신문> 1910년 4월 8일자 덕수궁 돈덕전내(德壽宮 惇德殿內)에 양제 석조궁전(洋製 石造宮殿)은 건축의 공사가 근일(近日)에 준공(竣工)되었는데 궁내부 차관(宮內府 次官) 코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 급(及) 통감부(統監府) 이시츠카 장관(石塚 長官) 제씨(諸氏)가 재작일(再昨日) 상오 9시에 우궁전(右宮殿)을 배관(拜觀)하였다더라.
낙성후만찬(落成後晩餐) <황성신문> 1910년 4월 22일자 백만원(百萬圓)의 거액(巨額)을 투(投)하여 건축(建築)하던 덕수궁내(德壽宮內)의 석조양식궁전(洋式石造宮殿)의 낙성(落成)됨은 기보(旣報)하였거니와 민궁상(閔宮相)은 칙령(勅令)을 의(依)하여 본일(本日) 오후 5시반에 이시츠카 장관(石塚 長官) 이하 참여관(參與官) 수인(數人)과 영국총영사(英國總領事) 급(及) 공사담임(工事擔任)한 외국인(外國人)을 초대(招待)하고 만찬회(晩餐會)를 개(開)한다더라.
화월루 연회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22일자 (국문판) 궁내부대신 민병석씨는 궁전건축에 관계있는 서양인 뿌라운씨의 대리 라베루씨를 본일 화월루로 청하여 연회한다더라.
석조전준공기(石造殿竣工期) <매일신보> 1910년 12월 3일자 동양유일(東洋唯一)의 건축(建築)이라 칭(稱)하는 덕수궁내(德守宮內) 석조전(石造殿)은 거금(距今) 12년전에 당시(當時) 총세무사(總稅務司) 백탁안씨(柏卓安氏)가 삼백만원(三百萬圓)의 예산(豫算)으로써 설계(設計)한 터인데 일본(日本)으로부터 소천기사(小川技師)를 초빙(招聘)하여 위선(爲先) 창의문(彰義門) 부근(附近)의 화강석재(花崗石材)를 채(採)하여 34년(즉 1901년) 추(秋)에 석초(石礎)를 종(終)하고 미기(未幾)에 정변(政變)이 기(起)하매 35, 6년(즉 1902, 3년) 양년간(兩年間)을 부득이(不得已) 휴공(休工)하였다가 갱(更)히 36년(즉 1903년) 9월부터 기공(起工)하여 동대문(東大門) 영풍정(暎風亭) 부근(附近)의 화강석(花崗石)을 채(採)하여 이층(二層) 급(及) 삼층(三層)의 건축(建築)에 용(用)하다가 39년(즉 1906년)에 지(至)하여 백탁안씨(柏卓安氏)가 해임 귀국(解任 歸國)하매 데비손씨(氏)가 백씨(柏氏)를 대(代)하여 전일(前日)의 설계(設計)대로 해공사(該工事)를 계속 진행(繼續 進行)하더니 40년(즉 1907년) 6월에 지(至)하여 약약준성(略略竣成)하고 이래(爾來)로는 연측 기타 옥상(椽側 其他 屋上)의 장식(裝飾) 등에 무장축파(武藏筑波)의 석재(石材)를 운래(運來)하여 공사(工事)를 진행(進行)한 결과(結果)로 현금(現今)에는 여관 급 종자(女官 及 從者)의 옥실(屋室)에 충(充)할 지하실(地下室)을 제(除)한 외(外)에는 태(殆)히 준공(竣工)되었는데 총평수(總坪數)가 사백평(四百坪), 고(高)가 칠칸반(七間半), 횡(橫)이 이십오칸(二十五間)되는 굉대(宏大)한 석조전당(石造殿堂)이라. 기(其) 석전내(石殿內)에는 접견실(接見室), 침실(寢室)과 이태왕(李太王) 급(及) 엄비(嚴妃) 양전하(兩殿下)의 거실(居室)과 기타(其他) 담화실(談話室), 목욕실(沐浴室) 등이 무루완비(無漏完備)한지라. 과일(過日) 이왕 전하(李王 殿下)께서 덕수궁(德壽宮)에 문안(問安)하실 시(時)에 동(同) 석전식당(石殿食堂)에서 이태왕 전하(李太王 殿下)와 오찬(午餐)을 공어(共御)하샤 동(同) 신축(新築)의 화려(華麗)한 전당(殿堂)을 어람(御覽)하실 터이더니 적(適)히 이태왕 전하(李太王 殿下)의 불예(不豫)하심을 인(因)하여 중지(中止)하셨고 엄비 전하(嚴妃 殿下)만 참열(參列)하셨다는데 접견실(接見室) 등의 장식(裝飾)이 찬란(燦爛)함은 이무가론(已無可論)이어니와 잔부공사(殘部工事)의 예산잔여(豫算殘餘)가 근(僅)히 삼만원(三萬圓)에 불과(不過)한 즉 기(其) 준공(竣工)도 또한 불원간(不遠間)에 재(在)하리라더라.
덕수궁대정원(德壽宮大庭園), 총공비 오만원(總工費 五萬圓) <매일신보> 1911년 2월 28일자 낭자(낭者) 덕수궁(德壽宮)에서는 일백만원(一百萬圓)을 투(投)하여 광대(廣大)한 양식석전(洋式石殿)을 건축(建築)하였는데 금회(今回) 동전전(同殿前)에 대정원(大庭園)을 작(作)하기 위(爲)하여 전이사실(前理事室), 평성문(平成門), 전위병소(前衛兵所)를 훼철(毁撤)하기로 작일(昨日) 정오(正午)에 입찰(入札)을 종(終)하였는데 차(此) 대정원(大庭園)은 데빗더완씨(씨)의 설계로 성(成)한 자(者)인데 총(總)히 외국식을 용(用)하여 분수지(噴水池), 수목(水木)의 배열(排列) 급(及) 정내(庭內)를 통(通)하는 도로(道路) 등은 외국대정원(外國大庭園)을 모방(模倣)할 계획(計劃)이오, 차(此) 비용(費用)은 총액(總額) 오만원(五萬圓)을 요(要)하리라더라.
대정원(大庭園)과 월랑훼철(越廊毁撤) <매일신보> 1911년 3월 18일자 덕수궁내(德壽宮內)에 일대정원(一大庭園)을 설치(設置)하기로 계획(計劃)하였다 함은 이보(已報)한 바어니와 신축(新築)한 석전 부근(石殿 附近)의 월랑(越廊)을 목하(目下) 훼철(毁撤)하는 중(中)이라더라.
(정리 : 2005.11.16,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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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2] 위의 사진에서 오른쪽으로 연속되는 풍경으로 그려보면 된다. 왼쪽 아래에는 덕수궁 석조전의 지붕이 보인다. 그 앞에 널찍한 공터에는 머지않아 '이왕가미술관'이 들어서게 된다. 다시 덕수궁 건너편에는 '일(日)'자형의 큰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것이 '경성재판소'이며, 나중에 대법원 건물로 전환된다. 지금은 전면부만 남겨두고 완전히 개조되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중간부분에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그 앞에 널찍한 광장처럼 보이는 곳이 '남대문'이다. 그리고 남산의 중턱에는 이미 '조선신궁'이 들어선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산 아래로 잔잔하게 보이는 주택가는 지금의 회현동, 남창동 일대에 해당한다. 남산 허리에는 남산동 방면으로 도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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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고종황제 즉위식 축하행렬
[1897] 대안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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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즉위식
대한제국 시절 일제가 대리인을 내세워 열었던 순종황제 즉위식 모습을 생생히 담은 그림이
발견돼 11일 공개됐다. 1907년 7월 20일 서울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중화전에서 열렸던 순
종황제의 즉위식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7
년 8월 4일자 표지에 실렸던 것. 순종황제가 아버지인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데 항의해
불참하자 일제가 대리인을 앉혀 놓고 즉위식을 열었음을 그림 속 황제 자리에 앉은 녹색 복
장의 환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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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종황제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어떻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
덕수궁과 러시아 공사관 사이의 지하에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폭 45cm, 길이 20.3cm의 비밀 통로로 이어져 있는데,
궁여지책으로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옮겨가는 것을 생각해낼 만큼 당시의 상황이 다급했던 이유였다.
<구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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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신문 기사를 보면 "정부는 러시아측에 서울 정동 구러시아 공사관 부지(약6천2백평)수용 보상금으로 2백30억원을 제공키로 러시아측과 최종 합의했다."고 합니다. ▷ 구 러시아 공사관의 옛 사진들은 인터넷을 검색하여 신문에 게재된 사진들을 가져 왔습니다. 100년 전의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대비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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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해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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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대한문(大漢門)
경운궁(덕수궁) 대한문 앞 노무현 전(前) 대통령 분향소를
에워싸던 경찰버스가 어제 (5/26) 오후 물러간 모양이다.
애초에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각설(却說)하고…
어느 신문을 보니 대한문 앞은 조선시대부터 백성들이
억울한 일 있으면 모여드는 장소였다 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구한말이라면 모를까 조선시대에는 대한문 앞에 모여들 수가 없었다.
사진: 수선전도 중 경운궁(덕수궁) 대한문 일대
사진 아래 중앙에 경복궁이 있고, 그 앞은 육조(六曹)거리-오늘 날 세종로다.
육조거리는 지금 교보문고 앞에서 운종가(雲從街)와 직각으로 만난다.
운종가(雲從街) 곧 종로는 동쪽 흥인문(동대문)에서 서쪽 경희궁을 거쳐
돈의문(서대문)을 관통하는 동서간 중심도로다.
지금은 경복궁 앞에서 교보-시청을 거쳐 숭례문까지 드넓은 태평로가
뚫려 있지만, 위 수선전도에는 육조거리는 운종가와 만나면서 끝날 뿐,
그 너머 황토재 지금 조선/동아일보 앞 이후부터는 길이 없다.
조선 시대 도성으로 들어 오는 중심도로는 숭례문에서 지금 한국은행,
명동, 을지로 입구, 광교를 거쳐 종각 앞으로 오는 길이었고
거기서 동서 축인 운종가와 만나는 것이었다.
도성의 중심은 오늘 날 세종로가 아니라 종루(鐘樓, 보신각=종각)였다.
그러니 숭례문 쪽에서도, 육조거리에서도 길이 없는
경운궁 앞으로 백성들이 모여들 까닭이 없었다.
경운궁 앞에 백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고종황제가 경운궁(慶運宮)에 임어(臨御)하기 시작한
19세기 말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정동(貞洞)-정릉동(貞陵洞)
덕수궁 일대 정동의 원래 이름은 정릉동이었으니,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정릉(貞陵)을 처음 이 곳에 썼기 때문이다.
태조 사후 태종 방원은 신덕왕후 능을 현재 정릉으로 옮겨버린다.
태종이 계모와 사이가 좋지 않기도 했지만 태조의 처사가 원래 무리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후처라도 능을 도성 안 그것도 중심부에 쓴다는 것은
우리 동양인의 감각으로는 몰상식한 짓이었다.
경운궁(慶運宮)
경운궁 자리는 성종(成宗)의 형님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 때 도성의 궁전이 모조리 불타자 피란에서 돌아 온
선조 임금이 들어가 행궁으로 삼다가 승하한다.
(임금의 임시거처는 행궁(行宮)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임금은 선왕(先王)이 돌아 간 곳에서 즉위하는 것이고
그 아니라도 달리 궁궐도 없으니 광해군은 이 행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왕위에 오른다.
사진: 즉조당
광해군은 창덕궁을 수리하여 이어하고,
이 행궁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한다.
인조반정은 성공하지만 왕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우는 정통성을
어디서 찾느냐는 것이 골치 아픈 문제가 되는 데
왕조의 속성상 인목대비의 자교(慈敎)에서 구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조는 행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 와 사정을 하고
이어 광해가 즉위했던 같은 장소 즉조당(卽祚堂)에서 등극하였다.
그 후 이 행궁은 거의 버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895년 을미년에 일본 놈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죽여 버리는 일이 일어난다(을미왜변(乙未倭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정동에 있던 아라사(러시아) 공사관
곧 아관(俄館)으로 몸을 피한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아관(俄館)에서 나온 뒤에도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외국 공관이 많은
정동 경운궁(慶運宮)으로 들어가고 그 뒤부터 경운궁 앞으로 방사형 도로를
내어 개발하니 이 일대가 도성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대한문이 백성이 모여든 장소라는 소리는 고종황제가 경운궁에
임어하기 시작하는19세기 말 이후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
덕수궁(德壽宮)
고종황제가 퇴위하자 순종은 창덕궁으로 들어가고
고종에게 덕수궁(德壽宮)이라는 존호를 지어 올린다.
따라서 덕수궁은 궁궐이름이 아니라 고종황제의 칭호니
경운궁이 옳으나 지금 대부분 덕수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화문(仁化門)
경복궁의 광화문(광화문), 창덕궁은 돈화문(光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은 흥화문(興化門)이
각각 정문으로 모두 화(化)짜 돌림이다.
그런데 왜 경운궁만 대한문일까?
경운궁에도 남쪽으로 인화문(仁化門)이라는 문이 있었으니
이것이 정문이었다.
사진: 위는 구한말 사진인데 중앙 모퉁이에 대한문이 있고
그 왼쪽으로 한참 가다 문이 있으니 옛날 인화문이다.
대한문에서 옛 대법원을 마주 보는 쪽으로 100 여 미터 간 곳일 것이다.
사진: 인화문 현판
대한문(大漢門)
정문을 인화문이라고 정해 놓았지만 이 일대의 지형을 보면
결국 대한문 쪽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대안문(大安門)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다.
사진: 현판에 대안문(大安門) 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안(安) 글자를 보면 갓머리 밑에 계집 녀(女)가 있는데
이 때문에 배정자에게 데인 고종황제가 대한문으로 바꾸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야말로 속설일 뿐 별 근거는 없다고 하겠다.
또한 대한문(大漢門)의 한(漢)도 일본에서 용법은 불량배를 일컫는 것으로
왜놈들이 고종황제를 멸시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이 있으나 논(論) 할 가치 조차 없다.
사진: 1960년 대 한 때 대한문이 경운궁과 떨어진 적이 있었다.
대한문 앞 사진으로 유명한 것은 고종황제 인산(因山-장례식)장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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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정메뉴엔 글이 분명 수정됐는데...확인을 하면 안 돼 있고...?....너무 피곤해...내일 마자 쓰겠습니다...ㅡ. .ㅡ.......................................................다음 날 아침 지나고.....................................이제야 글 수정 완료됐습니다...보신 분들이라도...다시 한 번 보기길 권장합니다.
우와! 수고하셨습니다.
격려의 함성 영광입니다...최두환 선생님...^. .^...제가 지식은 턱없이 부족해도...눈설미는 좀 있단 지적들을 자주 듣는 편이긴 합니다...ㅡ. .ㅡ
러시아 와 일본은 고종을 모시려고 경쟁했습니다 고종을 모시는 자에게 권력이 돌아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약소국 한반도의 고종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 테고 강대국 대륙조선 이라면 러시아 와 일본의 검은 친절에 시달리지 않았을 겁니다
대안문을 왜 대한으로 바꾸었을까요 ? 자세히 봤는데 틀림없이 동일한 문입니다 그런데 1897년 고종즉위식 사진은 즉위식광경이 아니라 초상집 광경이군요
그리고 위에 나오는 지도에는 경운궁 이라는 한문이 없구요/ 숭례문이 아니라 한문으로 숭조문 이라 쓰여 있습니다 숭조문이 남대문이라면 경복궁과 직선상에 있는것이 한반도 입니다 그리고 이 지도에 있는 경복궁은 그 전면으로 도로가 없군요 한반도 라면 세종로가 있습니다 / 그리고 대안문과 대한문이 한반도 서울에 있는 대한문과 산형태 가 다릅니다 한반도 대한문은 그 안쪽으로 산이 없습니다
1910년 매일신문 (마이니찌)이 보도한 덕수궁 석조전 기사에 나온 - 1902년과 03년 양년에 걸쳐 일어난 정변으로 공사가 중단 되었다 - 는데 그 정변은 무슨 정변인지 궁금하군요 들어 보지 못한 정변 같습니다
제생각으론...위 고지도상의 위치로 보면...경복궁이란 표시의 지점은...현 청와대 같습니다....구한말의 서울 사진을 보건데...남대문로에서 한참 좌측으로 경복궁이 존재하고...현재상으로도 남대문로에서 경운궁(덕수궁)쪽 길을 택해야 광화문에 이름을 보건데...위 고지도상의 남대문 대로는...현재의 대로가 아니라...남대문에서 명동으로 빠지는 길일 겁니다...옛날엔 그 길이 주 도로였었기에...근대까지도 명동이 유명했던 것이겠고여...남대문에서 명동길로 가야...위 고지도상의 대로 삼각형 로타리인 현재의 보신각과 만날수 있으니 그를 더 유추하기 충분합니다.
근대의 기록을 보면...경복궁 광화문은...원래의 경복궁 정문자리에서 동편으로 옮겨졌단 기록이 그를 더 뒷받침합니다...고로 위 고지도상의 육조거리도...현재의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쪽으로 조금 치우친 음식점들 골목으로 보이며...그래 그 자리들이 장사가 잘 돼는듯 싶습니다...ㅡ. .ㅡ.
현재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위 고지도상의 육조거리와 종로가 만나는 자리가 아닌...그 동쪽 큰 길..즉,운종가(종로)라 파란 글씨로 된 부분과 서대문로가 만나는 길의 사각형일지 싶습니다...경운궁쪽에서...육조거리라 표기된 길의 서쪽으로 휘어지는 ㄱ"자 대로는...현재 집회때면 뒷풀이 장소로 많이 쓰이는 유명한 술집들 길입니다...이순신동상에서 남대문으로 우회전하는 그 서남쪽 편 빙딜(동아 면세점이라나?) 그 건물 뒷편 술집들 골목길입니다...현재는 자그만 도로지만...그 당시는 그게 대로였지 싶습니다...그래 유서가 깊은 자리기에...항상 장사가 잘 됐나 봅니다.
그리고 대한문이 있단 그 자리여...위 고지도상엔 아무 궁궐표시도 없습니다...근세에나 급조된 리모델링된 궁궐이 현재의 덕수궁이란 추측을 낳게하는 대목입니다...그 앞의 기록사진상 나오는 광장도 없었더군여...구한말에 원래 있던 어느 왕족이나 세도가의 사택이나 절터를 리모델링한게...현재의 덕수궁터 아닐지란 의심을 해 봅니다.
실상 보더라도...황제 아닌 지방 수령의 건물배치라 하여도...주 대문을 거치면서 주요 건물들이 후문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며...그 주변으로 사택들이 있는게 왕궁의 기본중 기본인데...
현재의 덕수궁은...중화전 외엔...석조전이 서쪽 옆에 낑겨있고 ..특히.황제 즉위식을 했단 돈덕전자리가 완전 서쪽 구탱이요..미 대사관 가는 골목길이 앞이 반쯤 씹혀있는 엉성한 구도임을 보건데...본시 황제의 궁은 커녕...유서깊은 왕궁터도 아니였을 것이란 의혹을 자아 냅니다.
옛 서울의 고지도나 기록사진을 보건데...원래의 서울(경도=고려=패망 금나라 수도?)의 중심은 경복궁과 현 청와대자리가 아니요...파고다공원 자리나 창경궁 자리라 예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