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승 투수와 18승 투수. 그저 숫자 한개를 더 붙였을 뿐이지만 그 차이는 아주 큽니다. 현재 한화이글스에서 10승을 빼고 그걸 전부 패로 바꾸면 우리 팀순위는 <6위>가 되지요. 그만큼 한 시즌에 있어서 10번의 승리는 의미가 큽니다. 만일 8승을 올리는 투수와 18승을 올리는 동갑내기 투수가 있다면 그 투수의 연봉차이는 곱절 이상이겠지요.
솔직히 고백하건데, 저는 시즌 개막전까지 류현진이 잘하면 7~8승, 대박나면 두자리 승수, 조금 삐끗하면 6승 이하의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드웨어 좋은 완투형 좌완 파이어볼러였지만 초고교급 투수들의 데뷔시즌이 항상 화려했던 것 만은 아니었으니까요.
지금은 염종석 정민철이 날아다니던 1992년과 상황이 다릅니다. 김진우가 데뷔 첫해에 12승, 오재영과 이승호, 그리고 조규수가 10승을 거뒀는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이길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었죠. 김명제도 7승이었고 장원준이나 김수화, 이정호, 김사율 등은 무승~3승 정도였습니다. 김인식 감독도 언론을 통해 8승~10승을 기대한다고 언급했었고요.
그런데 올해 류현진은 그것을 뛰어넘었죠. 우리야 응원팀 선수니까 그냥 별 생각없이 흐뭇하게 지켜봤겠지만 사실 프로야구사에서 보면 그의 데뷔는 큰 <사건>입니다. 200탈삼진 자체가 신인으로서는 최초 기록이고, 데뷔 첫 해에 18번의 승리를 거뒀다는 것, 그리고 선발로만 거뒀다는 것도 유래를 찾기 힘든 일이니까요.
그럼 류현진이 이토록 어메이징한 기록을 세운 이유는 뭘까요? '초고교급 투수'로 수억의 계약금을 받았던 선수들이 5승 올리기도 힘든 프로바닥에서 말입니다. 만일 저에게 그 이유를 딱 한개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자신있게 <체인지업>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를 꼽자면 바로 제구력이겠죠. 만일 시속 151~152를 쉴새없이 뿌려대던 올 봄의 류현진이었다면 그의 2006년은 지금보다 덜 화려했을겁니다.
여러분은 투수가 타자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150을 넘는 돌직구, 폭포수같은 커브, 예리하게 휘는 슬라이더, 타자 앞에서 솟아오르는 무시무시한 속구, 몸쪽으로 휘어오는 역회전 볼.....
하지만 저는 타자의 의표를 찌르는 절묘한 볼배합이야말로 투수가 타자를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구와 똑같은 폼으로 나오는데 속도는 줄고 낙차까지 있는 체인지업이 있다면 그것은 타자들의 방망이를 헛돌게 하는 최고의 무기가 될 겁니다. 바로 올시즌의 류현진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류현진은 제구가 잘 됩니다. 그런데 제구력이라는 것은 비단 <스트라이크를 잡는 능력>만을 뜻하지는 않죠. 스트라이크와 최대한 비슷하게, 그래서 타자들을 현혹시키는 볼을 던질 줄 아는 능력이 바로 진짜 제구력입니다.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건 제구력이 나쁜게 아니라 마운드에 설 자격 자체가 없는거죠. 반면 제구력이 좋다는 건 <볼을 잘 던지는 것>을 뜻합니다. 박동희가 에이스로 크지 못하고 슈퍼베이비가 된 이유, 그리고 직구의 힘을 잃은 송진우가 지금까지도 공을 던진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겠죠.
류현진이 작년까지 삼진 아니면 볼넷 형태의 덜 완성된 파이어볼러였다면 불과 몇달 사이에 <타자의 눈을 현혹시키는> 체인지업과 <타자의 선구안을 현혹시키는> 제구력을 바탕으로 완급 조절형 투수가 된거죠. 바로 이 차이가 (김인식도 언급했던) 8승 투수에서 18승 투수로 업그레이드 된 이유입니다. 물론 류현진이 제구력 엉망에 공만 빠른 투수는 아니었지만 굳이 따져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요즘 최강 불펜요원이 된 한기주가 152~153을 쉽게 던지면서도 선발로 실패했었던 이유, 어떤 측면에서는 류현진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유원상이 1군무대를 밟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자기가 원하는 곳에 공을 찔러넣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넘치는 힘을 7~8회까지 효율적으로 분배할 줄 아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류현진은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졌고, 힘 쭉~ 뺀 채로 체인지업을 던져댔기 때문에 8~9회가 되도 위기상황에는 149를 던지는겁니다. 주자가 없을 때 힘을 아껴뒀다가 위험해지면 힘을 내는거죠. 류현진은 그걸 조절할 줄 압니다.
선수들끼리 하는 말로 '힘 빼는데 10년 걸린다'는 얘기가 있죠. 제가 수영을 햇수로 14년 해봤는데, 8~9년쯤 되니까 저게 무슨 얘기인지 몸으로 느끼겠더군요. 투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면 안 되고 완급조절을 해야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은 그렇게 안 되죠. 신인 뿐 아니라 데뷔한 지 몇년 되는 선수들조차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류현진은 힘을 빼고 던집니다.
특히 그냥 힘을 빼는 것뿐만이 아니라 힘을 뺄때는 빼고, 그러면서도 써야할 때는 쓰는 능력을 갖추기란 쉽지 않습니다. 150넘는 공을 힘차게 뿌리는데 가만히 있으면 볼넷으로 내보내는 투수, 타자를 압도하는 공을 던지다가도 주자만 나가면 혼자 흥분해서 땀 뻘뻘 흘리다가 연타를 허용하는 선배 투수들이 한둘이 아닌데 류현진은 데뷔 첫해에 그걸 하고 있으니 다른팀 입장에서는 참으로 징글징글한 투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류현진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무기가 (체력소모 적은) 체인지업이고 대부분의 공을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부상을 당하지 않는 것과 투구폼을 잃지 않는 것 뿐입니다. 좋은 직구 던지던 투수가 갑자기 공의 위력이 떨어지는 경우는 있지만 제구되던 선수가 갑자기 원하는 곳으로 공을 못 던지는 경우는 적거든요. 지금의 밸런스만 기억한다면 구종 장착은 천천히 해도 됩니다.
아닌 말로 제구력 뒷받침된 직구와 잘 떨어지는 체인지업 하나만 있어도 10년은 우려먹을 수 있습니다. 이승호는 직구가 있었으나 그 직구를 쉽게 던질 수 있는 몸이 없었는데, 류현진은 좋은 직구를 상대적으로 쉽게 던질 수 있는 튼튼한 몸과 옵션으로 체인지업이 있습니다. 2년차 징크스를 겪더라도 부상만 아니면 성적 하락폭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유죠.
준플옵부터 시작되는 힘든 포스트시즌 일정과 아시안게임. 류현진이 체력안배에 각별히 신경 써서 올해의 페이스를 내년에도 가져갈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155 대신 142의 직구를 던지더라도 지금같은 패턴이면 쉽게 무너지지 않을겁니다. 류현진이 앞으로도 계속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8승 투수에서 18승 투수가 될 수 있었던 비결 두개를 늘 몸에 지닌채로 말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류현진이라는 에이스를 얻은것도 행운이지만 앞으로 투수진 세대교체를 해야하는 한화입장에서 기둥투수를 얻은것도 큰 행운이라고 봅니다. 안영명선수가 10승대투수 포텐셜을 지녔다고 하지만 영명선수를 1선발로 세우기는 좀 그렇습니다. 류현진이라는 에이스를 얻음으로 안영명, 그리고 다른 젊은 투수들이 포진한 새로운 투수진을 세우는 것이 가능해 졌습니다..
ㅋ 저는 거기에 다른 좌완 투수가 갖지 못한 공의 각도를 덧붙이고 싶어요. 그동안 엄밀히 말하면 우리 나라에서 완벽한 오버 스로우 좌완 투수는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상훈, 구대성 등이 류현진과 비슷한 구속을 가졌을지는 몰라도 류현진만큼 높은 팔각도에서 공을 뿌리지는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생각해보면 대성이형님이나 이상훈 투수 같은 좌투수들은 높이보다는 홈플레이트의 각도를 이용하려 쓰리쿼터에 가까운 공이었지만 류현진은 완벽한 오버스로우에서 그것도 좌완의 이점으로 홈플레이트 구석구석을 잘 이용하고 낙차 큰 커브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네요 ㅋ.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류현진의 삼관왕이 결코 요행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앞으로 10년, 아니 20년을 부상없는 좋은 투수로 활약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한화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2년차 징크스는 없다,,, 현진이는 계속 주욱간다,,
이말이 정답인데.. 저번에 어떤기자가 딴지를 걸었죠.. 이대진마냥 승부하지않는게 못마땅하다고요 ㅋㅋㅋ 신인선수가 제구력에 변화구승부를 즐긴다하고요... 할줄알면 안된다는것처럼 ㅎㅎ 전 개인적으로 내년시즌 류현진군이 200K는 못할거 같습니다.. 삼진을 쓸어담고 할때는 직구승부였는데.... 요즘도 많이 잡는거지만.. 체인지업승부를 하면서 삼진페이스가좀 떨어졌죠.. 첸졉던지기전에는.. 탈삼진율이 9이닝당 11개에 육박했었는데.. 요즘은 9개 안팍이죠.. 어쨌건 대단합니다~
솔직히 내년이 더 기대됩니다...영리한 선수라 뭘 더 배우고 나올런지...^^ 2년차 징크스같은거...현진이는 키우지 않을겁니다!!! *^^*
좋은글 감사합니다. 류현진이라는 에이스를 얻은것도 행운이지만 앞으로 투수진 세대교체를 해야하는 한화입장에서 기둥투수를 얻은것도 큰 행운이라고 봅니다. 안영명선수가 10승대투수 포텐셜을 지녔다고 하지만 영명선수를 1선발로 세우기는 좀 그렇습니다. 류현진이라는 에이스를 얻음으로 안영명, 그리고 다른 젊은 투수들이 포진한 새로운 투수진을 세우는 것이 가능해 졌습니다..
ㅋ 저는 거기에 다른 좌완 투수가 갖지 못한 공의 각도를 덧붙이고 싶어요. 그동안 엄밀히 말하면 우리 나라에서 완벽한 오버 스로우 좌완 투수는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상훈, 구대성 등이 류현진과 비슷한 구속을 가졌을지는 몰라도 류현진만큼 높은 팔각도에서 공을 뿌리지는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생각해보면 대성이형님이나 이상훈 투수 같은 좌투수들은 높이보다는 홈플레이트의 각도를 이용하려 쓰리쿼터에 가까운 공이었지만 류현진은 완벽한 오버스로우에서 그것도 좌완의 이점으로 홈플레이트 구석구석을 잘 이용하고 낙차 큰 커브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