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별장과 김일성별장 사이에 이기붕 별장이 있다.
바다를 등지고 좌측은 화진포 성, 우측으로 돌아가면 보이는 부드러운 U자형 돌집이다.
단순하면서도 독특하게 단아하다.
빨간 지붕 단층 돌집을 담쟁이가 덮었고, 지붕 위로 멋지게 자란 해송이 소박한 집에 분위기를 더한다.
이기붕별장
돌로 지어진 단층건물이 아담하고 소박하다
소나무 숲과 호수로 이어져 풍치가 빼어나다
집주변엔 송림이, 정면에는 화진포 호수, 뒤뜰에서 멀지않은 곳엔 화진포 해수욕장이 자리한다.
별장은 작고 아담하면서 주변송림과 잘 어울린다. 호수와 바다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천혜의 경관이다.
김일성. 이승만 별장처럼 언덕 위에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호수가 펼쳐져 최고의 장소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집이다.
1920년대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져 해방이후 북한 공산당의 간부 휴양소로 이용되다가
휴전이후 부통령이었던 이기봉의 처 박마리아가 소유. 개인별장으로 사용하다가 폐쇄되었다.
1999년 7월 역사안보전시관으로 개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권력이 주는 세도를 언제까지고 누리고 싶었던 한 노정치가의 비극적 인생을,
말라버린 담쟁이로 감긴 찬바람 이는 작은 별장은 확인하고 있었다.
광복 후 이승만 집권과 함께 박 마리아. 이기붕 부부는 이승만 정권의 실세로 부상했다.
1960년 4월 28일 - 4.19혁명 후-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이
'권총으로 일가를 사살하고 자살했다'고 하나 모든 책임을 이들에게 전가하기 위해 '타살'이라는 설도 있다.
역사는 때로 소설보다 긴박하고 흥미롭지만,
내 관심은 비극적 결말의 주인공 옆에 있었던 이기붕의 처 박 마리아였다.
혹자는 권력욕이 강했던 박마리아가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보냈노라 하지만,
이기붕 별장에서 만난 50년 전의 비극적 운명의 여성을 측은한 마음으로 돌아보며,
권력의 덧없음에 인생의 무상함에 가슴이 쓸렸다.
이기붕 일가
이승만대통령 내외와 이기붕가족
화진포 해수욕장의 한쪽 나즈막한 산이 병풍처럼 펼쳐있는 해안선을 따라 김일성과 이승만
그리고 이기붕별장이 있다.
휴전협정 이전엔 북한 땅이었으나 현재는 북한 땅이 바로 보이는 남한의 최북단이다.
남북의 최고 권력자가 화진포를 별장지로 한 것은 물오리 떼가 노니는 한적한 호수,
병풍처럼 호수를 감싸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기암괴석,
철새와 해당화가 장관을 이루는 끝없이 펼쳐지는 해안선과 고운 모래사장 등 천혜의 절경 때문이다.
1960년 5월 9일자 한국의 4.19혁명을 보도한 LIFE지
이승만,프란체스카,이강석,이기붕,박마리아
(사진은 이기붕의 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을 확대 강조했다)
또한 화진포는 남녘 땅에서 외국인 휴양소가 처음 들어선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외국인 휴양촌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선 곳은 함경도 원산의 명사십리 해변이다.
명사십리 해변은 조선시대부터 최고의 바다 경관을 지닌 곳으로 꼽혀 왔다.
일제가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며 원산의 외국인 휴양촌을 이곳으로 옮겼다.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 등이 한때 이곳을 휴양지로 삼은 점을 근거로
남한에서 바다 경관은 화진포가 으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화진포지만 한 걸음 한걸음 걸음을 옮길수록 마음은 가팔랐다.
이제 권력의 시대가 가고,
시절이 좋아져 우리 모두 이곳을 즐길 수 있게 되었 듯... 머지않아 통일도 그렇게 올 수 있을까 ?
사람은 가고 이제 그 자취만 남았다.
짧은 겨울 해 끝에 서둘러 호텔로 발길을 돌리면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내리는 겨울 화진포는,
이념과 체제가 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사랑으로 역설하며,
아는 듯 모르는 듯 오늘도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고)
2. 이기붕(1896 ~ 1960.4.28. 당시 64세)
1945년 이승만의 비서로 정계입문하여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과 함께 자유당 창당, 2년 후 이범석의 세력을 축출하고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1954년 민의원 의장이 되어,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한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하여,
일단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으로 번복 가결을 강행했다.
1960.3.15. 대통령선거 때 공개·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 되었으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에 피신해 있다가 당시 육군 장교이던 장남 이강석이 권총을 쏘아 전 가족이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경무대 경호실장이던 곽영주가 이승만의 하야를 막기 위해 여론을 무마시키고자
이기붕 가족을 살해였다는 설도 있다.
"시위대가 이기붕이 사는 서대문 자택까지 몰려가 포위하자,
이기붕은 신분의 위협을 느끼고 가족과 함께 경기도 포천의 6군단 내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기붕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고,
6군단 내에서도 민심의 원성을 사고 있는 이기붕을 언제까지 보호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1960.4.26일 밤 이기붕 일가는 이승만이 보내준 차를 타고 6군단을 떠나,
경무대(당시는 대통령 관저)별관에 있는 제 36호 관사로 피신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인 매카나기가 이기붕 가족의 미국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려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4월 28일 새벽 5시 40분 경 이기붕 일가는 모두 총탄을 맞고 죽어있었다.
세간에는 이기붕의 맏아들인 이강석이 부모와 형제들을 쏘고 자신도 자살했다고 알려졌다.
국회에서 직접 파견한 진상조사단의 결과 보고에 의하면 이기붕과 그 아내 박마리아와 둘째아들 이강옥은
이미 수면제를 먹고 숨을 거둔 상태에서 확인 사살되었고,
이강석은 복부와 머리에 각각 한 발씩 두 발의 총알을 맞은 상태였다.
수면제를 먹은 이기붕 부부는 자살한 걸로 볼 수 있지만,
이강석이 자기 몸에 그것도 서로 다른 두 부위에 총을 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기붕일가가 살았던 서대문 집은 국가에 환수되어 집터에 4.19 기념도서관이 들어서있다
3. 박마리아(1906~1960.4.28. 56세)
박 마리아는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
유학 중 10년 연상의 이기붕을 만나 결혼한 당시 대단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김활란, 유각경과 함께 조선YWCA(조선여자기독청년회)를 이끌었으며,
영어에 능통하여 프란체스카 여사와 교분을 나누며 남편의 출세를 도왔다.
남편이 이승만 정권의 실세로 떠오르자
그녀 자신도 이화여대 문리대학장,부총장,YWCA회장 등에 오르며
그들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첫댓글 고맙게 잘 봤습니다
잘 보고갑니다
잘보고 갑니다.