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정병경.
ㅡ씨앗을 보며ㅡ
농부는 아무리 가난해도 봄에 뿌릴 씨앗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종자는 대를 이어가는 근원이기에 신神으로 여긴다. 무수한 미물에게 생명을 이어주는 씨앗에 대한 고마움을 항상 잊지 않는다.
국가에서 해마다 종묘와 사직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사직은 식물을 키워주는 토지신과 곡식신에 대한 예를 올리는 제단이다. 제단에서 임금이 제사를 지내며 백성이 굶지 않게 해달라고 빈다. 백성은 먹는 걸 하늘로 여긴다는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되새겨 본다.
씨앗은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 경남 함안에서 최근 발견된 '아라연꽃' 씨앗이 고려 때의 것으로 단정한다. 무려 7백여 년이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니 기다림에 대한 씨앗의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발화에 성공해 꽃을 피웠다고 하니 축하할 일이다. 연꽃이 보고 싶기도 하지만 신비로울 따름이다. 이보다 더 오래 전인 1200년이나 된 통일 신라시대의 연꽃 씨앗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신비롭다. 씨앗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앙받아야 한다.
씨앗은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면역력과 폭발력이 있기에 어떤 기후에서도 견디는 인내력을 지니고 있다. 오곡은 식물의 종자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지만 제대로 익지 않으면 잡초만도 못하다五穀者, 種之美者也. 苟爲不熟, 不如荑稗(오곡자, 종지미자야 구위불숙 불여제패). 맹자 고자장구편이다. 쭉정이 씨앗을 두고 한 말이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가치를 종자의 일원으로 평가하기에 의미심장하다.
씨앗은 절대 교만하지 않고 조급하지도 않는다. 작은 거인이다. 큰 씨앗은 먹지 않는다고 이르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새삼 새겨본다. 알이 찬 열매는 씨앗으로 남기라는 뜻이다. 씨앗은 폭발력 뿐만 아니라 정직, 어짊 등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경북 울진에 수령 600년 소나무가 능선에 버티고 서있다. 해마다 떨군 5밀리 크기의 솔방울 씨앗을 한 번 더 눈여겨 보게 된다.
윤선도의 오우가 중 소나무 시 한 수 펼친다.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
구천에 뿌리 곧은 줄
글로 하여 아노라."
봄이면 송화 가루가 천지를 덮는다. 다식을 만들어 먹던 시절이 어른거린다.
삶이 풍요롭다고 해서 먹는 것을 천하게 여기지 않는다. 과식으로 인해 병을 얻어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시대다. 음식은 식탐자에게 무언의 경고를 준다. 음식도 약처럼 근원이 같기에 약식동원藥食同源으로 칭한다. 폭발력 있는 씨앗이 가미된 음식은 홍수를 이룬다. 양식 덕분에 매일 수만보를 걸으며 씩씩하게 다닌다. 대단한 위력을 지닌 씨앗에 감사하며 지낸다.
후대를 이어가는 원천인 씨앗의 소중함은 어느 보화에도 비교할 비가 아닌 보석으로 여긴다. 과일 야채 등 개인이 씨를 받지 못하는 씨앗이 늘비하다. 독과점으로 등록해 씨앗을 팔아 많은 이득을 챙기는 시대다. 막대한 돈을 주고 해외에서 종자를 사와야 하는 사태에 직면해 있다.
종자 기업화 시대의 변화로 여긴다. 씨앗도 무기의 일부로 치부된다.
가을에 거둔 곡식은 대부분 먹는데 소비하고 튼실한 것을 씨앗으로 남긴 시절은 과거 얘기다. 유전자가 좋아 보여서 봄에 심었는데 수확을 거두지 못해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농업 기술 발달로 영양가와 생산량이 많은 종자를 개발하고 있어 농민의 손을 덜고 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소설의 원작자가 남긴 말이다. "사과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 많은 후손을 남기고 싶은 씨앗은 하늘의 뜻으로 돌려야 한다. 햇빛과 바람, 물의 조화로움에 따라 수확은 달라진다. 70억 명을 먹여 살리는 씨앗은 인간 세상에 은혜로운 존재다. 수많은 종류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기 위해 여전히 지혜를 발휘하며 숙성 중이다.
2023.06.20.
첫댓글 씨앗이 때를 기다리는 지혜, 공감합니다.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고 흔적 남기고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