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최근에 박진영, 배용준 관련 구원파 집회가 인터넷 실검 1위라고 하는데
구원파의 문제가 무엇인지요?
세월호나 유병언 관련한 정치적 논란이 아닌 성경적 이단성에 대해 부탁합니다.
<답변>
(우리 카페에 있는 구원파에 관한 자료 일부를 올려드립니다.)
구원파는 현재 박옥수 계열의 기쁜 소식 선교회(IYF, 예수교복음침례회), 권신찬 계열의 기독교복음침례회, 이요한계열의 생명의 말씀 선교회(대한예수교침례회)로 나뉘어져 활동하고 있다.
1980년대 말 오대양사건으로 권신찬 계열의 구원파가 세간에 널리 알려졌으며, 또한 박옥수 계열의 구원파는 체육관집회의 성경세미나를 통하여 잘 알려져 있으나, 이요한계열의 구원파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그동안 다른 구원파 교회의 그늘에서 놀라운 발전을 해왔다.
구원파는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의 영향으로 죄 사함을 깨달았다는 권신찬과 미국인 독립 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는 유병언(권신찬의 사위)에 의해 대구에서 첫 출발되었다.
이요한은 구원파의 초창기부터 목포에서 권신찬을 추종했던 인물로 중생을 경험했다고 하며 권신찬에게 안수를 받은 사람이지만 후에 유병언이 교회의 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 기업이 곧 교회의 일이라는 유병언 파를 비난하면서 교회와 기업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내고 ‘복음수호파’로 분리된 것이다.
그리고 박옥수는 선교사 딕 욕과 권신찬의 영향을 받았으며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박옥수는 거듭난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죄 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주제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집회를 하고 있으며, 구원파 중에서는 박옥수의 기쁜 소식 선교회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처럼 3개의 파는 서로 분파되어 있긴 하지만 모두 구원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구원파라고 이름 붙여 부르게 된 것은 이들이 모두 구원 문제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구원파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권신찬이 죄 사함을 깨달았다고 하고, 유병언이 복음을 깨달았다고 하고, 이요한은 중생을 경험했다고 하고, 박옥수는 거듭난 체험을 했다고 하는데 이들의 말은 모두 같은 의미로써 결국 깨닫고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들은 깨달음을 곧 구원으로 연결함으로써 영지주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자가 복음을 들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며 깨달음 자체가 믿음의 전부가 될 수 없고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깨달음이 곧 구원을 얻은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사람이 육적 생일을 기억하는 것처럼 영적 생일, 즉 구원받은 날과 시간을 기억해야 구원을 받은 증거라고 말하고,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최근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들에게는 ‘10단계 질문서’라는 것이 있다. 이 질문서를 보면 구원파가 구원문제에 대해 무엇을 주장하는지와 교인들이 미혹될 수 있는 함정의 핵심이 숨어 있다.
①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믿습니까? ②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③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심을 믿습니까? ④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하십니까? ⑤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⑥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⑦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은 아닙니까? ⑧ 구원 받은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⑨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⑩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서에 나타난 문제는 무엇일까? 교리적인 오류를 찾고자 한다면 아마 찾기가 애매할 것이다.
구원파의 10단계 질문서를 보면 질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라면 다만 자신의 신앙생활이 성실하지 못하다는 판단아래 ‘예’라고 확신 있게 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다고 여길 것이다.
구원파가 의도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들의 질문에 확실하게 답을 하지 못하는 약점을 파고들어 확신이 없는 것이 곧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에게 오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있다고 미혹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존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빈번하자 교회는 이 같은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10단계 질문서에서 나타난 성경적인 문제는 질문 자체가 의도하는 것처럼 인간 구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에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현대 교회도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신자가 구원에 관심을 두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신자가 구원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믿음의 목적을 자기 구원에 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 역시 믿음의 목적을 오직 자기 구원과 현재의 복에 두고 있기에 구원파의 질문서에 담긴 성경적인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만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하지 못하는 것을 기독교인의 나약함으로 여기며 구원 받았으니 그러한 질문을 받아도 자신 있게 ‘예’라고 하면 된다는 교육을 통해서 자기 교인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믿음의 목적을 구원에 두게 되면 자신이 구원받을만한가를 자신에게서 찾게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성실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이런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과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 예수님은 언약의 성취자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했다. 이처럼 언약을 성취하시고 택하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아들에게 저주를 담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곧 구원의 확신이다.
다시 말해서 구권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구원 여부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은혜와 사랑에 머물고 있는가에 모든 관심을 두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의 사건이다. 따라서 신자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은총을 높이는 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자기 구원에 집착하게 되면 이 같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구원의 여부에 모든 초점을 두게 된다. 그래서 회개도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여기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자에게 회개는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회개를 죄를 씻기 위한 것으로 여긴다. 때문에 회개해서 죄가 씻어지고 구원 받은 사람이 또 다시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부인하는 것이기에 구원 받지 못한 자가 된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이것이 박옥수가 주장하는 ‘거듭남 죄 사함의 비밀’의 주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신자는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아 죄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은 죄 사함을 주장하는 그들도 여전히 육신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육신으로든 마음으로든 죄를 범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구원 받은 자에게는 회개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는가이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특히 박옥수의 구원론은 다른 구원파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권신찬과 이요한 계열의 구원론은 헬라적 이원론을 따르고 있는 반면에 박옥수의 구원론은 거듭난 사람은 무조건 모든 죄가 없어졌다는 것으로 매우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된 것을 우리를 죄 없는 자로 여기시고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 있는 본래의 악한 죄성이 모두 사라졌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악한 죄성으로 인해 맺어지는 죄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며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박옥수는 죄성의 문제는 무시해 버린 채 ‘모든 죄가 없어졌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없어졌고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 현재의 죄의 문제는 물론이고 미래에 짓는 죄의 문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으로 인해 용서가 된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미래의 죄까지 이미 없어졌는데 회개 한다면 죄 사함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이고 구원을 알지 못한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분명 인간을 죄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게 할 수 있다. 비록 지금 죄를 범한다고 해도 애통해할 필요가 없다. 애통해 하는 것이 오히려 용서의 은혜를 믿지 않는 것이 된다.
사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용서하셨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주장도 맞는 것처럼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박옥수의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가르침을 좇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원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잘못됨은 무엇일까? 회개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인가? 물론 회개가 필요 없다는 것은 분명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회개를 해야 죄를 용서 하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즉 회개와 무관하게 신자는 이미 죄 용서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회개가 필요 없다는 말도 일리는 있지 않은가?
이들의 주장에서 우리가 간과해 버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구원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 사함 또한 구원용이 아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인간의 구원에 집착함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죄 사함, 회개 이 모두를 인간의 구원에 목적을 두고 행해진 것으로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았기 때문에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회개를 오해하고 있다. 이들은 회개를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용서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하지만 회개는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다.
천국은 예수님의 용서를 아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데, 용서를 안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죄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신자는 늘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죄를 보면서 예수님의 용서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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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수는 그의 책에서 “성경은 구석구석마다, 부분 부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씻었으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느냐 하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에 눌려 그 마음이 고통을 겪고 있으며,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노아는 의인이요. p126)고 말한다.
이 내용만을 보면 박옥수는 성경을 그리스도의 보혈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달으면 죄에 눌린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의 말도 지극히 복음적인 내용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구원 받은 신자가 또 다시 자기의 죄를 돌아보고 근심하고 회개 한다면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구원에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또한 박옥수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박옥수 목사는 성경의 기록 목적은 위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 사함의 구원을 받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성경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의 구원이라는 사실은, 정통 복음주의 전도자들과 신학자들 모두 동의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과연 이 말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일까? 엡 1:7절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셔서 죄 사함의 은혜 아래 있게 하신 그 이유를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죄 사함의 은혜 아래 있게 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즉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 마땅한 나 같은 자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높이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구원 받음에 매일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죄를 보면서 죄 있는 자로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하고 십자가의 용서를 알고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늘 죄 가운데 있음을 절감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죄를 보지 않고 죄 사함의 은혜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죄가 없는 곳에는 죄 사함의 은혜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사함을 말하면서 다시는 죄가 없기에 회개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죄 사함을 자기 구원을 위한 도구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번 죄 사함을 받은 자가 또 다시 자기 죄를 돌아보는 것은 빠져 나온 구렁텅이로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하고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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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신자를 죄 사함의 은혜로 인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죄 사함으로 인한 구원이 그 목표가 아니라 영광의 찬송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늘 우리의 죄를 보게 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알게 함으로써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죄를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사도 바울은 롬 7:19,20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고백하면서 늘 죄에 끌려가는 자신을 두고 탄식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탄식은 탄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사망에서 건져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신자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죄를 보면서 인간의 본질인 사망이라는 자기 실체를 실감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구원 받은 신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자의 어리석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파의 구원론을 정리해 본다면, 첫째 이요한 구원파의 구원론은 헬라적 이원론 사상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분리하여 영혼만이 구원을 얻은 것이고 육체는 여전히 죄에 사로 잡혀 있기에 육체의 구원을 별도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구원을 영혼의 구원과 육신의 구원으로 구분함으로써 신자의 거듭남은 영혼의 구원일 뿐이며 육체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육신을 통제하여 복종 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요한은 ‘구원의 세 가지 의미’라는 그의 글에서 <영혼과 육신과의 싸움 중에서 육신의 세력이 강해서 육신의 세력에 사로 잡혀가는 영혼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주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은 기회만 있으면 성령을 거스리는 것이다. 육신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육신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 바울도 "내가 내 육체를 쳐서 복종시킨다."라고 했다. "종을 어려서부터 곱게 키우면 나중에는 자식인체 하리라" (잠29:21) 말씀의 종은 육신을 뜻하기도 한다. 육신을 자유롭게 두면 아니 되며 육신은 엄히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요한이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은 사도 바울의 말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가령 갈 5:17절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이요한은 이 구절을 육체와 영을 구분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육체와 영은 서로 거스르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영으로 육체를 통제하고 다스려야 육신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육체와 영을 구분하지 않는다. 영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고 육체는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서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한 것이다.
롬 8:9절에서도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이 역시 육신과 영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것 자체를 육신으로 말하는 것이다.
권신찬의 구원관도 이요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이요한이 권신찬 구원파에서 분파되어 그 대부분이 권신찬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박옥수의 구원관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깨달음으로 이루어진다. 예수의 보혈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구원 받은 것이기 때문에 반복적 회개를 부인하는 것이다.
삶에서 나타나는 죄가 있음을 인정은 하나 박옥수는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고 범죄로 구분한다. 그래서 죄의 문제는 예수님의 보혈을 깨닫는 것으로 해결되었고, 삶에서 나타나는 범죄는 이미 예수의 용서 안에 있는 것이 신자이기에 용서를 구할 필요 없이 범죄를 인정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박옥수는 회개가 아닌 자복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우리에게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고 말한다.
신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죄를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은혜가 더할수록 신자의 감사와 찬송 또한 높아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높일 자로 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들은 또한 지금은 은혜 시대이므로 율법은 필요 없다고 한다. 구약 자체가 이미 완성된 예언이므로 더 이상 신앙생활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신자가 율법을 지켜야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애당초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일 뿐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고 행해야 할 실천을 목적으로 주시지 않았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죄를 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율법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율법을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로 말한 것이다(갈 3:24).
종말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들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 사상을 강조함으로써 신도들로 하여금 개인이 재산을 비축하는 것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기게 하여 결국 자신들의 단체에 헌금하게 하는데 힘을 쏟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되고 있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어떻게 살든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하면서 마치 칼빈주의의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 또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진리의 길로 가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한 자의 특징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구원파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깨달음을 중요시 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성경이 아니라 그들이 가르치는 구원파의 교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교리의 내용을 깨닫는 것이 곧 구원 받는 것임을 신도들에게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자는 믿음으로 인해서 깨닫게 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악함과 불의함이다. 그리고 그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믿음에 의한 깨달음은 신자로 하여금 자기 구원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에만 마음 두게 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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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서머나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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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강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