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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 11,22―12,2>
주님,
22 온 세상도 당신 앞에서는 천칭의 조그마한 추 같고 이른 아침 땅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습니다.
23 그러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 주십니다.
24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25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존속할 수 있었으며 당신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26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12,1 당신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주님, 당신께서는 탈선하는 자들을 조금씩 꾸짖으시고 그들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는지 상기시키며 훈계하시어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십니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말씀 1,11─2,2>
형제 여러분,
11우리는 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12 그리하여 우리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2,1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가 그분께 모이게 될 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2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가을이 깊어갑니다.
회한과 감사로움으로 가을의 가슴이 물들어 갑니다.
지는 낙엽이 대수롭지만은 않습니다.
뒹구는 낙엽이 발길에 와 닿으면 달려온 시간을 절로 뒤돌아보게 됩니다.
자비가 익어가고 회개의 얼굴이 붉어집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자비와 회개를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회개가 낳은 자비가 아니라 자비가 낳은 회개입니다.
곧 자비가 익어 회개가 터져나는 신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그 사람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
(지혜 11,23)
그렇습니다.
회개하였기에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먼저 자비가 베풀어졌습니다.
자비를 먹고서야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오는 까닭입니다.
화답송에서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에 넘치시네.”
(시 145,8)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리시면서 당신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내용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그렇게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비록 죄인이었지만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는 회개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입고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캐오는 그분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들이 가로막은 까닭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키가 작아서인 까닭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군중을 파헤치고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죄인인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죄인인 채 그분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못내 송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을 앞질러가서 길 앞에 있기만 하여도 오시는 그분을 볼 수 있으련만, 굳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숨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질러 달려온 이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렇게 숨은 자캐오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시던 그 사랑으로, 숨어 있는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가려져 있어도 훤히 보시고, 어찌 아셨는지 놀랍게도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기겁할 노릇입니다.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시듯, 아무도 몰래 나무 위로 피해 숨어 있는 자캐오를 부르십니다.
어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루카 19,5)
자캐오는 그분을 몰랐지만, 그분은 그를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숨어 있어도 아시고, 키가 작아도 아시고, 훤히 꿰뚫어 아셨습니다.
그의 모든 행실을 다 아시고, 따돌림 당하고 배척받는 죄인의 아픔도 아시고, 죄인인 채로 당신을 보고싶어 하는 그 가련함도 훤히 아셨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훤히 아시는 그분의 아심 앞에 부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내려올 수가 없나 봅니다.
그분의 그윽한 사랑 앞에 승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내려와 지지 않나 봅니다.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시는 분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는, 주님이 나보다 낮은 곳에 계심을 보지 못하고서는, 결코 내려와 엎드려지지가 않나 봅니다.
당신의 자비를 입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허물이 보이는 까닭입니다.
주님께서는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신 그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5)
당신께서는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피해가는 자캐오의 집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십니다.
당신이 품으신 그 사랑은 그토록 가득하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바로 그 사랑에 기대지 않고서는 우리가 있을 곳이 없음을 봅니다.
당신이 바로 우리의 거처, 우리의 집인 까닭입니다.
참으로 당신께서는 잃은 이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신 까닭입니다.
비로소 자캐오는 주님을 뵙고야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게 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 19,8)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사랑에 의탁하여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저도 오늘 주님께 무엇을 드릴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오늘 주님께 무엇을 드리겠는지요?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루카 19,5)
주님!
당신은 저를 훤히 아십니다.
교만과 탐욕의 나무 위에 올라 허영과 가식으로 몸을 가리고 죄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그릇된 저의 모든 행실을 아시고, 손가락질 당하고 배척받는 아픔도 아시고, 죄인인 채로 당신을 보고싶어 하는 이 가련함도 훤히 아십니다.
바득바득 기어 올라간 교만과 허영에서 얼른 내려와 당신 발아래 엎드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 앞에 부복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경험이 회개의 은총을 불러옵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모양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경험이 회개의 은총을 불러옵니다.
따라서 이 시간 먼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고, 그 보고 싶은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곧장 달려가서 길가의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키가 작은 콤플렉스, 군중이라는 장애물, 위신 체면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는 세관장이었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던 그는 그야말로 부자였고 물질적으로는 풍부한 사람이었지만 죄인이라는 낙인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체면을 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 상관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의 이름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서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고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기 삶의 쇄신에 대한 다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특별히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인정해 주고 보아주었다는 것을 알기에 삶이 바뀐 것입니다.
지금까지 집착하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버릴 만큼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고 만나게 됩니다.
뵙고 싶은 만큼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혹 내가 아직 세상 것에 미련이 많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탓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캐오처럼 위신 체면 버리고 나무 위로 올라가는 정성과 노력, 장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투신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을 무시한 은총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면서 스스로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에 기꺼이 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다면 얼른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 하겠습니다.
자캐오라는 이름의 뜻을 말씀드렸었는데 기억하시나요?
‘즈카르야’(Zechariah)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캐오를 멀리서 피하고 손가락질하는 죄인으로 여겼지만, 주님은 그를 구원해야 할 사람으로 기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느님께서 기억하십니다.
당신의 모상을 닮은 당신의 귀한 작품으로 기억하십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기를 희망하며 기억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구원의 대상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구원의 문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자캐오가 주님을 갈망하며 세관장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나무에 올랐듯이 단호한 결단으로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협력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9-10) 하고 선언하시는 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고 투덜거리던 자칭 의인인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을까요?
자칭 죄인이라고 하는 이에게 구원이 있었습니다.
죄인임을 뼈져리게 느끼고, 고백하고, 하느님 앞에 새사람으로 살아가야겠다는 결의는 하는 이들에게 구원이 가깝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캐오의 집에 구원이 내린 것은 주님의 은총과 자캐오의 협력의 결실입니다.
예기치 않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주님께로 향한 나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의 손을 꼭 잡고 일어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이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더 높은 행복을 위해: 가끔은 다 내려놓고 잠시 나무 위로 올라가 봅시다>
로맹 가리(Romain Gary)는 세계 3대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2회 수상한 경력을 가진 유일한 인물입니다.
본래 콩쿠르상은 평생 한 번만 받을 수 있지만 로맹 가리는 다른 필명으로 두 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나 명예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영예를 안았지만 1980년 권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집필한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새벽의 약속> 줄거리입니다.
로맹은 어렸을 때 거짓말 잘하기로 유명한 유대인 홀어머니 밑에서 컸습니다.
어머니는 로맹에게 “너는 커서 위대한 인물이 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프랑스 대사가 될 것이고, 유명한 작가가 될 것이고, 전쟁영웅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밀수품을 판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고 당해 그는 아들을 데리고 마을 한 복판에서 아이가 반드시 영웅이 될 것이라 소리쳤습니다.
로맹은 그때가 가장 괴로웠던 순간이지만 그 이후로 정말 어머니 뜻을 이뤄드려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그 비웃음이 미래의 로맹 가리를 만들었습니다.
로맹은 자신이 좋아하던 그림 그리기가 어머니 뜻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법학을 공부하러 파리로 옵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도 말 수완을 발휘해 건물주가 됩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무리 글을 써도 읽어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 들어가서 장교가 되기로 합니다.
그것도 제대로 안 됩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300명 중 유일하게 자신만 소위로 진급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거짓말로 아들이 잘나가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소문 내고 다닙니다.
로맹은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당뇨로 쓰러져가면서도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무언가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성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계속 아들에게 용기를 주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로맹은 점점 미쳐가며 모기를 잡겠다고 총을 쏴서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대대로 잠을 자지 않고 책을 썼으며 전쟁에서 영웅이 될 일을 찾았습니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그는 복부에 총을 맞고 조종사로서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큰 공을 세워 드 골 장군에게 훈장까지 받게 됩니다.
또한 군 복무를 하며 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며 어머니의 꿈을 모두 이뤄드립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어머니께 편지로 써 보내는데도 어머니의 편지는 계속 글을 쓰고 영웅이 되라는 격려 뿐이었습니다.
몇 년 만에 어머니를 찾은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3년 전에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250통이나 되는 편지를 써 놓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계속 그것을 붙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맹은 어머니의 뜻을 다 이뤄주고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행복하다고는 했지만, 66세에 자살했습니다.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머니가 행복이라 말하던 것을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을 알까요?
모두가 돈과 쾌락과 명예만 좇으며 지금 그것이 없으면 고통스러운 것이라 착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관장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자캐오는 이 세상에서 돈이 최고라 여기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했습니다.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올랐습니다.
더 행복할 무언가를 찾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버리면 행복하다고 외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못 마땅해 합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루카 19,1)
하지만 자캐오는 죄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 19,8)
바리사이들은 말할 것입니다.
“죄를 지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게 낫다면, 그 죄 때문에 피해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중에 갚는 게 무슨 소용인가?
그들이 이미 고통으로 죽었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죄인들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9-10)
사실 바리사이들도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캐오와 달랐던 것은 죄가 행복하지 않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로맹도 끝까지 어머니가 요구하던 길이 행복이 아님을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감사했습니다.
자신에게 자존감을 심어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나를 쓰레기로 여긴다면 확실히 쓰레기가 되지.” (『밤은 고요하리라』, 로맹 가리)
하지만 그러한 자존감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자존감도 수준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캐오는 이것을 찾을 줄 알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행복이 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죄를 짓습니다.
그 죄를 지으며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를 살펴야 합니다.
나의 감정에 솔직해야 합니다.
영화 <아이언 맨>의 주인공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마약을 배워 나이가 들어서도 그것을 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뛰어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망가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영화도 망치고 여자도 떠나고 감옥에도 여러 번 들락거렸지만, 마약을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마약을 끊게 된 계기가 있는데, ‘치즈 버거의 맛’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자신이 좋아하는 치즈 버거를 먹는데 치즈 버거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마약과 치즈 버거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 순간 가진 마약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가 마약 대신 치즈 버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아이언 맨은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돈을 좋아하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았습니다.
자기를 섬기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모시고 그분의 뜻으로 자기 뜻을 죽이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고통의 시작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죄를 지어도 돈이 행복이란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죄를 많이 지어야 죄가 고통임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고통인지 알려고만 하면 알 수 있습니다.
빨리 깨달을수록 덜 죄를 짓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세상을 바라보면 왜 저렇게 아웅다웅 살았는지 이상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봅시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 행복할 거다”가 아니라 “무엇을 하든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찾다 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더 행복하려는 사람만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봅시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자유인의 삶 - 주님을 찾아라, 만나라, 그리고 회개하라>
요즘 가을 들어 피정자들도, 미사 참석자들도 많아졌습니다.
자주 공통적으로 드리는 말씀이요, 그대로 오늘 미사 참석한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인생 여정 중,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또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 있습니까?
대부분 오후 3-4시, 가을철 인생 나이에 걸쳐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가을철 9월은 순교자 성월,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1월은 위령성월, 바로 기도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이며 수확의 계절입니다.
이제 가을철 지나면 인생 겨울철입니다.
그러니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일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가을철 인생이 아닌 분들도 이번 가을에는 기도도, 공부도, 일도 많이, 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은 참 행복한 분들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전례 미사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분 예수님을 만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복되게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 참 아름다운 영혼 자캐오를 만나 참된 삶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 수도형제들은 이런 자캐오를 기리고자 가장 크고 좋은 피정집을 ‘자캐오의 집’이라 명명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영혼의 사람, 자캐오입니다.
오늘은 자캐오를 통해 참 자유인의 삶을 공부합니다.
첫째, “찾아라!”입니다.
자캐오는 외관상 부자일지 몰라도 참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키도 작고 외모도 볼품이 없었던 세관장 자캐오는 동족의 멸시를 받으면서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고립단절된 참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꿈이, 희망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찾는, 주님을 만나고 싶은 꿈이, 희망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참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찾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주님을 찾는 열정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고 계시다는 소식에 자캐오의 반응이 전광석화 신속 기민합니다.
이처럼 한결같이 주님을 찾았던 열정의 사람, 자캐오임이 분명합니다.
실감나는 다음 긴박한 상황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게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그대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주님을 찾는 자캐오입니다.
키 작은 자캐오였지만 눈이 열려 섭리의 나무, 돌무화과나무를 보았고, 즉시 나무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찾아라! 주님을 항구히, 간절히 찾아라!”는 가르침을 배웁니다.
둘째, “만나라!”입니다.
간절히, 항구히 찾을 때, 우리의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참 좋으신 하느님은 편견도, 선입견도 없으신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보십니다.
자캐오가, 우리가 찾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제1독서 지혜서에서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온 세상도 당신 앞에는 천칭의 조그마한 추같고 이른 아침 땅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얼마나 좋으신 하느님이신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을 만나자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날 때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간절히, 항구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만납니다.
자캐오가 주님을 이렇게 찾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냥 거리를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주님을 찾는 열정 없이 살기에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당신을 찾는 자캐오의 순수한 열정의 갈망을 직감적으로 알아채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를 부르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주님을 만난 복된 사람, 참된 사람, 열정과 순수의 사람 자캐오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은 자캐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여기 '오늘'은 영원한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 기쁘게 환대하는 우리들입니다.
자캐오의 환대를 받으신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의 환대를 받으십니다.
셋째, “회개하라!”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따라오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자캐오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무지에 눈이 가려졌기에 자캐오의 진상을 보지 못하고 편견의 자캐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 군.”하고 투덜거립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사람 눈에 죄인이지 하느님 눈에는 순수한 자캐오입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제가 보기에 투덜거리는 이들이 죄인입니다.
즉각적인 자캐오의 회개의 실천입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회개의 실천이요 참나의 발견인 구원입니다.
이렇게 사람대접 받아 보기는 처음일 자캐오입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이들에게는 목숨까지 바친다 하는데 재물 쾌척이야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앞에 재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초라한 것인지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최고의 살아 있는 참 보물, 주님을 만남으로 무지의 탐욕에서 해방된 자유인 자캐오입니다.
소유냐 존재냐 갈림길에서 회개와 더불어 지체 없이 존재인 주님을 택한 자캐오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탐욕의 종에서, 주님의 종으로 돌변한 자캐오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과거의 자캐오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 새로운 창조물로 부활한 자캐오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우상의 본질은 폭로되고 비로소 참 자유인이 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구원선언이 참 통쾌합니다.
그대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앞서 많은 재산 때문에 주님을 떠난 부자 청년과는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지요!
주님을 만나 회개할 때 모든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인이 됩니다.
바로 자캐오가 참 자유인의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난 우리 모두가 회개의 실천을 통해 참된 자유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우리를 위한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1테살 1,1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은 참 정겹고 아름다운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캐오가 되어 달려 봅시다.
세관장이고 부자인 그는 꽤 많은 걸 소유한 사람이지요.
동족이나 이웃에게 미움과 경멸을 받고는 있지만 누리는 것에 비하면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
자칭 정결하다는 이들의 손가락질이 삶의 방식을 바꿀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그에게 관심을 끄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자기 같은 이들도 꺼리지 않고 친구가 되어 주신다네요.
그는 예수님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루카 19,4)
그가 작은 키 때문에 군중에 가려진 예수님을 보기 어렵게 되자, 달려가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지요.
그만큼 그의 갈망이 컸다는 뜻입니다.
당장 무슨 결심이 선 것은 아니지만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를 꼭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루카 19,5).
아래로 내려오신 분이 땅에서 고개를 들어 한 죄인과 눈을 맞추십니다.
낮은 곳에서 어둡게 살던 한 죄인이 위로 올라가 아래에 계신 분과 시선을 맞춥니다.
위 아래가 반복 교차되다가 한 지점에서 서로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려면 더 올라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내가 더 괜찮아지면, 더 깨끗해지면, 더 거룩해지면, 형편이 더 나아지면 그분과 스스럼없이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요.
그분도 내가 더 정돈되고 말끔해져야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초라하고 엉망인 형편을 보이면 그분이 멀리 도망가 버릴 것 같습니다.
루저, 실패자는 하느님도 외면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헛된 것으로라도 치장을 하고 올라가려 합니다.
그분은 나를 만나러 일찌감치 저 아래, 내 원래 자리로 내려오셨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5)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묵기를 자청하십니다.
자캐오야말로 신이 났지요.
환대는 집 주인이 손님을 기꺼이 기쁘게 맞아 섬기는 덕행인데, 지금 이 순간 집도 없으신 나그네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캐오를 환대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동족에겐 별로 못 받아보던 온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세상의 냉대를 비웃으며 자기 안에 갇혀 살던 자캐오를 세상의 문 앞에서 환대하시는 겁니다.
이제 자캐오는 외적으로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환대해 맞아들이지만 내적으로는 세상의 환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은 영혼이 먼저 깨닫습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루카 19,6)
그런데 이번엔 사람들이 편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지만 율법을 준수하며 바르게 사는 자기들보다 세관장을 택하시다니, '예수님도 돈을 좋아하시나보군' 투덜거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대는 돈에 대한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개방화된 물신주의 사회입니다만,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캐오를 손가락질해 온 이들은 깊숙히 감춘 부러움과 질투의 숨은 욕망을 율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정당화했을지도 모릅니다.
죄인인데다 부자이기까지 한 자캐오와 그의 집에 묵으시는 예수님이 그들 내면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만 것이지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 19,8)
사람들의 시끄러운 내면이 들렸을까요?
자캐오가 예수님께 먼저 제 결심을 밝힙니다.
누가 감히 먼저 제시할 수도 없는 통 큰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갈망, 그분을 향해 달리고 오른 여정, 그분과의 눈맞춤, 그분의 부르심과 앞지른 환대가 그의 영혼 안에서 새창조를 이루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 11,26-12,1)
죄인이라 내쳐진 자캐오를 소중히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의 안에 잠재된, 아직 선하고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지 못한 주님 불멸의 영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냉대와 소외, 비아냥거림에 익숙한 자캐오는 예수님의 환대로 제 본래 모습, 하느님의 모상성을 되찾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2테살 1,11)
자캐오는 이제 자신 안에 심겨진 부르심을 그분의 힘으로 완성해 가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루카 19,9)
한 사람의 회심이 가족 모두, 집안 전체를 구원합니다.
죄의 연대성을 넘어서는 구원의 연대성입니다.
자캐오의 결심은 자기 영혼과 집안 전체는 물론 자선의 수혜자들에게도 구원이 될 것입니다.
자캐오의 통 큰 결심에 이은 예수님의 통 큰 구원 선언은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는 말씀에 기인합니다.
구원은 앞질러 달려가 오른 저 높은 곳에서가 아니라, 다시 내려와 땅을 딛고 선 내 삶의 자리에서, 곧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캐오 회심의 실마리는 영 새삼스런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일상에서 아우성치던 소음 중에 들어 있던 것이었지요.
어둠 속에 머물던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눈맞춤이 그 영혼 속에 파묻혀 있던 하느님 모상성을 흔들어 깨웁니다.
소중히 여겨 주며 세상의 품으로 맞아들인 환대가 얼마나 크고 광대한 선의 파급으로 이어지는지 오늘의 흥미진진한 복음의 대목은 보여 줍니다.
"얼른 내려오너라."
(루카 19,5)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아직도 더 오를 궁리, 더 나아질 기회를 찾아 달리고 있다면 이 말씀에 좀 더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지금, 여기, 이대로도 좋다고 하십니다.
우리 회심과 구원의 열쇠는 이미 우리 안에, 우리 존재와 역사 안에 다 들어 있답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덧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저는 10월이면 생각나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1979년 10월 26일입니다.
그날 한국의 대통령이 서거하였습니다.
저는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장충동에서 신문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죽음은 한국의 80년대를 열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한 갈망이 있었고, 총과 칼로 정권을 잡으려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386’세대가 되어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민주와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참여가 있어야 했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희생했던 이들의 땀과 눈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입니다.
가을의 정취에 잘 어울리는 노래였습니다.
1982년에 발표된 노래입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10월이면 어김없이 들을 수 있는 노래입니다.
80년대는 자유와 민주에 대한 갈망도 있었지만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갈망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의 문화는 ‘기생충, 오징어 게임, BTS'로 성장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캐오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같은 동족인 유대인에게는 죄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 위를 걸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풍랑을 잠재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죽었던 소녀도 다시 살려 주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죄인이라고 불리던 세리와 창녀와 함께 한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자캐오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집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갈망입니다.
안정된 직업과 재물로는 채울 수 없는 갈망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래서 나무에도 올라갔고,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한국의 자유와 민주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이들의 고단한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희생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풍족하게 살았던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어둠의 세상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자캐오는 재물을 땅에다 쌓았던 부자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부자도 죽었지만 하느님의 품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제가 가진 것의 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내어 놓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으면 4배로 되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서 하루를 머물렀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
우리들 역시 매일 미사를 통해서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기 때문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성서공부를 하고, 매일 주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자신의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연말이 되면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갈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갈망이 바로 기도입니다.
구원은 갈망이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구원은 갈망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캐오의 갈망은 주님의 말씀으로 자라나고, 굳어졌습니다.
자캐오의 갈망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눔으로써 열매를 맺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때가 언제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의 삶에 충실하십시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1천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 1위는 누구일까요?
많은 위대한 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첫 번째 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있을 때 하나의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잘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청각 장애를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해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각 장애로 잡음을 들을 수 없어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드린다.”
자기의 청각 장애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한다 해도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하지만 불평불만을 한다고 상황이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면 상황을 재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의 희망을 보게 되면서 좋은 상황을 찾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에디슨의 놀라운 발명은 언제나 부족함과 불편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학교도 중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신체적으로도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함과 불편함이 가득한 삶이었지만, 이를 재해석하면서 희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시작에 바로 감사의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의 틀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세관의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위와 재산은 구원받는 데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습니다.
이 모습에서 구원은 복음을 듣고 주님 뵈옵기를 원하는 마음가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했으나 군중에 가려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은 구원의 길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오른 것입니다.
한 도시의 세관장이며 내로라하는 부자가 채신머리없이 나무에 기어 올라간 모습은 분명 점잖지 못하다며 손가락질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체면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이 예수님 눈에 보여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5)
자캐오는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을 맞이하기 전 준비로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주님께 약속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의 은혜를 먼저 받아야 따르겠다고 하지 않나요?
우리 마음에 머무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이를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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