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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재언시이불견(心不在焉 視而不見)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일을 행하여도 참된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말이다.
心:마음 심(心/0)
不:아닐 부(一/3)
在:있을 재(土/3)
焉:어조사 언(灬/7)
視:볼 시(見/5)
而:말이을 이(而/0)
不:아닐 불(一/3)
見:볼 견(見/0)
출전 : 대학(大學)의 정심장(正心章)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일을 행(行)하여도 참된 성과(成果)를 거둘 수 없다는 말이다. 대학(大學)의 정심장(正心章) 편에 실려 있는 말이다. 전체의 문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所謂修身在正其心者,
이른바 수신(修身)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는 이유는
身有所忿則不得其正,
몸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有所恐懼則不得其正,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有所好樂則不得其正,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有所憂患則不得其正.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心不在焉,
마음에 있지 않으면
視而不見,
보아도 보이지 않고,
聽而不聞,
들어도 들리지 않고,
食而不知其味.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此謂修身在正其心.
이것을 일러 수신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심부재언(心不在焉)이란 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무엇을 보더라도 건성으로 보게 되어 그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무엇을 듣더라도 그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무엇을 먹더라도 그 참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논어(論語)의 술이(述而) 편에 "공자께서 제나라에서 소(韶) 음악을 듣고 3개월 동안이나 고기 맛을 모르고 밥을 먹었다(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는 음악에 심취하여 먹어도 그 맛을 모르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유래하여 '심부재언(心不在焉) 시이불견(視而不見)'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제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심부재언(心不在焉)은 '마음이 여기에 없다'는 뜻으로, 마음이 딴 곳에 있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관심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 모습을 나타낼 때 쓰인다.
이와 유사하게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어수선하다는 뜻의 사자성어로는 만불경심(漫不經心), 심원의마(心猿意馬), 심번의란(心煩意亂), 심신부정(心神不定), 시이불견(視而不見)이 있다.
이와 반대로 정신을 한곳에 집중한다는 뜻의 사자성어로는 전신관주(全神貫注), 전심일지(專心一志), 일심일의(一心一意), 심무방무(心無旁騖), 병기응신(屏氣凝神), 심무이용(心無二用), 명명지지(冥冥之志), 전심지치(專心致志), 취정회신(聚精會神), 용지불분(用志不分)이 있다.
심부재언(心不在焉)의 출전은 대학(大學) 정심수기(正心修己) 편이다. 원문을 다시보면 '몸을 닦는 것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은 몸에 분노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 몸을 닦는 것이 마음을 바르게 함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所謂修身 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 在正其心)' 라는 문장에서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음을 뜻하는 '심부재언(心不在焉)'과 '시이불견(視而不見)'이 유래되었다.
참고로 심원의마(心猿意馬)는 '마음은 원숭이 같고 생각은 말과 같다'는 뜻으로, 원숭이나 말이 날뛰듯이 마음이 들뜬 것을 의미한다.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이 딴 곳에 가 있어 산만한 모습을 나타낼 때 쓰인다. 불교에서는 번뇌와 정욕 때문에 마음이 잠시도 고요하지 못하고 언제나 어지러운 것을 이른다. '심원(心猿)' 또는 '의마심원(意馬心猿)'이라고도 한다.
심원의마의 출전은 중국 후한(後漢) 시대 도교 사상가인 위백양(魏伯陽)의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이다. '마음은 원숭이처럼 날뛰어 안정되지 못하고, 생각은 말처럼 사방을 뛰어다녀 정신의 기운이 외부의 일 때문에 산란되어 있다(心猿不定 意馬四馳 神氣散亂於外)'라는 문장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중국 명(明)나라 때의 유학자인 왕양명(王陽明)도 전습록(傳習錄)에서 공부에 대해 논하면서 '사람을 가르쳐 배우게 할 때는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되니, 처음 공부할 때는 마음은 원숭이 같고 생각은 말과 같아서 한자리에 묶어 두려고 해도 머물러 있지 못한다(敎人爲學 不可執一偏 初學時 心猿意馬 拴縛不定)' 라고 심원의마를 사용한 바가 있다.
심번의란(心煩意亂)은 '마음이 번잡하고 생각이 어지럽다'는 뜻으로,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불안한 것을 나타낸다. 애가 타서 마음이 조마조마하거나, 정신이 어수선하며 뒤숭숭한 것을 비유할 때 쓰인다.
심번의란(心煩意亂),의 출전은 초사(楚辭) 복거(卜居)이다. '복거'는 중국 초나라 때의 정치인이었던 굴원(屈原)이 지은 글로, 왕의 신임을 얻어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나 정적들의 모함으로 유배를 당하게 된 후에 지은 것이다.
쫓겨난 지 3년이 지났는데 왕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지혜와 충성을 다해도 정적들의 참소에 덮이고 막혀버렸다. 마음이 번잡하고 생각이 어지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屈原既放三年 不得復見 竭智盡忠 蔽鄣於讒 心煩意亂 不知所從)는 문장에서 심번의란(心煩意亂)이 유래되었다.
이후 굴원은 태복(太卜: 점치는 일을 맡은 관직) 정첨윤(鄭詹尹)을 찾아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물었다. 이에 정첨윤은 "무릇 한 자의 길이도 짧을 때가 있고, 한 치의 길이도 길 때가 있으며, 사물에도 부족할 때가 있고 지혜도 밝지 못할 때가 있으며, 운수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고 신령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당신의 마음으로 당신의 뜻을 행하면 되니 점을 쳐서 세상일을 다 알 수는 없다(夫尺有所短 寸有所長 物有所不足 智有所不明 數有所不逮 神有所不通 用君之心 行君之意 龜策誠不能知此事)"라고 답했다. 여기서 저마다의 장점이 있다는 뜻의 사자성어인 '척단촌장(尺短寸長)'이 유래되었다.
남의 일도 내 일처럼 해라
심부름해도 기분 좋을 때가 있다. 군에서 휴가 나온 날 아버지가 시골 큰댁에 계시는 할머니께 꿀에 잰 인삼을 갖다 드리라고 심부름시켰다. 군에 입대한 뒤로는 처음 가는 길이어서 기분 좋았다. 할머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세 분께 인사드리자 여느 때와 달리 더욱 반가워하셨다. 군대에서 잘 지낸다는 얘기를 영웅담처럼 밤이 이슥하도록 혼자 떠들었다.
집에 돌아와 잘 다녀왔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끊임없이 이것 저것을 물었다. "할머니 건강은 어떠시더냐? 식사는 잘하시더냐. 음식 씹는 건 어떠시냐. 몇 번 만에 삼키시더냐. 가져간 인삼은 드셨냐. 뭐라 하시더냐. 걷는 거는 어떠시냐. 잠은 잘 주무시더냐. 중간에 몇 번이나 깨시더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모두 건강하시냐?" 쏟아지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한 건 한마디도 없었다.
묻는 말에 답을 제대로 못 하자 질문을 멈춘 아버지는 '한심한 놈'이라며 역정을 냈다. "심부름하려면 시킨 사람이 간 것처럼 일해야 한다"며 "심부름을 핑계 삼아 네 할 일을 하고 다닌 거다"라고 질타했다. 사람이 살면서 내 사업을 하지 않는 한 하는 일의 대부분은 남의 일을 맡아 한다. 너처럼 일한 거라면 평균점 이하라고 평가하며 "남의 일도 내 일처럼 하라"고 주문했다.
아버지는 남의 일이라도 내 일처럼 해야 하는 이유로 다양한 관점을 습득할 좋은 기회라는 점을 가장 먼저 들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더 넓은 시야로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물건을 탈 없이 전달한 것만으로는 높은 점수 따기 어렵다. 게다가 심부름 빌미잡아 네 생색내기에 바빴던 건 큰 감점 요인이다" 라면서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며 책임감을 키우고, 일을 완수했을 때 성취감을 느끼고 자존감 향상에도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게 두 번째 이유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문제 해결 능력과 협업능력 등을 향상할 좋은 기회가 세 번째 이유라고 강조하면서 "남의 일이긴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네가 한 일로 알고 그걸로 평가할 텐데 소홀히 한 점은 큰 불찰이다"라고 강하게 꾸짖었다.
아버지는 "전달해야 할 물건이 무엇인지, 왜 전달해야 하는지 등을 파악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중 무엇보다 심부름시킨 사람의 의중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전달할 메시지는 없는지, 뭘 알아와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겠으면 직접 물어봤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만약 그런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업무를 지시한 사람이 궁금해할 사항에 대해 충분히 공감해 면밀하게 살펴봤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러자면 맡은 일을 내 일처럼 여기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면서 고사성어를 인용했다.
그날 오랜만에 들은 성어가 '심부재언시이불견(心不在焉 視而不見)'이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일을 행하여도 참된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뜻이다.
대학(大學)의 정심장(正心章)편에 실려 있다. "이른바 수신(修身)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는 이유는 몸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이것을 일러 수신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마음에 있으면 한식에도 세배를 간다"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제대로 성과를 거둘 수 없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자면 남의 일을 내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렇게 마음먹는 일은 공감력에서 나온다"며 애써 키워나가기를 당부했다.
공감력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공감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폭넓은 이해심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날 이후 남의 일을 대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쉽게 얻어질 성품은 아니지만, 그 또한 손주들에게도 물려줄 소중한 인성이다.
마음으로 보는 법
미국 LA에 살고 있는 청년이 학비를 벌기 위해 여행 가이드를 했다. 어느 날 그는 시각장애인들로 구성된 단체 여행객들의 안내를 맡게 되었다. 청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여행단장이 말했다. "절대로 우리를 장님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보통사람들에게 하듯이 안내해 주십시오."
이윽고 버스가 출발했다. 청년은 여행객들에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평소처럼 안내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보이는 저 푸른 바다는 태평양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저 산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할리우드입니다. 언덕위에 쓰인 영어 간판이 보이시죠? 할리우드, 그렇습니다. 저곳은 저 유명한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영화의 본고장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청년의 안내에 따라 차창의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끄덕였다. 자기들끼리 손가락질을 하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청년은 시각장애인들이 일부러 장님 흉내를 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은 분명히 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일주일의 여행기간이 끝나자 시각장애인들은 청년에게 다가와 악수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정말 좋은 관광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작가 최인호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일화이다.
사물을 보려면 눈이 필요하다. 하지만 눈은 물체의 상이 통과하는 렌즈일 뿐이고, 사실 물체를 보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딴 데 있으면 눈으로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는 '심부재언 시이불견(心不在焉 視而不見)'이라는 구절이 있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를 것이다.
우리가 관심(關心)을 두지 않으면 사물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관심은 어떤 것에 마음을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준비 단계이다. 그런데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거기서 한 발 나아가 '마음으로 보는' 관심(觀心)의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
부처가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고는 제자 아난다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부처께서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쥔 모습을 봅니다." "무엇으로 보느냐?"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난다야, 눈은 다만 대상을 비출 뿐이고, 보는 것은 마음이니라." 진짜 세상을 보려면 바깥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에서 강조한 것도 눈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마음으로 보는 법을 알려준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동화작가 정채봉은 '오늘 내가 나 자신을 슬프게 한 일들이 뭐가 있을까' 하고 돌아봤더니 이런 게 떠올랐다고 했다.
꽃밭을 그냥 지나쳐 버린 일.
새소리에 무심하게 응대하지 않은 일.
밤하늘의 별들을 세지 못한 일.
정채봉이 세 가지를 꼽았지만 우리들이 지나치는 일상의 풍경은 얼마나 많을까.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가을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늘의 조각 구름, 황금빛 저녁놀, 푸르스름한 산 기운... 영혼을 파고드는 눈앞의 풍광에 무덤덤하다면 우리는 눈뜬 장님일 것이다. 새의 노랫소리에 아무 감흥이 없다면 영락없는 귀머거리일 것이다.
요즈음 세태와 심불재언 시이불견(心不在焉 視而不見)
요즈음 세상사를 볼랍시면 정신이 어지럽다. 웬만한 쇼킹한 뉴스는 이제 귀에도 안들어 올 지경이다. 그 큰 세월호 여객선이 침몰하여 수백명의 고귀한 생명이 수장되었다. 그 엄청난 재해에 선장은 저만 살겠다고 팬티바람에 먼저 배를 버리고 탈출하였다.
종교를 미끼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고 그들의 헌금을 착취하여 천벌을 받을 부귀영화를 누리다 허무하게 죽어간 사건, 툭하면 군대에서 갖은 폭력으로 자살하는 사건들, 왜 이렇게 사회가 어지럽게 돌아가는지 한숨만 나온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시대이나 정신적 가치관의 혼돈과 도덕성 결핍시대에 순수한 인간성 본질이 망각된 시대인가 보다.
모든 국민이 무표정하고 아니면 약간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무거운 머리를 땅바닥만 향한 채 무거운 어깨를 축 늘어 트리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 그나마 교황이 방한하여 낮고 어둡고 소외된 곳을 향한 밝고 환한 미소와 손길로 잠시나마 국민들이 미소를 되찾은 것은 다행이라고 본다.
왜 이런 시회현상이 치유되지 않고 날이 갈수록 심각해 질까? 교육자인 나의 입장에서 볼 땐 다 인성교육이 어려서 가정에서 잘못되었고, 다음은 학력위주의 학교교육이 잘못되었고, 방관만 한 어른들의 죄가 크며, 이것을 바로 잡으려하지 않는 사회풍조가 큰 문제이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적다는 것이고, 자기는 하얗고 남들은 검다고 하는 흑백논리가 판치는 소통부재의 인간관계가 문제이다.
심불재언(心不在焉)이면
시이불견(視而不見)하며
청이불문(聽而不聞)하며
식이불지기미(食而不知其味)니라.
대학 제7장 정심수신(正心修身)에 나오는 말이다.
뜻은 "바른 마음이 되어 있지 않으면 사물을 보아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며 말을 들어도 제대로 들리지 않으며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간단히 애기하면 "바른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라" 이런 뜻인데 참으로 간단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말이다. 누구나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일을 대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 대한 바른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고 단지 지식으로 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의 사귐에 있어서도 올바른 마음을 가지면 '義'가 생기고, 공부함에 있어 올바른 마음을 가지면 '道'가 트이고, 선한 학문으로 이용된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것을 행한다면 사람들에게 선하게 되고 더 나아가 사회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마음은 모든 것의 시초와 근본이 된다. 즉 다시 풀이 하면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은 몸에 분해하는 바가 있으면 그 마음을 얻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마음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가 실생활을 통하여 체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굴 탓하기 전에 자기를 돌아보고 처절한 반성과 함께 내 가정에서부터 출발하여 이웃과 내 지역사회, 더 나아가 우리나라를 즐겁고 행복하며 안전한 나라로 만드는 일에 다 함께 발 벗고 나서야 한다.
▶️ 心(마음 심)은 ❶상형문자로 忄(심)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의 심장의 모양, 마음, 물건의 중심의, 뜻으로 옛날 사람은 심장이 몸의 한가운데 있고 사물을 생각하는 곳으로 알았다. 말로서도 心(심)은 身(신; 몸)이나 神(신; 정신)과 관계가 깊다. 부수로 쓸 때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로 쓰이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心자는 '마음'이나 '생각', '심장', '중앙'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心자는 사람이나 동물의 심장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心자를 보면 심장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심장은 신체의 중앙에 있으므로 心자는 '중심'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감정과 관련된 기능은 머리가 아닌 심장이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心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마음이나 감정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心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위치에 따라 忄자나 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心(심)은 (1)종기(腫氣) 구멍이나 수술한 구멍에 집어넣는 약을 바른 종이나 가제 조각 (2)나무 줄기 한 복판에 있는 연한 부분 (3)무, 배추 따위의 뿌리 속에 박인 질긴 부분 (4)양복(洋服)의 어깨나 깃 따위를 빳빳하게 하려고 받쳐 놓는 헝겊(천) (5)초의 심지 (6)팥죽에 섞인 새알심 (7)촉심(燭心) (8)심성(心星) (9)연필 따위의 한복판에 들어 있는 빛깔을 내는 부분 (10)어떤 명사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마음, 뜻, 의지(意志) ②생각 ③염통, 심장(心臟) ④가슴 ⑤근본(根本), 본성(本性) ⑥가운데, 중앙(中央), 중심(中心) ⑦도(道)의 본원(本源) ⑧꽃술, 꽃수염 ⑨별자리의 이름 ⑩진수(眞修: 보살이 행하는 관법(觀法) 수행) ⑪고갱이, 알맹이 ⑫생각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물건 물(物), 몸 신(身), 몸 체(體)이다. 용례로는 마음과 몸을 심신(心身),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심리(心理), 마음에 품은 생각과 감정을 심정(心情), 마음의 상태를 심경(心境), 마음 속을 심중(心中), 마음속에 떠오르는 직관적 인상을 심상(心象), 어떤 일에 깊이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심취(心醉), 마음에 관한 것을 심적(心的), 마음의 속을 심리(心裏), 가슴과 배 또는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心腹), 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를 심성(心性), 마음의 본바탕을 심지(心地), 마음으로 사귄 벗을 심우(心友),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묵묵한 가운데 서로 마음이 통함을 이르는 말을 심심상인(心心相印), 어떠한 동기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먹었던 마음을 바꿈을 일컫는 말을 심기일전(心機一轉),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함을 일컫는 말을 심열성복(心悅誠服), 마음이 너그러워서 몸에 살이 오름을 일컫는 말을 심광체반(心廣體胖),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심복지인(心腹之人), 높은 산속의 깊은 골짜기를 이르는 말을 심산계곡(心山溪谷), 심술꾸러기는 복을 받지 못한다를 이르는 말을 심술거복(心術去福), 마음이 번거롭고 뜻이 어지럽다는 뜻으로 의지가 뒤흔들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심번의란(心煩意亂),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심심풀이로 어떤 일을 함 또는 그 일을 일컫는 말을 심심소일(心心消日), 마음이 움직이면 신기가 피곤하니 마음이 불안하면 신기가 불편하다를 이르는 말을 심동신피(心動神疲), 심두 즉 마음을 멸각하면 불 또한 시원하다라는 뜻으로 잡념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불 속에서도 오히려 시원함을 느낀다를 이르는 말을 심두멸각(心頭滅却), 마음은 원숭이 같고 생각은 말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생각을 집중할 수 없다를 이르는 말을 심원의마(心猿意馬)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일컫는 말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일컫는 말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말을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말을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在(있을 재)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재(자; 才의 변형; 풀의 싹 모양)의 뜻이 합(合)하여 있다를 뜻한다. 흙으로 막아서 그치게 하다, 멈추어 있다, 살아 있다, 존재하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在자는 '있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在자는 土(흙 토)자와 才(재주 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才(재주 재)자는 새싹이 새로 돋아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才자가 '존재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후에 才자가 '재주'와 관련된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금문에서는 여기에 土자를 더한 '존재하다'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在(재)는 (1)돈이나 물건 따위의 쓰고 난 나머지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있다, 존재하다 ②찾다 ③보다, 살피다 ④안부를 묻다 ⑤제멋대로 하다 ⑥곳, 장소(場所) ⑦겨우, 가까스로 ⑧~에, 처소(處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학적이나 호적이나 병적 등에 적혀 있음을 재적(在籍), 창고에 쌓아둔 물건을 재고(在庫), 전부터 있어 내려옴을 재래(在來), 임금의 자리에 있음 또는 그 동안을 재위(在位), 직무에 있음 또는 그 자리에 있는 동안을 재임(在任), 직장에 근무하고 있음을 재직(在職), 학교에 다니는 중임을 재학(在學), 외국에 있음을 재외(在外), 집에 있음 또는 집에 있으면서 중처럼 도를 닦음을 재가(在家), 초야에 파묻혀 있음을 재야(在野), 고향에 있음을 재향(在鄕), 어떤 자리에 있는 물건을 재물(在物), 어느 직장에 근무하는 일을 재근(在勤), 한동안 머물러 있음을 재류(在留), 세상에 살아 있음을 재세(在世), 지금 이때를 현재(現在), 현존하여 있음 또는 있는 그것을 존재(存在), 속에 숨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잠재(潛在),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있는 곳 또는 있는 바를 소재(所在), 현실에 존재함 또는 그것을 실재(實在),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 또는 직무 상으로 파견되어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주재(駐在), 어떤 사물이나 범위의 안에 있음을 내재(內在), 여기저기 흩어져 있음을 산재(散在), 남아 있음을 잔재(殘在), 건강하게 잘 있음을 건재(健在), 이것과 저것의 사이에 끼어 있음을 개재(介在), 나타나 있음을 현재(顯在), 이 한번으로 담판을 짓는다는 뜻으로 단 한 번의 거사로 흥하거나 망하거나 끝장을 냄을 일컫는 말을 재차일거(在此一擧), 집에 있으면서 독서함을 이르는 말을 재가독서(在家讀書), 바삐 돌아 다니느라고 집에 있는 날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재가무일(在家無日), 어떠한 일에서 벗어나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재소난면(在所難免), 자기가 소속된 바에 따라 처신을 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재소자처(在所自處),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일컫는 말을 인명재각(人命在刻), 새가 높이 날 때는 바람은 그 밑에 있다는 뜻으로 높은 곳에 오름을 이르는 말을 풍사재하(風斯在下), 뜻이 천리에 있다는 뜻으로 뜻이 웅대함을 이르는 말을 지재천리(志在千里) 등에 쓰인다.
▶️ 焉(어찌 언, 오랑캐 이)은 ❶상형문자로 본디 새의 이름으로 새 조(鳥; 새)部에 속해야 할 글자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내려온 관례에 의해 부수(部首)는 연화발(灬=火; 불꽃)部에 포함시키고 있다. 음(音)을 빌어 의문의 말이나 구말(句末)의 어조사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焉자는 ‘어찌’나 ‘어떻게’, ‘어디’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焉자는 正(바를 정)자와 鳥(새 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焉자의 금문을 보면 긴 꼬리를 가진 새와 正자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焉자는 본래 새의 일종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음을 빌어 ‘어찌’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焉(언, 이)은 ①어찌, 어떻게 ②어디, 어디에 ③보다, ~보다 더 ④이에, 그래서 ⑤이(지시 대명사) ⑥~느냐? ⑦~도다! ⑧그러하다, ~와 같다, 그리고 ⓐ오랑캐(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찌 감히 또는 감히 하지 못함을 뜻함을 언감(焉敢), 글자가 서로 닮아 틀리기 쉬운 일을 언오(焉烏), 벌써나 어느새를 어언(於焉),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람을 결언(缺焉), 죽거나 없어져서 존재가 끝남을 이르는 말을 종언(終焉), 뜻하지 않은 사이에 갑자기를 홀언(忽焉), 글자가 서로 닮아 틀리기 쉬운 일을 오언(烏焉), 빨리 흩어지는 모양을 곽언(霍焉),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으랴의 뜻을 이르는 말을 언감생심(焉敢生心), 알지 못하는 동안에 어느덧을 이르는 말을 어언지간(於焉之間), 나는 그 일에 상관하지 아니함 또는 그런 태도를 이르는 말을 오불관언(吾不關焉), 무슨 일이든 운수가 있어야 된다는 말을 유수존언(有數存焉),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혼동하여 다른 자를 쓴다는 말을 오언성마(烏焉成馬) 등에 쓰인다.
▶️ 視(볼 시)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볼 견(見;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示(시)는 신이 사람에게 보이다, 見(견)은 눈에 보이는 일이라는 뜻으로 視(시)는 똑똑히 보이다, 가만히 계속하여 보다, 자세히 조사함으 말한다. 見(견)은 저쪽에서 보여오는 일, 視(시)는 이쪽에서 가만히 보는 일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視자는 '보다'나 '보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視자는 示(보일 시)자와 見(볼 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示자와 目(눈 목)자가 합한 형태였다. 여기서 示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그린 것으로 '보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보이다'라는 뜻을 가진 示자에 目자가 결합한 視자는 '신이 보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보다'나 '~로 여기다', '간주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視(볼 시)는 ①보다 ②엿보다 ③보이다 ④간주하다 ⑤맡아보다 ⑥본받다 ⑦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살필 찰(察), 살필 심(審), 조사할 사(査), 검사할 검(檢), 볼 감(監), 벼슬 감(監), 바라볼 조(眺), 보일 시(示), 볼 견(見), 볼 람(覽), 볼 관(觀), 볼 열(閱), 나타날 현(顯)이다. 용례로는 빛의 자극을 받아 눈으로 느끼는 것을 시각(視覺), 눈이 가는 방향을 시선(視線), 눈으로 봄과 귀로 들음을 시청(視聽), 눈의 보는 힘이 미치는 범위를 시야(視野), 눈이 보는 힘이 미치는 범위를 시계(視界), 돌아다니며 실지 사정을 살펴 봄을 시찰(視察), 물체의 존재나 형상을 인식하는 눈의 능력을 시력(視力),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시정(視程), 사무를 봄을 시무(視務), 존재나 있는 값어치를 알아주지 아니함을 무시(無視), 경계하기 위하여 미리 감독하고 살피어 봄을 감시(監視), 주의해서 봄이나 자세히 눈여겨 봄을 주시(注視), 가볍게 봄이나 가볍게 여김을 경시(輕視), 착각으로 잘못 봄을 착시(錯視), 가까운 데 것은 잘 보아도 먼 데 것은 잘못 보는 눈을 근시(近視), 먼 데 것은 잘 보이고 가까운 데 것은 잘 보이지 않는 시력을 원시(遠視),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내쏘아 봄을 직시(直視),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음을 좌시(坐視), 눈길을 주어 한동안 바라보는 것을 응시(凝視), 돌아다니며 보살핌을 순시(巡視), 업신여기거나 냉대하여 흘겨봄을 이르는 말을 백안시(白眼視), 안중에 두지 아니하고 무시한다는 말을 도외시(度外視), 따뜻하고 친밀한 마음으로 본다는 말을 청안시(靑眼視), 백성을 제 자식처럼 여긴다는 말을 시민여자(視民如子), 죽음을 삶같이 여기고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시사여생(視死如生), 죽는 것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시사여귀(視死如歸), 보고도 보지 못한 체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시약불견(視若不見), 보기는 하되 보이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시이불시(視而不視), 우물 속에서 별을 본다는 뜻으로 우물 안에서는 겨우 몇 개의 별밖에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사사로운 마음에 가리우면 견해가 한 편에 치우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정중시성(井中視星), 열 사람의 눈이 보고 있다는 뜻으로 세상 사람을 속일 수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십목소시(十目所視), 범이 먹이를 노린다는 뜻으로 기회를 노리며 형세를 살핌을 비유하는 말을 호시탐탐(虎視眈眈), 눈으로 먹고 귀로 본다는 뜻으로 맛있는 것보다 보기에 아름다운 음식을 좋아하고 몸에 맞는 것보다 귀로 들은 유행하는 의복을 입음을 이르는 말을 목식이시(目食耳視) 등에 쓰인다.
▶️ 而(말 이을 이, 능히 능)는 ❶상형문자로 턱 수염의 모양으로, 구레나룻 즉, 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을 말한다. 음(音)을 빌어 어조사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而자는 '말을 잇다'나 '자네', '~로서'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而자의 갑골문을 보면 턱 아래에 길게 드리워진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而자는 본래 '턱수염'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而자는 '자네'나 '그대'처럼 인칭대명사로 쓰이거나 '~로써'나 '~하면서'와 같은 접속사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하지만 而자가 부수 역할을 할 때는 여전히 '턱수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而(이, 능)는 ①말을 잇다 ②같다 ③너, 자네, 그대 ④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⑤만약(萬若), 만일 ⑥뿐, 따름 ⑦그리고 ⑧~로서, ~에 ⑨~하면서 ⑩그러나, 그런데도, 그리고 ⓐ능(能)히(능) ⓑ재능(才能), 능력(能力)(능)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30세를 일컬는 말을 이립(而立), 이제 와서를 일컫는 말을 이금(而今), 지금부터를 일컫는 말을 이후(而後), 그러나 또는 그러고 나서를 이르는 말을 연이(然而), 이로부터 앞으로 차후라는 말을 이금이후(而今以後), 온화한 낯빛을 이르는 말을 이강지색(而康之色), 목이 말라야 비로소 샘을 판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지나간 뒤에는 아무리 서둘러 봐도 아무 소용이 없음 또는 자기가 급해야 서둘러서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갈이천정(渴而穿井),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다른 것을 이르는 말을 사이비(似而非),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아니함 또는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함을 이르는 말을 경이원지(敬而遠之), 뾰족한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는 뜻으로 뛰어나고 훌륭한 재능이 밖으로 드러남을 이르는 말을 영탈이출(穎脫而出),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웠다는 뜻으로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잠잘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고침이와(高枕而臥), 형체를 초월한 영역에 관한 과학이라는 뜻으로 철학을 일컫는 말을 형이상학(形而上學),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등에 쓰인다.
▶️ 見(볼 견, 뵈올 현)은 ❶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❷회의문자로 見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見자는 目(눈 목)자와 儿(어진사람 인)자가 결합한 것이다. 見자의 갑골문을 보면 人(사람 인)자에 큰 눈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물을 보는 눈을 강조해 그린 것으로 '보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한자에서는 目자가 주로 '눈'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고 있다면 見자는 '보다'와 같이 보는 행위에 주로 쓰이고 있으니 차이점을 알아두는 것도 좋다. 또 예전에는 見자가 現(나타날 현)자 대신 쓰인 적이 있기에 '나타나다'나 '보이다'와 같은 의미도 있다. 이때는 '현'으로 발음한다. 다만 見자의 기본 의미는 '보다'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보는 것'이나 '보이는 것'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그래서 見(견, 현)은 ①보다 ②보이다 ③당하다 ④견해 그리고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마음에 생각하는 점을 의견(意見),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알려지지 아니한 것을 찾아냄을 발견(發見),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편견(偏見), 서로 다른 의견을 이견(異見), 남의 일에 간섭함을 참견(參見), 사물을 식별하고 관찰하는 능력을 식견(識見), 무슨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짐작함을 예견(豫見), 보고 헤아리는 생각이나 올바로 인식하거나 올바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견(所見), 신분이 높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손님을 만남을 접견(接見), 지체 높은 사람을 찾아 뵙는 일을 알현(謁見), 임금께 나아가 뵈옴을 진현(進見),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뜻에서 지나친 욕심을 절제함 또는 대의를 위해서 부귀영화를 돌보지 않는다는 의미의 말을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말을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뜻으로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 지나치게 큰 대책을 세움 또는 조그만 일에 화를 내는 소견이 좁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뜻으로 나라의 위태로운 지경을 보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을 이르는 말을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말을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말을 견위치명(見危致命), 눈앞의 이익을 보면 탐내어 의리를 저버림을 일컫는 말을 견리망의(見利忘義), 보고 들은 바가 꼭 같음을 일컫는 말을 견문일치(見聞一致), 착한 일을 보기를 마치 목마른 것같이 하라는 뜻의 말을 견선여갈(見善如渴), 착한 일이나 착한 사람을 보면 그것을 따르라는 뜻의 말을 견선종지(見善從之), 토끼를 발견한 후에 사냥개를 놓아서 잡게 하여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사태의 진전을 관망한 후에 응하여도 좋다는 말을 견토방구(見兔放狗), 보고도 못 먹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탐나는 것이 있더라도 이용할 수 없거나 차지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견이불식(見而不食), 달걀을 보고 닭이 되어 울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지나치게 성급한 것을 이르는 말을 견란구계(見卵求鷄), 눈으로 직접 보니 들었던 것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헛된 명성을 비유하는데 사용되는 말을 견불체문(見不逮聞), 보는 것이 탈이란 뜻으로 보지 않아서 모르고 있으면 그만인데 눈으로 보면 무엇인가 문제가 생겨 우환이 있게 됨을 이르는 말을 견물우환(見物憂患), 사냥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기쁘다는 뜻으로 어렸을 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견렵심희(見獵心喜)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