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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코린 2,1-5
복 음 : 루카 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개안開眼의 여정
-끊임없는 주님과의 만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아침 성무일도시 아름다운 찬미가 2-3절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세상의 참된 새벽별/그 빛은 다가오는 태양 알리니
주님은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잗다란 아침 별빛 아니오이다
밝기는 태양보다 더 하옵시고/주야로 한낮같이 빛나시오니
우리 맘 깊은 곳도 밝혀 주시고/은밀한 생각까지 알고계시네.”
밤 일찍 일어나 문밖을 나서니 찬바람이 스치듯 지나가고
요즘 몇 해 동안 듣지 못했던 청아淸雅한 풀벌레 소리들을 듣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라본 맑은 별빛 가득한 하늘이었습니다.
아, 가을이 온 것입니다. 코로나19사태로 사람들이 좀 조용해지니 자연이, 지구가 살아난 듯합니다.
내일부터는 9월 순교자 성월로 본격적 기도의 계절로 진입합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참으로 주님과 깊이의 만남을 추구할 때입니다.
새벽 인터넷 뉴스 중 정은경 방대본부장의 국민을 향한 간절한 호소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코로나19 시대에 연대하는 방법은
모두가 흩어지는 것이며 사람 간 거리를 두는 것이다.
사람 간의 접촉을 줄이는 것 이외에 지금의 유행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심정으로 앞으로 한주 간은 단단한 연대와 협력으로
모임 자제와 거리두기 참여를 통해 지금의 위기국면을 전환하는 데 함께 해주실 것을 요청 드린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와는 정반대 현실입니다.
‘모이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역설적 코로나19시대입니다.
흩어짐의 고독의 깊이와 함께 하는 연대입니다.
그러니 종파를 초월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삶의 깊이를 추구하며 마음으로의 연대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삶의 깊이를 상실해 가는 시대, 참으로 내적, 영적 삶의 깊이를 회복해야 할 절호絶好의 시절입니다.
반가운 카톡 메시지 둘을 소개합니다.
“당분간 집에만 계세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최대한 집콕입니다.”
“신부님, 세상이 참 어수선합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누리던 것들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믿음이 있어 삼망에 빠지지 않고 하루하루 인내를 배우며 기쁘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三望이 아닌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三感의 삶을, ‘상쾌, 유쾌, 통쾌’의 삼쾌三快의 삶을,
‘진실, 성실, 절실’의 삼실三實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진선미眞善美의 삶을 추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답은 참으로 좋으신 분,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날로 삶의 깊이를 더해가는 길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는 예수님’을 만나고,
제1독서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를 만납니다.
두 분 다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을 만나 눈이 활짝 열린 분들입니다.
광야피정 중 참으로 홀로의 고독 중에 삶의 깊이에서 하느님과 세상에 연대하셨던
예수님의 진가가 오늘 복음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라는 말마디에서
한 결 같이 평범한 영적 삶의 일과에 충실하셨던 정주定住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통해 눈이 활짝 열려 자신의 신원을 깨달은 주님이십니다.
흡사 예수님의 출사표出師表처럼, 오도송悟道頌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는 모두가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복음의 진수입니다. 예수님의 전 삶을 요약합니다.
이런 예수님과 함께하는 ‘개안의 여정’중의 복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개안의 여정 중에 삶은 나날이 깊어지고
심화되는 깨달음과 더불어 눈은 나날이 밝어져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비로소 무지의 치유에 무지로부터 해방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는
주님의 은총의 말씀에 저절로 경탄敬歎하게 됩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편견의 무지로 반신반의하지만 우리는 전폭적으로 주님을 믿습니다.
무지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 위해를 가하지만 예수님의 행보는 자유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표표漂漂히 떠나는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대자유인, 참 멋진 예수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을 찾는 이들과 개안의 여정을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오늘의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이 키워드입니다.
코로나19를 퇴치할 궁극의 힘도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이에 앞서 우리 모두의 기도가, 협력과 연대가 필수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과 만남을 통한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이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상 모든 이들과 주님 안에서 하나로 연대하여 날마다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남양주시 불암산 기슭에 위치한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수도 가족들입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제가 당신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종일 그 가르침을 묵상하나이다.”(시편31,20;119,97).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사람이 몸이 너무 아파서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의 한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아 그대로 하면
어떤 병이든 낫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사람 역시 이 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았고 처방전을 받았습니다.
이 처방전에는 몇 가지 열매와 허브, 그리고 플레인 요구르트가 적혀 있었습니다.
위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해서 낸 처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환자는 처방전에 적혀 있는 것을 따라 먹은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서 계속 처방전만 꼼꼼하게 읽기만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병이 더 심각해져서 용하다는 이 한의사도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의 병이 낫는 방법은 그저 처방전만 읽는 것이 아니라, 처방전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성경만 읽는다고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까요?
그저 성당에 나가서 미사에 참석하면서 미사를 주례하는 신부님 얼굴만 본다고 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까요? 이런 식으로 보기만 해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서 우리 구원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 말씀을 따라야 하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저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다 함께 기뻐할 일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오히려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고,
고향 사람들은 어떤 하느님의 은총도 체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그저 예수님을 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쫓아내면서 자기들에게 다가온 은총 자체를 걷어차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혹시 보고만 있으면서 주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은총을
나의 것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은총 속에 사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갈릴래아로 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이 자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면서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 희년선포는 ‘에덴’의 회복, 곧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래의 신원인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곧 해방을 실현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빚진 이가 탕감 받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혹은 억압과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난한 이가 기쁜 소식을 듣거나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인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보다, 무엇에로의 해방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해방이 선포되고 빛이 왔건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또한 원하시면 빠져나가십니다(요한 18,7-8).
원하지 않으실 때는 잡혀가지 않으시고, 당신이 원하실 때에는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한편,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습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주님,
제가 들은 말씀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말씀이 저를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말씀을 이루소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와 굳은 심장을 녹이소서.
이기심과 자애심에 묶인 저를 해방하소서.
제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들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작년 12월에 LA엘 다녀왔습니다.
여행사와 함께 ‘멕시코 청년 봉사활동’을 추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행사는 구체적인 일정을 기획하고, 신문사는 홍보를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멕시코에서 선교하는 신부님과도 협의를 하였습니다.
청년들은 노력봉사도 하고, 영어도 가르치기로 했었습니다.
아쉽게도 코로나19로 모든 일정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당시 오랫동안 한국학교에서 봉사하셨던 형제님을 만났고,
형제님께서는 순례 중에 쓰신 ‘산티아고 순례길 따라 2,000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시고, 통일에 대한 관심도 많으시고, 시인이신 형제님이십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가지는 못했지만 형제님의 글을 통해서 순례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형제님께서 문단에 내신 시(詩)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산이 좋아, 나는 길 따라 올라가는데
물은 산을 버리고 떠나는구나.
한세월 더불어 살다보면 싫증날 때도 있겠지
버리고 떠나는 저 길이 그리움의 시작인 줄을
세상 내려가 살다보면
산만한 친구도 없다는 것을
촐랑거리며 흐르는 저 물이 알기나 할까?
산이 좋아 오늘도
나는 산길을 올라가는데”
형제님의 글은 신문에 나왔다고 합니다.
어느 날, 형제님에게 메일이 한 통 왔다고 합니다. 감사의 글이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갈등이 심해서 헤어지려고 했는데 신문에 나온 시를 읽었고,
남편과 계속 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말썽을 부리고, 불평과 불만이 많은 자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도 나중에 너 같은 자식을 낳아 보면 지금 내 심정을 이해할거다.’
물의 속성이 늘 어딘가로 흐르는 것이듯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도 늘 어딘가를 향하여 나가려고 합니다.
영어의 ‘Animal’을 우리는 동물(動物)이라고 부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고,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물이 산에서 흘러나왔듯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언젠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도 흘러간다고 표현합니다.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고, 지금 내가 걸어가는 길이 미래 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채워 넣은 것이 국가이면 역사가 됩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채워 넣은 것이 신앙이면 교회사가 됩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채워 넣은 것이 나의 삶이면 그것이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이렇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가거든,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
지금 너의 발걸음이 뒷사람들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성공, 명예, 재물, 권력’을 채우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나눔, 희생, 겸손, 친절’을 채우려고 할 것입니다.
2020년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도 한국을 떠나온 지 1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채우려고 하기 보다는 제가 원하는 것을 채우려 한 적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이지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새롭게 신발 끈을 매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순교자의 달, 9월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4,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우리 마음에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말씀이
길을 열어준다.
말씀이
우리의 결핍을 채워준다.
오늘을
되살리는 말씀의 힘이다.
오늘의 빛은
말씀의 빛이다.
오늘은
말씀이 열매를
맺어야 할 오늘이다.
나와 너
사람과 사람 사이
말씀이 이루어진다.
말씀을 통해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할지를 듣게 된다.
오늘을
오늘답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과 오늘은
하나이다.
생명의 모습은
말씀의 모습이다.
우리의 오늘을
하느님께
올려놓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처럼
말씀 따라
오늘을 살고 싶다.
왕이 '된' 사람은 모든 이를 왕으로 대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미국에서 요즘 인종차별에 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5월 흑인 남성의 체포 과정 중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조지 플로이드가 질식사하였고,
며칠 전에는 세 아이가 보는 앞에서 제이컵 블레이크가
경찰이 쏜 총 7발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블레이크는 비무장 상태였고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가 유학할 때도 유럽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중국 사람이라고 하면서 차별을 할 때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러며 ‘나도 중국 사람을 차별하는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월드컵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겼을 때는 정말 조심해야 했습니다.
독일에 갔을 때는 어떤 사람이 어깨로 일부러 치면서 하이! 히틀러!를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한국 사람들도 인종차별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끼리 흑인을 지칭할 때는 ‘검둥이’, 혹은 ‘연탄’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백인들을 대할 때는 자세가 아주 달랐습니다.
이런 인종차별은 어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어떤 필리핀 사람이 부자 동네 벽에다 인종차별을 하지 말라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마을 주민 부부가 이렇게 묻습니다.
“여기가 당신 집인가요?”
필리핀 남성은 그건 왜 묻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사유 재산이거든요.”
부부는 화장품 회사의 경영자였습니다.
그리고 낙서를 하는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부촌 퍼시픽 하이츠였습니다.
한 필리핀 남성이 자신의 자랑스러운 동네 벽에다 그런 낙서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낙서하든 뭘 하든 당신 맘인데 여기에 이렇게 하는 건 안 돼요.”
필리핀 남성이 말합니다.
“만약 내가 여기에 살거나, 이것이 나의 사유 재산이라면 문제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내가 여기 살거나 여기가 내 사유 재산인지 당신은 모르고요.
당신들이 여기에 살고 있군요, 그렇죠?”
여자가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렇진 않지만, 여기에 누가 사는지 알기 때문이에요.”
상당히 부잣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필리핀 남성이 말합니다.
“그럼, 여기 사는 사람한테 전화하든가 경찰한테 신고하세요.
당신이 나를 범죄자 취급하니까요.”
그러자 여자는 진짜로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왔다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냥 갑니다.
벽에 글씨를 쓰고 있던 남자는 그 집에서 18년째 살고 있던 필리핀 출신 제임스 후아닐로 씨였습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반대 움직임에 동참하고자 자신의 집 담벼락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글을 쓴 것입니다.
백인 부자 동네에 아시아계 황인종이 살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 때문에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페이스라는 소규모 화장품 회사 CEO였던 리사 알렉산더는
‘인종차별’이라는 거센 비난에 회사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도 닫아야 했습니다.
차별의 원인은 ‘선입견’입니다. 그런데 그 선입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교만함’에서 옵니다.
자신이 그러한 위치에 있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백인으로 태어난 것이, 한국에 태어난 것이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나자렛에서 박해를 받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30년 동안 보아오던 예수님께서 메시아일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 선입견은 그들의 생각이 옳다는 교만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에겐 이 교만을 꺾을 수 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교만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서 나오기에 믿음만이 치료약입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광해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광대를 왕으로 앉힙니다.
광해는 그동안 사람들을 깔보는 권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양귀비에 중독되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천민인 하선은 오랜 시간 왕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하다 보니 자신이 정말 왕처럼 느껴졌습니다.
왕이 된 천민 출신 하선은 억울하게 갇혀 있는 사람이나
빚에 팔려서 무수리가 된 사람들에게 다정히 대해줍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 같은 사람도 왕이 될 수 있다면, 당신들도 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왕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나 있어서 그렇게 된 줄 압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가질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사람도 귀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유는 잘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차별과 편견은 교만에서 오는 것이고 그 교만은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열등감에서 옵니다.
열등감이 자존심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교만입니다.
참다운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 안에서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보고 존중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목마르다”라고 말하는 한 노숙자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도 믿기만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믿기만 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왕이 되었다면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누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나자렛으로 가시어, (루카 4, 16)
권 루카스 수녀
나지렛 사람들처럼......
알게 되어
구원받는 이가 있고,
아는 것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지는 이가 있는데
이는 보기 때문에
오히려 보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고
듣기 때문에
듣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아
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진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보고, 듣고, 아는 것이
애석하게도
해로운 것이겠다.
나자렛 사람들 처럼......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