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말 60년년대 초의 이야기다. 그때는 참 어려웠었다. 초중등때 우리나라는 전 국민 중 75%가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국가라고 배웠었다. 또 경제도 무척 어려웠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장남 하나를 대학교에 보낼려면 등록때마다 황소를 한 마리씩 팔아야 했다. 그래서 대학의 건물을 상아탑(象牙塔)이라 했는데 가난한 농민들이 소를 팔아 세운 것이라 하여 우골탑(牛骨塔)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 형편이 어려운 경우 아들들은 초등학교라도 보냈으나 딸들은 이를 위해 식모나 방직공장으로 취업을 나서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1954년 대구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남자는 일곱 반, 여자는 다섯 반이었다.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여학생은 남학생의 70%에 불과하니 30%는 미취학이었던 것이다. 또 육이오 전쟁이 막 끝난 때여서 한 반의 15%는 고아원 아이들이었따. 점심을 싸올 형편이 못되는 아이들이 많아 유엔한국지원단(UNKRA)에서 지급하는 옥수수죽과 우유로 점심을 때두기가 일수였다. 이학년 때까지 학교 건물은 미군이 사용하고 있어 우리는 천막 아래서 공부를 해야 했다.)
어느 시골 양반촌의 처녀 하나가 대학까지 진학하는 오빠와 어려운 가정을 돕기 위해 서울에 있는 방직공장에 취직을 하여 몇 년이고 일을 했다. 그러다 나이가 차자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 소위 연애를 했는데 그 남자는 헌병 하사관이었다. 어쩌다 보니 둘은 결혼을 안 할수 없게 되었고 처녀는 시골 부모님께 사실을 알리자 시골 어른들은 총각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와 어른들께 먼저 인사를 시키라고 했다.
그래서 신랑감이 시골에 도착하자 반촌(양반들의 집성촌)인 이 마을에서는 조부를 비롯하여 종조부, 재종조부, 백부 등등 집안 남자어른들이 십수 명 처녀댁의 사랑방에 모여 신랑감의 인사를 반게 되었다. 집안 어른들 중 연장자 한분이 대표로 신랑감에게 물었다.
“시하(侍下) 이신가?”
이 말은 부모님이 계시느냐는 의미이다. 양 부모가 다 계실 때는 “예” 하면 되고 아버님만 계실 때는 “엄시하(嚴侍下)입니다.” 어머님만 계실 때는 “자시하(慈侍下)입니다” 조부님까지 있는 경우에은 “중시하(重侍下)입니다.”하는 것이 젊잖은 집안 자손들의 대답이어야 했다. 이 단어들은 모두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 물음의 뜻을 “씨아이(CIC 미군 소속 첩보부대)냐?”로 알아듣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헌병입니다.”
어른들은 다소 당황했으나 다시 질문을 게혹했다. “완장(阮丈)은 계시는가?”
이 말은 “백, 숙부 즉 아버지의 형제인 삼촌들은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중국 역사상 위촉오의 삼국시대가 끝나고 사마씨의 진(晉)나라때 부패한 관리를 마다하고 청담을 즐기던 일곱 선비를 죽림칠현이라 하는데 그 중 완적(阮籍)과 완함(阮咸)이라는 분이 있고 두 분은 숙질간이었다. 그래서 글께나 배운 사람들은 남의 삼촌을 완장(阮丈), 조카를 함씨(咸氏)라고 했다. 이 또란 네이버 어학사전에도 나와 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신랑감은 신분의 표시로 팔에 차는 완장(腕章)에 대하여 묻는 줄 알고 “예, 뒷포켓에 있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하며 뒷주머니에서 완장(腕章)을 꺼내 보였다. 한자교육이 중단되고 유교적 풍속이 많이 사라져간 지금 세대들은 이해 못할 유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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