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는 셈에 참 약하다.
오늘은 출근길에 '그들만의 파업' 이후로 즐겨 타지 않던
신촌방향 버스를 타게 됐다.
이유로 놓고 보자면
어제 고보 동창 둘을 오랫만에 만나 회포를 푼 탓에
버스를 타면 늘 앉을 수 있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부족한 잠을 채우려
신촌 노선을 택하게 된 것이 그 까닭이다.
그러나 여지없다.
하필이면 즐겨 앉는 자리엔 다른 이가 앉아 있어
끝자리에 앉아 가게 되는데
초등생 학동 둘이 앉아 이러쿵 저러쿵 하다가
드디어 '구구단 놀이'로 들어갔는데 그게 과히 전투적이다.
자매로 보면 딱 좋을 일이다.
3학년이고 5학년이었으니 말이다.
주로 언니되는 이가 아우에게
구구단 중에도 3단을 내리 물어보는데 가끔은 엉뚱한 답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아우가 성이 치미는지 8단급의 물음을 던진다.
답을 모를테니 언니된 입장에선 아무렇다 하게 답을 줄 수도 있을테지만
그렇지 못하고 답 모르는 것을 그대로 표내고 만다.
'배려'일까?
아우가 몰라 답답해 했을 것을 언니된 입장에서
'나도 모를 때가 있으니' 하는 동생에 대한 그,
가끔 지인들이 내게
누구씨 전화번호 아느냐고 묻는 전화 주실 때가 있다.
꼼꼼한 탓에 이러저런 거래처들 제대로 프린트해서 다닌걸 보신 분들이 물어오는게다.
찾아보고 대답할 때가 훨씬 많으나
그런 중에도 내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 있어
바로 입대답을 할 때가 더러 있다.
가만 기억해 보면 나는 구구단을 제법 일찍이 외워 셈해냈던듯 싶다.
아주 옛시절에 하인을 부리시던 분이
일삯을 주시는데 그 때마다 일정하지 않으면서
셈해주시는데 절대 아래치로 내려 놓지 않으면서 셈해주시는걸 보고는
옆집 양반이 '뭘 그리 후하게 다스리느냐'고 물었단다.
대답은 이렇다.
'모르는듯 셈해주면 그 치들은 더 열심히 일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집 양반이 마을에서 땅이 가장 넓고 비옥한 이유가
모르는듯 셈해준데서 나온 것에 이치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셈이 약하다.
많이 있어서 베풀고 살지 못하는 삶이고
이제는 궁핍에 궁상을 떨고 있으니
셈을 내려 해도 셈을 할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부족한 잠을 채우려고 늘 타지 않던 버스를 탔는데
종국엔 내 부족한 셈 탓만 하고 말아버린 출근길이 되었다.
구구단 놀이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셈을 사는 인생이었으면
그 얼마나 행복할 일이겠는가. 하하
첫댓글 계산없이 살아 가는 인생도 괘안습니다 옆에서들 답답해 하지만 ....ㅎㅎㅎㅎ
나도 셈이 여린데..ㅎㅎㅎㅎ
아직 마르지 않은 상상력이 부럽구만. 나 같으면 "이 넘들 땜시 잠도 못자겠군!" 하고 말았을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