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페르디난드 셀린 (1894-1961)
본명은 루이 페르디낭 데투슈(Louis-Ferdinand Destouches). 1894년 5월 27일 쿠르브부아에서 태어났다. 루이 데투슈는 파리의 파사주 쇼아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루부아 소공원과 아르장퇴이 가에 인접한 공립학교 및 튈르리 가의 생조제프 학교에 다녔다.
그의 생애를 프랑스 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소개하면서 성애를 거의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기억하게 되는 것은 전쟁에 대한 기억이다. 이렇듯 프랑스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은 기이하게도 나치에게 협력하고 유태인을 배척한 작가라는 노란 낙인과 함께 늘 거론되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가려 그렇게 전쟁의 아픈 상처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작가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그 전쟁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한 많은 프랑스 사람들의 심정적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 자신 스스로 용서받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또는 용서받을 일은 아예 없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루이 데뚜슈는 1894년 파리 근교의 꾸르브와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다(나중에 의사 생활을 하고 글을 쓰게 되면서 필명으로 사용하는 셀린느라는 이름은 그의 외할머니에게서 따온 것이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외아들이라서 그런지 부모의 각별한 보호와 사랑 속에 유년 시절을 보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1914년 1차대전 중에 지원 입대를 한다. 기병대원으로 참전 중에 중상을 입고 퇴역을 한다. 그리고 렌느에서 의사수업을 하면서 1919년에 렌느의 의과대학장이 될 폴레 교수의 딸 에디트와 결혼을 한다. 1924년에는 「필립 이냐스 셈멜바이스의 삶과 작품」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결국 문학적인 이 학위논문은 셀린느 자신이 자신의 첫 소설 작품으로 꼽고 있을 정도이다. 곧, 의사소설이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1924년부터 셀린느는 의사와 작가라는 직업을 동시에 병행했다는말이다.
그리고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독일, 덴마크, 영국 등지를 거의 맹목적으로 떠돌며 의료활동을 한다. 이때의 부침(浮沈)이 많았던, 떠도는 삶이 곧 셀린느의 미래의 삶과 그 여정을 예고해주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여행으로 보고 그 끝없는 항해를 시도한 작가 셀린느는 실제로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생활을 한 것이다. 곧 그의 삶의 이정표는 그가 작품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뿌리 내릴 곳은 밤의 끝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가능한 여행이었다.
그 뒤 1928년에 귀국한 셀린느는 파리 근교 끌리쉬에서 역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의사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낮에는 의료활동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생활을 하면서 1932년에 문제의 작품「밤의 끝으로의 여행(Voyage aubout de la nuit)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발표되자 곧 문단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우선 이 작품에서는 이제까지 그 어떤 소설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비어와 속어 등이 그대로 여과 없이 문학언어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언어의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혁명적 문체와 사회 통념을 무시한 충격적 내용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작품은 문단에서 문제성 있는 작품으로 주목을 끌었지만, 처음으로 문학상 수상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작품이라는 점이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발표된 그 해에 콩쿠르 상의 수상작으로 거론되어 수상이 확실히 되었으나 결국 많은 논쟁 끝에 거부당하고 만다. 그러나 그 뒤 르노도 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랑스 문학에서 셀린느의 등장은 이른바 졸라 성향의 사실주의적인 문학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문단에 주된 기류를 이루고 있던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그도 역시 1차 대전이라는 전쟁을 겪고 그것이 그의 소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양이 되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은 그 이전의 그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그 뒤에 등장하게 될 수많은 미래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이른바 문학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20세기의 위대한 지성으로 회자되는 실존주의 작가 시몬느드 보브와르는 이 작품이 식민지 정책과 인간의 상투어구, 사회를 신랄하게 공격함으로써 앙드레 지드와 알랭과 발레리와 같은 작가들의 대리석처럼 차디찬 문장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사르트르도 또한 셀린느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첫 작품으로 세계 문단의 주목을 끌게 된 셀린느의 1936년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이라고 한 소설「외상죽음」을 발표하여, 또 한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소설「죄의 고백」이나 반유태인적 성향이 농후한「벌레 같은 놈 없애버려라」, 친독일적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궁지」등을 발표함으로써 반역적 작가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셀린느는 덴마크로 망명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1944년 셀린느는 가족과 함께 독일군의 화물차를 타고 프랑스를 떠나 베를린으로 피신했다. 1945년 덴마크로 망명하지만 코펜하겐에서 전범자로 몰려 체포, 투옥되었다. 그리고 1950년 파리 법정은 셀린느에 대해 대독협력 전범자로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1년, 벌금 5만 프랑, 국적 박탈, 재산 몰수 판결을 내렸다.
공산주의 작가들은 셀린느의 사형을 요구할 정도로 그에 대해 극도의 적의를 나타내었다. 그 뒤 특사로 풀려난 셀린느는 1951년 프랑스로 귀국하는데, 그의 귀국은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53년 파리 근교의 뫼동(Meudon)에서 개업하고, 계속해서 그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망명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소설「이 성에서 저 성으로(D'un chateau a l'autre)」(1957년 출판)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셀린느의 문학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을 일게 하였다. 또한 영국과 미국과 독일 등 세계 문단에서도 그의 작품을 전후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셀린느는 그가 살고 작품을 썼던 뫼동에서 1961년 사망했다.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독창적인 주제와 혁명적인 문체로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의 문학적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성과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또한 그의 죽음과 아울러 그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와 증오도 사그라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는 아직 문학비평가들의 진정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듯하다.
그 당시 그는 시대의 조류에 무분별하게 휩쓸리거나 정치적 상황에 영합하려는 계산적인 반유태인 주의자도 아니었고, 어떤 정치적 출세를 꿈꾸는 허황된 기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그 어떤 이즘이나 신념도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철저히 반유태인주의, 반전주의, 반공산의, 반자본주의, 무정부주의적 논쟁 활동으로 좌우양진영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가두려는 이념의 사슬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서 자신만의 신념에 철저하게 복종함으로써, 그 자신의 신념의 정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투옥되었으며 끝내 그는 그 자신의 투옥에 대한 그 어떤 설명이나 해명도 더더구나 변명은 결코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침묵하고 글을 썼다. 셀린느의 생애를 전기로 출판한 프랑소와 지보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그 어떤 관례나 규범도 일단 의심했고 한 사회 질서가 내포하는 불의와 위선에 서슴지 않고 욕설을 퍼붓던 서민출신의 귀족'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를 이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로 꼽고 있다. 그런데 프루스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삶을 살았던 셀린느는 그의 뛰어난 문학성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부유하고 귀족적이고 평생 직업도 갖지 않고 칩거상태에서 품위있게 고요한 삶을 살았던 프루스트의 삶이나 문학은 이제 새롭게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