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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은 시인인가 박상륭은 소설<죽음의 한 연구>로 익히 알려져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시각, 청각, 촉각을 동원하여 언어의 총체적인 집합체의 작품으로 읽어나가야만 한다.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세상에서 지켜야 할 나무, 생명의 나무, 순화의 나무라고 했다. 우리 옆에 꼭 있어야 할 존엄의 나무, 하지만 박상륭은 그 에덴의 동산에 세워진 나무를 역설적 은유로 다시 해골의 골자기에 세운다.
죽음을 연구하는 시인, 죽음과 곁에 둔 시적 소걸가 박상륭, 그는 일차적 언어 이차적 언어 삼차적 언어를 초월하여 말을 부린다. 원 안에서 원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투영해 나가는 초월적 시공간의 세계를 그는 통관하고 뀌뚫는다. 어제와 오늘, 미래 와 영겁의 신화적 시간을 한눈에 담아내는 소설같은 시문학적 문장들!
바탕칠에 덧칠, 씌우고 겹치고 두터운 색감으로 이질적인 형상을 그려낸 그의 문장들은 집단 무의식의 세계를 불러낸 이미지화들이다. 이쪽에서 보면 이 사람, 저쪽에서 보면 저 사람으로 보이는 마법의 얼굴을 그려낸다. 마음이 출렁일 땐 없던 문이 열리기도 하고 빤히 보이던 문이 닫히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하듯 두세 겹의 선과 면을 가진 시적인 요소가 반듯한 평면의 소설에서 불쑥불쑥 얼굴들을 드러낸다.
현세와 영겁의 세계를 밀도있게 그려나간 신화적 사유의 세계들, "저 아름다운 생명의 동산" "에덴"의 한가운데 있던 나무가 저 추악한 해골의 골짜기, 이른바 골고다에 세워졌던 "십자가"의 "나무"이며 곧 "생명의 나무"임을 그는 시적 사유와 은유로써 펼쳐낸다.
거듭 강조할 필요도 없이 분명한 사실로서 지켜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어째서 최초의 것은 생명의 동산에 세워져 있었으며, 다음의 것은 "해골의 골짜기'에 세워져 있었던가 하는, 저 장소들의 이상스런 두 개의 은유 "아담이 서 있었을 때' '생명의 동산' 이었던 것이 예수가 서 있게 되었을 때 그것은 어찌하여' 죽음(해골)의 골짜기로 변해졌는지 그의 죽음의 연구는 그렇게 깊어간다, 그의 통찰과 문장은 시와 소설의 혼성 상호텍스트를 이룬다. 종교. 신화, 죽음의 내용만이 아니라 시적 형식의 은유와 알레고리 그리고 이미지들이 소설을 신비롭게 뒤덮고 있다.
정말이지 박상륭의 글을 읽다보면 한계가 느껴져 좌절감이 든다. 몇 년 째 서재에 들여놓고 읽다가 접어두고 다시 펼쳐들기를 반복하다 스스로 내려놓은 적이 있다. 상징학 연구소에서 박상륭의 텍스트를 보내온 것은 나를 다시 시험대에 올리는 일이었다.
그랬다 다시 읽은 박상륭의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 시에 더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코 속도감있게 읽어 내려갈 책이 아니었다. 은유의 맥락을 따라가야 한다. 그 속에서 존재에 관한 사유를 진행시켜 나가야 한다. 풀어야 할 숙제같이 다시 오랫토록 들여다보아야 할 일이 생겼다. 오늘 이 글을 다시 읽을 수 있음에 기꺼이 기쁜 날, 홀로 축하주라도 마셔야겠다!
2013년 ≪시문학≫ 등단.
시집 『부탁해요 곡절 씨』 외.
포항소재문학상, 푸른시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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