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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와 패러디의 신 / 신 수 진
패러디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히포낙스의 풍자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진화해 온 패러디는 우스꽝스러운 모방물이라는 부정적 평가에서부터 상호텍스트적인 창조물이라는 재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문학의 본령을 낯설게 하기에 둔다면 자동화된 관습을 계승하는 동시에 위반하는 이 아이러니한 작업을 통해 비로소 기존의 세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우월성과 열등성의 이종성을 수용하면서, 내포된 진실과 언어의 외연 사이에서 불일치를 발생시키면서, 리얼리티를 상상계로 전도시키면서 패러디는 부상한다.
김건영이 최근 발표하고 있는 사전(蛇傳) 연작은 종교, 사회, 정치, 경제, 인물 등에 육박해 가면서 그것을 패러디한다. 이때 사전은 사전(辭典)과 동음이의어로 시인 자신의 어휘나 용법 등을 기록하고 해석한 저장 매체를 뜻하는 동시에, 성서에서 사악한 존재로 간주되는 뱀이 전하는 말이라는 뜻에서 신성 모독의 의도도 함의하고 있다. 패러디의 다양한 기법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이 연작시는 이 시대의 문학, 영화, 광고, 경전, 잠언, 속담의 보고이기도 하다.
김건영은 정치 비판적 관점을 더 이상 시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현재진행형의 이슈들을 다룰 뿐 아니라 소비주의적 문화 복제나 패스티시로 자칫 오인될 수 있는 이 위험천만한 패러디 형식을 사전(蛇傳) 시리즈물로 편찬해 가며 천연덕스럽게 말놀이를 즐긴다. 이 패러디스트는 원텍스트의 차용과 비틀기라는 오래된 문법 위에 거침없이 자기 세계를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를 써나가기 위해 골몰한다.
천치창조
여기 선지자의 메모가 있다
① 야간의 주간화
② 휴일의 평일화
③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
기도합시다 R'Amen 모든 사람이 이러한 평등을 겪는 그날까지
라면의 화자
벌을 받는다면 신 앞에서 받겠다 재미없는 농담에 대한 벌만을 면은 꼬여 있다 모든 면(麵)은 가까이에서 보면 꼬여 있지만 멀리서 보면 선(善)이다 얼굴이 꼬여 있지 않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꼬인다 당신은 왜 꼬여 있지 않습니까 벌겋게 남은 국물 같다 나는 쉽게 끓어오르고 사람의 배 속으로 사라진다
저 화상
배를 가르고 나온 애비는 흰 종이였다
수술이 끝나도 깨어날 줄을 몰랐다
아버지가 누운 침대가 자라고 있다 적출된 간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나머지가 이제야 태어난 것을 알았다 모든 일에 프로가 되라고 하셨지요 나의 장래희망은 프로크루스테스입니다 남은 평생 라면을 먹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짜파게티 요리사는 이렇게 말했다
라면은 요리가 아닙니다 불 앞에 선 나는 요리사가 아닙니다만 무엇인가를 끓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가 아닙니다 시는 죽었다 누군가 말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시 아닙니까 나는 이해라는 말이 웃깁니다 이해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도 있는 거 아닙니까 너와 내가 뛰놀 때면 두 마리의 돼지를 떠올립니다 나는 신이 잘못 누른 버튼입니다 시는 죽었다 나는 신(身)을 끓이고 있다 이것이 신의 몸이라면…… 나는 속을 끓이면서 눌어붙은…… R'Amen
난 쟁의(爭議)가 쏘아올린 작은 봉(鳳)
비정규직이라고 합니다 일요일이니까 일을 합니다 용기(用器) 있는 자가 라면을 얻는다 용기도 없어 가방 속에 컵라면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신은 언제나 일요일에만 있다 신이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한다
범재와의 전쟁
눈이 올 때마다 생각한다 여기는 어쩌면 신의 재떨이가 아닐까 신은 가끔 여기다 침도 뱉는다 먹고 남은 컵라면 용기처럼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 나는 기도한다 R'Amen 나를 키운 것은 페라리 바람이었다 신이 있다면 제일 먼저 떠든 아이로 불려나가 뺨을 맞겠다 당신이 끓인 라면이 이렇게 불었노라고 말하면서
― 「일요일 ―사전(蛇傳) 7」 전문1)
1) 이 글은 《창작과비평》 183호, 2019, 봄호에 수록된 김건영의 시를 대상으로 한다.
「일요일」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김건영의 사전(蛇傳) 연작 가운데 일곱 번째 시다. 일곱 번째 날은 일요일이다. 기독교에서 일요일은 그리스도가 부활한 날에 기원을 두었기에 주일(主日)로 일컬어지며 신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리는 약속된 축일이다. 일곱 번째 시는 일곱 번째 날인 일요일로, 일요일을 전 인류의 휴일로 보편화시킨 유래인 천지창조로, "휴일의 평일화"를 강조했던 한 공직자의 말을 기록한 또 다른 공직자의 수첩으로 전이된다. 기하급수적으로 가속화되는 일요일에 대한 연상 작용에는 기성의 가치와 기존의 규범을 뛰어넘는 주이상스가 있다. 낯설게 변형된 현실과 경악스러운 유머를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마다 독자에게 카타르시스와 각성을 건네는 것이 그의 주요 전략이다.
패러디 소제목들로 구성된 시의 첫 에피소드는 "천지창조"인데 여기 남긴 선지자의 메모는 불행히도 심판과 종말을 초래했다. 회자된 이 본문 부분은 공직자의 헌신적인 업무태세를 촉구하는 요청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기 위함이라는 뜻밖의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통용된 무법의 힘과 천문학적인 돈의 출처에 다수가 공분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을 국가적 문제로 점화시킨 것은 바로 이 선지자의 수첩이었고 결국 세상은 천지창조라는 제목처럼 몰락을 딛고 예언처럼 재건되었다. 그렇다면 "기도합시다 R'Amen".
김건영의 시 「일요일」은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폭풍의 눈을 적확하게 조준하고 있다. 일요일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뒤 휴식일로 지정한 날로서 그것과 관련하여 기독교 패러디 종교인 '나는 스파게티 괴물교'2)가 적극 활용된다. 원래는 십계명이었으나 누군가 두 개를 잃어버려서 여덟 개가 된 FSM교의 팔계명은 절대성과 구속성에서 벗어나 "I'd really rather you didn't~(웬만하면 ~하지 말았으면)"라는 권유형으로 시작한다. 그 첫 항은 다음과 같다. "웬만하면 나를 믿는다고 성스러운 척하지 말라.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마음 상하지 아니하노라." 창조주 말씀에 힘입은 시인은 라면과 짜파게티 등 유사 신들에 대한 언급도 서슴없이 이어 간다.
이제부터 이 문제적 수첩에 적힌 "라면의 상식화"라는 구절은 면발을 휘날리면서 꼬이고 불어터진 시대를 관통해 나간다. "모든 면(麵)은 가까이에서 보면 꼬여 있지만 멀리서 보면 선(善)"이라는 찰리 채플린식의 명명은 삶의 희극성과 비극성에 대한 라면근본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면의 화자"는 결국 뒤틀리고 끓어오르다가 마침내 사라지고 말 뿐이라는 냉소적인 태도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자신의 기원과 아버지에 대한 핍진한 기억 때문이다. 미당의 「자화상」을 패러디한 "저 화상"이라는 제목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만한 고유의 정서가 출력된다. "저 화상"이라는 말은 흔히 비정상적인, 이를테면 무능력하거나 부도덕하거나 두 경우 모두이거나 한 아버지의 전력을 오랜 세월 지켜보다 해탈해 버린 어머니들의 입에서 주로 들을 수 있다. 이 말에는 분노를 넘어선 자포자기 및 한의 정서가 결합되어 있다.
이어 아버지를 회상하는 어린 화자의 음성은 "애비는 종이었다"에서 "애비는 종이였다"로 변용된다. 서럽고 수치스러운 천치와 죄인의 내력을 거슬러 금기에 가까운 아버지의 신분을 발설하고야 마는 저 한국 문학사의 도저한 자기모멸과 극기의 전언을 김건영은 이토록 어이없는 언어유희로 넘어선다. 그의 도발은 곳곳에서 동음이의어, 연음, 띄어쓰기, 한자, 영어 발음 등을 활용한 새로운 언어 운용의 기교로 발휘된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아버지는 성장기제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동일시의 모델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무의식에 내재된 표상으로 초자아이며 자기통제와 상벌의 기준이 되는 양심이고 도덕률인 셈이다. 그런데 김건영은 아버지를 '종이'로 대체하며 사물화 하기에 이른다. 존속살해와 근친상간을 비롯한 엽기적인 아버지 죽이기의 유형들이 세대를 거치며 진화해 왔으나 자식들의 허망한 몸짓이 극렬해질수록 아버지는 더욱 건재해졌다. 아버지는 결코 미성년들이 벌이는 활극에 겁을 먹지도 않을뿐더러 순순히 운명을 달리하지도 않는다. 반대급부가 심해질수록 억압 기제는 도리어 더욱 추동되기 때문이다. 김건영은 그 긴 싸움의 끝줄에 서지 않는 영민함을 보여준다.
이 시의 많은 구절이 그렇듯 "배를 가르고 나온 애비" 역시 아버지도 자기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나왔다는 뜻과, 아버지가 수술실에서 개복 수술을 받고 나왔다는 뜻 두 가지로 중첩되어 쓰였다. "모든 일에 프로가 되라고 하셨지요"라며 아버지의 말을 상기하던 화자는 자신의 장래희망은 프로크루스테스라고 응답해 준다. (여기서도 "프로"라는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펀(pun)의 놀이는 계속된다.) 자신이 곧 아버지의 반영물이기 때문이다. 수술 후 깨어날 줄 모르는 아버지에게서 적출된 간의 일부를 보고 "나의 나머지가 이제야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화자에 따르면 아버지의 일부가 자신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자신은 동일체다.
나의 기원이 되는 아버지가 지닌 부권은 태생적이고 운명적이며 지배질서로서 법 그 자체다. 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가 자기 침대 사이즈에 꼭 맞지 않는 인간들의 머리와 다리를 잘라버리거나 늘여서 죽였듯이 세상의 모든 아들은 아버지의 침대에 맞춤형 인간이 되어 죽임 당하지 않기 위해 신체 일부를 잘라버리거나 모자란 신체 일부를 늘여 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자신 역시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어 아버지의 계보를 이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끝에 "남은 평생 라면을 먹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수줍은 고백을 덧붙임으로써 김건영은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파기하고 프로크루스테스를 처단한 테세우스가 되고자 하는 본의를 드러낸다. 그러나 자기 자신 역시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닮은 프로크루스테스이므로 프로크루스테스를 제거하는 아이러니한 자살을 결행해야만 한다. 그런 차원에서 아버지에 대한 부정, 나아가 신에 대한 조롱은 시 전체를 관장하는 일관된 염세주의를 보여준다.
라면을 먹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말 역시 패러디 구절로 이제는 남녀 관계에서 고전이 되어버린 라면 제의를 활용하고 있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에서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에게 했던 대사 "라면 먹을래요?"는 전방위에서 무수히 패러디 되었으며 특히 성적인 제안을 뜻하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늦은 시간 자신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도 악수나 청하는 순진한 상우에게 은수는 집에 들어가려다 말고 "라면 먹을래요?"라고 묻는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상우가 정말 라면 물이나 끓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자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자고 갈래요?" 하고 묻는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상우는 정말 잔다. 아침까지. 아무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썸'을 타는 사이에서 '라면 먹고 갈래?'는 우회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단도직입적이고 노골적인 멘트(이는 "우리 사귈래?"의 뜻이 아님을 유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신의 은혜로운 면발은 봄날의 라면을 거쳐 일요일은 짜파게티까지 그 충만한 성령을 전해 주신다. "즐거운 일요일은 짜파게티 먹는 날, 내가 우리 집 짜파게티 요리사"와 "짜라짜짜짜 짜짜짜 짜파게티"를 외치다가 특정 요일과 미각이 결합되어 일요일만 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짜파게티에 대한 식욕을 추동시키던 자본주의적 강박의 기억이 우리들에겐 있다. 시 전반에 걸쳐 일요일이라는 모티프는 일관되게 사유의 작동원리가 되는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패러디인 "짜파게티 요리사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꽤 진지한 시론과 신앙이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결국 눌어붙고야 마는 장면으로 귀결된다. "이해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와 "사람에게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도 있는 거 아닙니까"와 같은 질문 속에는 김건영이 내파하고자 하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가 끓어 넘친다.
일요일이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되어 사회문화적 맥락의 요소들을 패러디로 횡단해 가는 이 시적 모험은 한 편의 시가 포괄할 수 있는 시대가 얼마나 공시적 그리고 통시적으로 넓이를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예컨대 "난 쟁의(爭議)가 쏘아올린 작은 봉(鳳)"에서는 저 70년대 산업화의 명암에 여전히 갇혀 있는 비정규직의 절망을 일요일이니까 일을 하는 사람들과 일을 하지 않는 신에 대비시키고, "범재와의 전쟁"에서는 90년 범죄와의 전쟁이 공포되기까지 난무하던 불법과 폭력의 굴레가 유령처럼 제 모습을 감춘 채 더욱 공고화되고 있는 현실을 비춘다.
<범죄와의 전쟁>(윤종빈, 2012)은 세관 공무원이었다가 비리로 해고된 최익현(최민식)이 지략과 화술을 바탕으로 조직과 손잡고 정치인을 매수하며 학연․지연․혈연에 없는 종교도 만들어 로비스트로 출세하는 이야기다. 권력과 결탁하고 재물을 착취해 신분을 세탁한 그는 훗날 미국 유학 후 검사가 된 아들로부터 "아버지, 고맙습니다"라는 절절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된다. 딜레마는 이런 거다. 불안정한 가정형편에도 밤낮없이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공부한 아들이 훗날 검사가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도둑질을 해 자신을 키운 것임을 알게 된다. 과연 아들은 아버지를 처벌하거나 비난할 수 있을까.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최익현이 김판호(조진웅)가 관리하는 나이트 지분을 뺏자고 제안했을 때 최형배(하정우)가 한 대답으로 이는 <범죄와의 전쟁>이 풍자하는 그 시절의 무법과 모순을 가장 대표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두 번째 딜레마다. 최익현이 일부러 찾아가 흠씬 맞고 옴으로써 복수의 명분을 주자 형배는 수순대로 나이트를 접수한다.
나쁜 놈들이 형식적으로나마 공표하는 명분은 하나같이 코미디로 일축될 만한 것이지만 감히 누구도 그 명분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음을 알기에 그들의 사업은 언제나 성공적으로 착수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명분은 행동의 동기가 아니라 행동의 합리화를 위한 위장술에 불과하다. 그래서 죄짓고 끌려간 경찰서 한복판에서도 수갑 찬 손으로 경찰관 따귀를 때리고는 "느그 서장이랑 마, 어저께도, 으, 같이 밥 묵고, 으, 사우나도 같이 가고, 으, 마, 다 했어!"라는 으름장과 적반하장의 거래는 성사되는 것이다.
"범재와의 전쟁"이 응시하는 것은 신의 "재떨이", 신이 뱉은 "침", "먹고 남은 컵라면 용기처럼 선한 사람들"을 지나 "신이 있다면 제일 먼저 떠든 아이로 불려나가 뺨을 맞겠다"는 위악적 선포에 다다라 멈춘다. 불한당조차 그것이 비록 피차 다 아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일지라도 내세울 명분을 찾느라 일차원적 고민을 나누는데 보아하니 위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세계는 픽션보다 더 막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을 떠올리면 "고통 속에서 지옥을 얻고, 지옥 속에서 극락을 구하라"고 했던 옥중의 만해를 감히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우리가 공유한 정신적 고통과 쇠락만이 우리의 의식을 한 꺼풀 벗겨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한 세기 전 시대의 어둠을 부끄러워하던 윤동주는 이렇게 신음했나 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永遠히 슬플 것이오."(윤동주, 「八福」) 성경을 패러디한 이 영원한 슬픔이 불의의 시대에서 소환된 울음이었듯이 김건영의 패러디 시는 우리의 환부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이성복, 「그날」)은 무서운 침묵과 무감각으로 진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김건영의 패러디 시가 지닌 의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시대적 대상과 개념에 대한 탈환 능력. 그것은 김건영이 지닌 독보적인 능력치다. 비록 그 방식이 다소 공격적이고 거칠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시대의 첨병에서 우리의 고통과 굴욕과 환멸과 비참과 분노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예의 주시하는 그 자세는 지금 여기의 낮은 목소리들을 대신하여 기록된다. 둘째, 언어에 대한 재기발랄한 운용 능력 예컨대 '펀'이라고 부르는 언어 유희적 측면에 대한 재능이다. 김건영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기교는 저 90년대 원류를 형성하고 있는 진이정의 화법을 떠오르게 한다. 정치적 전투성으로 무장된 지적인 언어감각과 존재를 육박해 가는 아이러니의 언어들은 서정적인 내면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갱스터 랩을 연상케 하는 자유로움을 갖췄다. 셋째, 김건영은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뛰어난 저자이지만 동시에 눈 밝은 독자라는 점에서 독서의 회로를 양방향으로 오간다. 그는 원텍스트의 해독자이면서 패러디 텍스트의 설계자인 것이다. 이후 수용 과정에서 독자가 원본을 파악하고 그것과 비교하여 패러디 텍스트의 전략을 알아차릴 때 패러디는 비로소 완성된다. 사회문화적 패러다임을 전제로 한 이 소통의 과정은 작가와 독자의 대화일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조우로 이어진다.
이제 기독교의 배타성과 독단성을 패러디하고 있는 '나는 스파게티 괴물교'로 돌아가 보자. 말씀에 따르면 그는 라면이 아닌 여타 모든 면들에게 관대하고(저들을 용서하소서. 자신이 지은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웬만하면 이러지 말길 권유할 뿐 자신의 뜻을 어겼다고 끓는 유황불에 영원히 담그는 벌 따위는 주지 않는다. 김건영이 이 패러디 종교를 시의 지지대로 삼은 것은 불온하기 짝이 없는 과장된 비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머로만 넘길 수 없게 하는 자율성과 상대성에 대한 수호 때문이다. 그것은 김건영이 생각하는 공존의 조건이기도 하다.
패러디는 저명한 원본과 그것을 둘러싼 지배적인 담론을 공인하는 동시에 넘어서는 위반을 감행할 때 성취되는 아이러니한 작업이다. 널리 알려진 원작을 익숙하게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김건영의 패러디 시는 마치 재독을 하는 것 같은 데자뷰의 경험을 제공한다. 공동체의 기억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공유한 작가․텍스트․독자의 관계가 긴밀하고 협동적인 시스템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매우 고무적이다. 김건영은 대중문화의 통속성과 메타포를 통해 고급과 저급을 교차시키고 긍정과 부정을 교환함으로써 견고한 사회질서를 교란한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산출한 이미지, 코드, 언어, 기호들을 자유자재로 재조립하고 재생산해 내는 이 작업은 궁극적으로 패러디를 통한 의미론적 재고를 촉발시키는 작가적 요청인 것이다.
2)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Flying Spaghetti Monster, 줄여서 FSM이라 칭한다)는 공립학교 필수과목으로 지적 설계를 가르쳐야 한다는 캔자스 주 교육위원회에 항의하기 위해 바비 헨더슨이 2005년 창시한 종교로 기독교를 패러디했다. 신성한 면발을 움직여 인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므로 면식을 생활화해야 한다. 종교인이 의식에서 베일을 쓰듯 파스타파리안들은 국수를 건지는 주방기구를 성물로서 머리에 뒤집어쓰고 경건함을 표한다. 나흘에 걸쳐 천지를 창조한 비행 스파게티 괴물은 풍요로움의 소스와 에너지를 상징하는 면발 뭉치로 감싼 미트볼 위로 촉수처럼 눈 두 개가 나와 있다. 천국에는 맥주가 뿜어져 나오는 화산이 있고 지옥은 파스타의 냉동 보관고다. 기도의 마지막은 '라멘'(라면의 일본식 발음)으로 끝맺는다.
⸺《문장웹진》 201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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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 1981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2014년 한국안데르센상 동화 당선,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첫댓글 이 평글은 김건영의 연작시 蛇傳을 대상으로 했군요.
"범재와의 전쟁
눈이 올 때마다 생각한다 여기는 어쩌면 신의 재떨이가 아닐까 신은 가끔 여기다 침도 뱉는다 먹고 남은 컵라면 용기처럼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 나는 기도한다 R'Amen 나를 키운 것은 페라리 바람이었다 신이 있다면 제일 먼저 떠든 아이로 불려나가 뺨을 맞겠다 당신이 끓인 라면이 이렇게 불었노라고 말하면서
― 「일요일 ―사전(蛇傳) 7」 전문1)"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친김에
김건영의
蛇傳 연작시와
신수진의 다른 평론(2019년 신춘문예 당선작)도
읽어봤습니다.
탐구적 열성이 대단하ㅜㄴ요 좋아요.
부러워요.
난 그렇지 못하고
김건일의 사전도
신수진의 평글도
읽은 게 그게 다 겨우 그게 다
부끄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