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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노나라 사람. 유교의 시조로서 중국 최초의 민간 사상가이자 교육자. 어머니는 아들을 얻기 위해 니구산(尼丘山)에 가서 신령님께 기도를 올리고 공자를 낳았다. 그런 까닭에 공자의 이름 구(丘)를 니구산의 구(丘) 자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그가 태어날 때 이마 가운데가 니구산처럼 골이 파여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고 지었다고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예(禮)에 뛰어났으며, 천하를 주유하며 인(仁)에 기초한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실패하여 유가 경전을 정리·편찬하는 데 전념하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 결과 3,000여 명의 제자들을 길러냈다. 공자의 사상을 담고 있는 《논어》는 그의 제자들이 스승이 죽은 후 편찬한 것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정나라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동문 성곽 위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공자를 보고 자공에게 말했다.
"당신 스승의 옷차림이 아주 궁색해 보여 마치 상갓집 개와 같구려."
이 말을 들은 자공은 그에게 벌컥 화를 내고는 나중에 공자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공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도리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확실히 상갓집 개와 같다. 그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구나."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인 공자는 왜 스스로를 그토록 비하했을까? 상갓집 개란 '밥을 주는 사람은 있어도 돌아갈 집이 없다'는 뜻으로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유세하는 공자를 비유한 말이다. 사마천각주1) 도 자신의 저서 《사기》에서 공자를 '상갓집 개'라고 불렀다.
공자는 노나라의 산둥성 취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숙량흘은 일찍이 노나라의 여자에게 장가가서 딸만 아홉을 두었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숙량흘은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얻어 아들 맹피를 낳았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리가 불구였고 어려서 일찍 죽었다. 그러자 숙량흘은 64세가 넘은 나이에 다시 젊디 젊은 안씨의 셋째 딸 안징재에게 구혼을 하여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공자다.
숙량흘은 키가 10척이나 되고 힘이 장사인지라 공자의 외할아버지 안씨도 딸에게 결혼하기를 권유하면서 그의 늠름한 대장부의 기상이 부럽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무용담 가운데에는 노나라의 군대가 성안에 포위되려는 순간, 그가 위에서부터 내리 닫히는 성문을 두 손으로 떠받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자는 아버지를 닮아 체구가 당당하고 키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다. 공자의 외모에 대한 여러 기록을 간추려보건대, 그의 외모가 뛰어났음은 사실인 것 같다.
"공자의 눈은 크고 길며 이마는 앞으로 높게 나와 황제각주2) 의 모습이요, 팔은 길고 등은 거북의 모양이며 키는 아홉 자 여섯 치로 크다. 몸 둘레가 아홉 아름이나 되고, 앉으면 용이 서린 것 같고 일어서면 견우성(牽牛星)을 대하는 것 같다."
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공자는 어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안징재는 남편을 시아버지가 살던 곳에 장사지내고 절기에 맞추어 집에서 정성껏 제사지냈다. 이를 항상 주의 깊게 보던 공자는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제기(祭器, 제사지낼 때 쓰는 그릇)를 늘어놓고 제사지내는 흉내를 내곤 했다. 나이는 어렸으나 그의 태도는 늘 예(禮)를 갖춤으로써 매우 어른스럽게 보였다고 전한다.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가난했으나 오직 아들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물론 집이 가난한 탓에 공자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짐작되나, 그 향학심만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공자 스스로 "십여 호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마을에 나만큼 성실한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학문에 뜻을 세운 15세 이전에 이미 학문에 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생계를 위해 노나라의 3대부 가운데 하나인 계손씨각주3) 집안에서 양곡을 관리해주었다. 이때 충실하게 일을 해주어 얼마 후에는 목장 관리인으로 승진했는데, 역시 가축이 잘 번식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공을 제사지내는 태묘에서 조그마한 직책을 맡아보게 되었다. 공자는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이것저것 묻기에 정신이 없었고, 사소한 절차 하나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공자를 비웃었다.
"누가 취푸의 이 청년이 예(禮)를 안다고 말하느냐? 만일 그가 예를 안다면 왜 태묘에 들어와 이것저것 묻는단 말인가?"
공자는 19세 때 어머니의 권유로 노나라에서 사는 송나라 사람 계관씨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계씨가 남편의 까다로운 성미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렸다는 설이 있다. 《논어》에 공자가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 이외에는 아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또 '여자는 소인배와 같다'느니 '다루기 어렵다'느니 하는 공자의 여성관으로 보아 이 설은 사실인 것 같다.
한편 노나라의 소공(昭公)이 공자의 득남 소식을 듣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다산(多産)의 상징인 잉어 두 마리를 선물로 보냈다. 공자는 감격하여 아들의 이름에 잉어의 뜻을 덧붙여 공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말단 관리인 공자에게 왜 임금이 직접 선물을 보냈을까? 아마도 공자의 학식과 인품이 궁중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문이 퍼지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자의 나이 24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공자는 관습에 따라 어머니의 시신을 아버지의 묘에 합장하려고 하지만, 묘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공자는 어머니의 관을 임시로 매장해놓고 아버지의 묘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어떤 노파가 묘의 위치를 가르쳐주어 공자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합장할 수 있었다.
공자는 자기 집을 서당으로 삼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젊을 때부터 시작한 이 교육 활동으로 수십 년 동안 무려 3,000명이 넘는 젊은이가 그의 서당을 거쳐 갔고, 그의 명성은 멀리 퍼져 나갔다. 하지만 정작 그가 고향의 관리가 되었을 때는 이미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듬해에 노나라의 정공이 이웃 제나라와 화해 조약을 맺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때 공자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무관들을 대동하라고 건의했다. 연회장에서 제나라의 내인(內人)들이 칼춤을 추며 정공의 주위로 몰려들자, 공자가 큰소리로 춤을 중지시켜 위기를 넘겼다. 이 일을 구실로 제나라에 빼앗겼던 땅을 모두 돌려받게 한 공을 세워 공자는 최고 재판관 자리인 대사구에 올랐다.
54세에 공자는 재상(宰相)의 실권을 겸하는데, 그때 난신(亂臣)인 대부 소정묘를 사형에 처해 그 시체를 3일 동안 백성들 앞에 구경시켰다. 그리하여 그가 재상의 실권을 잡은 지 3개월 만에 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혔다.
노나라가 나날이 융성하는 것을 질투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제나라 왕은 미녀 80여 명과 준마 120마리를 단장시켜서 정공에게 보냈다. 어리석은 정공은 여기에 빠져 날마다 춤과 노래로 세월을 보낼 뿐, 공자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공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끝내 사임했다. 공자는 가슴 가득히 미련을 품고 노나라를 떠났다. 제자 자로가 앞장서서 성문 밖을 나가자 문지기 한 사람이 의아해서 물었다.
"선생은 어디서 오는 길이오?"
자로가 대답했다.
"공자가 있는 곳에서 오는 길이오."
그러자 문지기는 큰소리로 말했다.
"아! 세상이 이미 글러버린 줄을 알면서도 애써 행하는 그 사람 말이오?"
공자는 덕 있는 임금을 만나 어진 정치를 베풀게 함으로써 천하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끝내 그의 포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56세에 모국인 노나라를 떠나 약 14년 동안 방랑했다. 그의 방랑 여정은 불행하고도 초라했을 뿐만 아니라, 몇 차례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박해를 당했는가 하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오랜 방랑 생활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는 예부터 전해오는 갖가지 문헌을 수집하고 이를 편찬하는 일에 몰두했다.
공자는 현실 정치에서는 실패했지만 교육과 학문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공자는 스스로의 말과 몸가짐 하나하나를 통해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일종의 시범식 교육 방법을 사용했는데, 제자들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공자는 일하지 않는 인간,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인간을 가장 싫어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몸소 실천하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충고했다.
"내가 하루 종일 깊이 생각만 해보았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너희는 정 할 일이 없거든 잡담이나 하지 말고, 장기바둑이라도 두어라."
어느 날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한 제자 자하가 물었다.
"안연각주4) 은 사람됨이 어떻습니까?"
"안연의 어질고 의로움은 나보다 낫지."
"자공각주5) 은 어떻습니까?"
"나는 자공의 말재주를 따라갈 수가 없다."
"자로각주6) 는 어떤가요?"
"자로의 용기에는 내가 못 따라가지."
"자장각주7) 은 어떤지요?"
"자장의 장중함은 나보다 나아."
자하는 다 듣고 나서 어리둥절해져 일어나면서 물었다.
"그들이 다 선생님보다 나은데, 왜 모두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지요?"
공자가 말했다.
"앉아 보아라. 말해줄 테니. 안연은 인의를 말할 줄은 알지만 형편과 상황에 따라서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변통을 모른다. 자공은 말은 잘하지만 겸손하지 않아. 자로는 용감하지만 물러날 줄을 모르지. 자장은 장중하지만 남과 어울리지 못해. 그들은 각각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단점도 있거든. 그래서 다 나를 선생으로 삼고 배우려는 게다."
공자 나이 68세에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다. 2년 후에는 제자 안연이 죽었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살고 싶은 의욕마저 잃어버렸다. 공자는 평소에 안연을 도의 계승자로 지목하고 있었으니, 그의 죽음은 곧 대도(大道)의 말로를 상징했다. 공자는 자기 아들의 죽음보다 안연의 죽음을 더 슬퍼하며 땅을 치고 통곡했다.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
다음 해에는 재아각주8) 가 제나라에서 피살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그를 가장 믿고 따르던 자로마저 전쟁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자로는 위나라에서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시체는 젓으로 담겨져 공자에게 보내졌다. 그는 마치 양팔을 잘린 듯 몸부림쳤다.
"하늘은 내가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하늘은 내가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죽음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공자는 자공에게 말했다.
"나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선생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은 무엇을 전하겠습니까?"
"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그래도 사계절이 운행하고 만물이 생장한다."
자공은 이 말을 듣고 공자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았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이 자조 섞인 말은 세상살이에 지친 그의 심중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얼마 후, 때는 화창한 봄이 오기 직전이었다. 이날도 자공은 아침 일찍이 공자에게 문안드리러 갔다. 공자는 지팡이를 들고 문 앞에서 산책 중이었는데, 탄식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도 부러지는구나. 철인(哲人)마저 시들어버리는구나!"
그러고 나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자공이 급히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 자리에 눕혔으나 공자는 그날부터 의식을 잃었다. 결국 7일 만에 여러 제자들의 비통 속에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장례식은 장엄했고, 제왕의 장례식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고향인 산둥성 취푸에 있는 쓰수이 강가에 공자를 장사지냈는데, 이곳으로 제자들이 모여들어 3년 동안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거처했다. 자공은 6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그 후 그곳에 100여 호의 가족이 모여 살아 마을 이름을 공리(孔里)라 불렀다고 전한다. 공자가 거처하던 집에는 그가 생전에 쓰던 옷, 관(冠), 거문고, 수레, 책들을 비치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공묘다. 공자의 위패(位牌)와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인 공묘를 문묘(文廟)라고도 하는데, 계속 넓혀나감으로써 지금은 중국 최대의 건물이 되었다.
공자는 죽은 후 성인으로 추앙되었고, 그 명예는 2,000년이나 계속 이어졌다. 그를 기념하는 사원이 곳곳에 세워졌고, 12세기 초에는 신으로까지 추대되었다. 단순한 인간이기를 원했으며 스스로 성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그가 결국 신격화된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결코 완벽한 인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제자의 항의에 쩔쩔매며 변명하는 스승이었고, 낮잠을 잔 제자에게는 '더 이상 손댈 곳도 없는 인간'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는 자기가 그토록 강조한 예법을 어기고 소리내어 통곡하던 사람이다. 때로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상복 입는 기간을 1년으로 줄이자고 한 제자에게 '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라고 해놓고, 그 제자가 나간 뒤에 다른 제자들에게 그를 비난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관청에 나가 일할 때는 윗사람에게 온순하고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다중인격자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입맛은 까다로운 편이었고, 술은 아무리 마셔도 정신이 혼란해지지 않았다. 옷의 색상과 품위에도 세심한 주위를 기울였고, 작업복으로 오른쪽 소매가 짧은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1919년 5·4운동각주9) 이후의 신문화운동에서는 유교 사상을 봉건사상의 찌꺼기로 보는 등 공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도 했다. 아편전쟁각주10) 이후 식민지가 되어버린 중국의 현실을 놓고 '유교가 중화민족을 망쳤다!'는 탄식이나 '공자교를 쳐부수자!'는 외침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오랜 세월을 두고 중국뿐만 아니라 동양,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공자는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인·의·예·충을 가르치며, 춘추시대의 혼란기에 봉건적인 예(禮)의 질서를 인(仁)의 기초 위에 다시 세우려고 했다. 흔히 석가모니는 자비를, 예수는 사랑을,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공자는 인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인이란 무엇인가?
첫째, 인이란 인간 중심의 사상이다. 즉, 인이란 모든 일의 주체인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다운 인간이 되게 하려는 휴머니즘이다. 둘째, 인은 진실함과 성실성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 셋째, 인의 경지는 끊임없는 자기 노력으로 달성된다. 인이란 욕망에 빠지기 쉬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 즉 극기복례(克己復禮)다. 욕정에 빠진 육신을 죽이고 인을 이루기 위해서는 즉, 살신성인(殺身成仁)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자는 학식과 덕행을 겸비하고 극기복례와 살신성인을 이룩한 사람을 군자(君子)라 부르고, 그 자신과 제자들의 교육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인이란 한 사람의 도덕적 완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들의 인을 모아 커다란 인, 대동인(大同仁)을 이룩하는 것이 유교의 궁극적인 목표다. 공자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올바른 통치자의 등장을 기대했다. 공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과정을 거친 통치자가 나와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한 나라에 진정으로 도덕 정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각각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행동해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공자는 지식과 덕을 갖춘 엘리트(군자)가 현실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제후국의 정치 현실을 안에서부터 개혁하고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며, 또한 백성들의 복리를 증진시켜주기를 바랐다. 그가 이상으로 삼은 인간은 결코 현실 도피적이거나 금욕주의적인 성인이 아니고, 세계와 사회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모든 일에 절도를 지킬 줄 아는 명석한 판단력의 소유자, 즉 현자였다. 그의 언행을 전하는 《논어》에 따르면, 그는 유덕한 군자이자 좋은 교사였다. 그러나 후세에는 국가적, 교파적인 존경의 필요성에 따라 권위적 존재로 탈바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