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노씨(谷山 盧氏)
본관(本貫): 곡산(谷山) 시조(始祖): 노원(盧垣) 유래(由來): 곡산 노씨(谷山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 : 한림학사)의 아홉째 아들 노 원(盧垣)이 고려 초기에 입사(入仕)하여 곡산백(谷山伯)에 봉해지고, 그의 후손 조(兆)가 충숙왕(忠肅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곡산(谷山)으로 삼아 원(垣)을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조(兆)를 일세조(一世祖)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노인철(盧仁哲) 3세손 인철(仁哲)이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을 역임했다.
노중례(盧重禮) 인철의 손자 중례(重禮)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다.
노경린(盧慶麟) 1516(중종 11)∼156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 아버지는 사과 ( 司果 ) 적(積)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내금위 ( 內禁衛 ) 중(重)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박사를 거쳐 공조·예조·호조·형조의 낭관 ( 郎官 )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에 올랐으나 진복창 ( 陳復昌 )의 탄핵을 받아 좌천되어 나주목사·성주목사 등을 지냈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숭상하여 천곡서원 ( 川谷書院 )을 세웠다. 1557년(명종 12)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았다. 만년에는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1564년 가자(加資)되었다.
노오(盧澳) 내금위장(內禁衛將)
노진 판관(判官)
노발(盧潑) 감찰(監察)
노극제(盧克悌) 훈련원정(訓鍊院正)
노극겸(盧克謙) 부사과(副司果)
노성린(盧成鱗) 성린(成鱗)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노병준(盧秉俊), 노우현(盧禹鉉) 도정(都正)을 지냄.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1985년 인구조사 결과 남한(南韓)에 총 1,704가구, 7,4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출처 http://www.andongkwon.pe.kr/coding/sub8/sub1.asp?bseq [출처] 곡산노씨(谷山 盧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