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거룩한 밤’ 탄생지 오스트리아 오번도르프의 크리스마스 이브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만들어진 성니콜라스 성당.
1971년 12월의 어느날, 서울 변두리 한 초등학교의 교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님께 운동장으로 나가 눈싸움을 하자고 조른다. 하지만 허름한 풍금 앞에 앉은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성가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선생님은 이 노래가 만들어진 유래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한다. 아이들은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에 금세 빠져든다. 지금의 교육 현장과는 사뭇 다른 1970년대 초등학교 교실의 풍경이다. 그 학생들 가운데 유독 선생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나중에 꼭 그 마을을 가봐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다.
시간은 흘러 1993년, 당시 나는 한 항공사의 기내지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그 항공사는 세계 곳곳의 주요 도시에 대부분 취항하고 있었기에 기획의도만 좋다면 어디든지 취재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항상 새로운 취재 아이템을 찾기 위해 머리를 짜내야 했다. 뭔가 좀 색다른 아이템은 없을까. 유럽까지 가는 비행기 안에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여행 기사는 없을까. 그 여행지가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라면 더욱 좋을 텐데. 그때 나는 불현듯 어린 시절에 배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이왕이면 노래가 만들어진 12월 24일의 풍경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랴부랴 12월 20일에 출발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취재한 후 12월 24일 오번도르프(Oberndorf)에 도착하는 일정을 만들었다. 오번도르프 취재를 마친 후에는 이문열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그라츠를 들른 후 1월 1일 비엔나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일정까지 포함시켰다. 취재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항공권과 숙박, 현지교통편 등이 모두 확정되었다. 나의 오번도르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특히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음악의 도시 잘츠부르크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본래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차분하고 경건하게 보낸다. 12월 초에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느라 조금 분주할 뿐, 정작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미리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에서 온 가족이 함께 단란한 저녁 식사를 즐긴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아 스키장이 있는 휴양지로 온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잘츠부르크 시내 번화가는 다른 때에 비해 오히려 적막감이 감돌 정도로 한산하다. 이와는 반대로 잘츠부르크 근교의 작은 마을인 오번도르프는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여행자들로 매우 붐빈다. 이곳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가곡 가운데 하나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탄생 배경
지금으로부터 198년 전인 1818년 12월 24일, 오번도르프에 있는 ‘성니콜라스 성당’의 신부였던 요제프 모어(Joseph Mohr·1792~1848)와 이웃 마을인 안스도르프의 교사였던 프란츠 그루버(Franz Gruber·1787~1863)에 의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탄생했다. 당시 26세의 젊은 신부였던 요제프 모어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작사하게 된 것은 그해 여름 홍수 때 물에 잠겨 못 쓰게 된 오르간 때문이었다. 오르간으로 연주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든 기존의 찬송가 대신에, 기타로 연주 가능한 새로운 노래를 급히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의지가 세계적인 명곡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제프 모어 신부에게는 다행히 예전에 써놓은 시 한 편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쓴 시에다 곡을 붙이는 일을 프란츠 그루버에게 부탁했다. 요제프 모어의 부탁을 받은 프란츠 그루버는 아름다운 가사에 반해 금세 곡을 붙이게 되었다. 프란츠 그루버는 안스도르프 성당의 성가대 지휘자이면서 오르간 연주자였기에 어느 정도의 음악적 재능은 갖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가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성니콜라스 성당의 1818년 12월 24일 자정미사 때 첫선을 보였다.
그러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한동안 고요하게(?) 묻혀 있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1825년에 오르간 제작자인 칼 마우라커(Carl Mauracher)는 성니콜라스 성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오르간 옆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악보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악보를 베껴 자신이 살고 있는 티롤로 가져갔다. 당시 티롤에는 ‘스트라서 어린이합창단’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해외 공연을 자주 다니던 이 어린이합창단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다. 마침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독일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점차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영어로는 존 프리먼 영(John Freeman Young) 주교에 의해 1859년 처음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감리교에서 1895년에 발행한 찬미가를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31년에 신정 찬송가로 더욱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당시 본래 가사의 한 소절인 ‘조용하고 환한 밤’이 ‘어둠에 묻힌 밤’으로 번역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현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b>1</b> 성당 입구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연주하는 연주자들.<br><b>2</b> 12월 24일에 운행되는 크리스마스 특별열차.<br><b>3</b> 성니콜라스 성당 옆에 있는 작은 우체국.<br><b>4</b> 모어 신부와 그루버 교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성당 내부.
1 성당 입구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연주하는 연주자들.
2 12월 24일에 운행되는 크리스마스 특별열차.
3 성니콜라스 성당 옆에 있는 작은 우체국.
4 모어 신부와 그루버 교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성당 내부.
오번도르프의 상징 ‘성니콜라스 성당’
잘츠부르크에서 북쪽으로 20㎞쯤 떨어져 있는 오번도르프는 잘자흐강을 끼고 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작은 마을이다. 오번도르프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독일의 라우펜 마을이다. 정말 그림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게다가 오번도르프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만들어진 곳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여행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명소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여행 관련 서적이나 웬만한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작은 마을이다. 우리에겐 아직 낯선 곳일 수밖에 없다.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도시를 방문하는 여행 프로그램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니콜라스 성당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성당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마을을 지키는 작은 망루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지금의 성당이 요제프 모어 신부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만들었던 당시의 성당은 아니다. 1800년대 후반에 잘자흐강의 범람으로 인해 지반이 침하되면서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성당은 1924년에 완공되었다. 그해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본래는 1918년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해야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여파로 미뤄진 것이다. 당시 기념행사에서는 프란츠 그루버의 손자인 팰릭스 그루버가 요제프 모어가 사용했던 기타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연주하기도 했다. 1937년에는 요제프 모어 신부와 프란츠 그루버 교사를 기억하기 위해 ‘고요한 밤 성당(Stille Nacht Kapelle)’이라는 별명도 붙였다.
성니콜라스 성당 옆에는 기념품 판매장과 자그마한 우체국이 있다. 우체국 안에는 여행자들이 간단하게 편지나 엽서를 쓸 수 있는 책상도 마련되어 있다.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오번도르프에서의 감동’을 전하려는 여행자들로 하루 종일 붐비는 곳이다. 우체국 한 모퉁이에서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는 그가 소년 시절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처음 배우면서 가졌던 꿈과 희망을 엿볼 수 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특별열차’ 운행
12월 24일 오후에는 잘츠부르크~안스도르프 구간에 크리스마스 특별열차가 운행된다. 통나무집을 연상시키는 기차 객실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있고 오스트리아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객실을 돌아다니며 와인을 따라준다. 안스도르프에서 오번도르프까지는 마을길을 따라 약 20분 동안 걸어서 이동한다. 198년 전에 요제프 모어와 프란츠 그루버 교사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성니콜라스 성당에서는 지금도 198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성당 내부의 조그만 창문에는 요제프 모어 신부와 프란츠 그루버의 모습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 해마다 12월 24일이 되면 이곳 성니콜라스 성당에서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모인 가운데 경건한 기념미사가 열린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크리스마스 기간 중 12월 24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심지어 12월 24일 이전에는 라디오방송에서조차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선곡하지 않을 정도다.
오번도르프에 해가 지면 성니콜라스 성당 앞의 키 큰 가문비나무는 근사한 크리스마스 트리로 변한다. 성당 입구에서는 오스트리아 전통의상을 입은 청년들이 아름다운 성가곡을 연주한다. 기념미사는 늦은 밤까지 계속된다. 마지막은 성니콜라스 성당을 찾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좁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은 성당을 둘러싼 채 저마다의 언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합창한다.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없을지도 모를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은 성탄절 이브 입니다. 부디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빕니다. Merry Chri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