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10)
자신의 모습 가운데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좀 더 잘 살아 보고 싶고, 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은데
늘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아무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빈틈없고 완전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고치기 어려운 결점을 안고 삽니다.
부부의 경우 누구보다 가깝기에 배우자의 결점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우자가 제발 이것만 고쳤으면
참 좋을 텐데 하는 것이 한둘은 꼭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싸움을 해도 끝까지 고치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안고 사는 한두 가지 결점은 도무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에고로
인하여 버릇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나쁜 버릇들은 스스로 고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소유물은 죄밖에 없다.”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은
명언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나쁜 버릇이나 이기심, 감정 등은 모두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의 것으로 생각하고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사실 신자라면 누구나 성령을 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에고를 버리지 않는 한 성령은 오시지 않습니다.
영성 작가였던 벨기에의 루이 에블리(Louis Evely
1910–1985) 신부는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La priere d'un homme
modern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이 하느님께 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느님이 사람에게 빌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안하시고 다만 인간에게 호소하시며 은혜를 베풀고 계실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훨씬 더 열성적으로 우리를 찾고 계시며
훨씬 더 우리와의 만남을 기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만날 기회를 얼마나 제공해 드리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호소하고 있지만,
사실은 성령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제안하고 하느님은 그것을 결정하신다’ 라든가
‘인간은 보채고 하느님은 인도하신다’ 라는 따위의 말처럼
비 그리스도교적인 말은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인간을 하느님의 노리개로 추락시키고,
하느님을 제 멋대로 횡포를 일삼는 폭군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사실은 하느님께서 제안하시고 인간이 그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제안하시고 다만 인간에게 호소하시며
은혜를 베풀고 계실 뿐입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제공하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림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응답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간청한다고 해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으로부터 어떠한 은혜를
어떻게 받고 있는가를 헤아려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높은 원의(願意)도
하느님의 계획에 동의 하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 외로이 있는 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없는 데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훨씬 더 우리와의 만남을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우리는 하느님께로 이르는 길을
한 발자국도 내 디딜 수 조차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비워놓지 않으면 결코 성령이 오시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성령은 오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나
‘잃어버린 은전 한 닢’에 대한 비유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우리 자신의 내면의 문제에 관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잃어버렸다’는 것은 내면의 ‘불완전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안고 사는 내면의 결핍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신 것처럼
더욱 더 완전한 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마태 5,48)
그렇다면 어떻게 완전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점을 고치고 결핍을 채운다고 해서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에고를 끊임없이 버리려고 애쓰지 않으면 완전한 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결점이 응고되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을뿐더러
알량한 자존심이 결점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자신의 결점과 감정에 휘둘리다 보면
자기 자신만 망가지게 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가장
이기적인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